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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오트의 선택 - 아컴호러 카드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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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7 09: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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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GM]신나요
[코리아보드게임즈 웹진 원문 바로가기]
"정체불명의 존재들에 맞서는 일은 혼자서도 충분하죠."
2020년을 돌이켜보면 오랜 바람이었던 <글룸헤이븐> 같은 작품이 출시됐고, 유튜브 관련 업무 비중이 늘면서 업계인으로서 조금 더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는 해였다. 그렇지만 보드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로서는 그리 즐거울 수 없었다. 한 해 동안 밖에 나가서 보드게임 취미인들과 놀아본 횟수도, 파주 탄현면 여치길의 내 아지트에 놀러 왔던 사람 수도 손에 꼽힐 지경이었다. 보드게임을 즐기는 다른 사람들의 상황도 아마 나와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나는 보드게임을 혼자서는 별로 즐기지 않는다. 보드게임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끝날 것 같지 않은 비대면의 시대에 신념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다행히 혼자 놀기 아주 좋은 게임도 가까이에 있었다. <우봉고 3D 프로>, <사건의 재구성>의 확장들, <미스터리 하우스> 등과 같은 게임들 말이다. 하지만 2020년 한 해, 나를 위로해 준 최고의 혼자 놀기 게임은 <아컴호러 카드게임>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아컴호러 카드게임>은 판타지 플레이트 게임즈(이하 FFG)의 뛰어난 개발 능력과 원숙한 마케팅 능력이 듬뿍 담긴 게임이다. 20세기에 <백수왕 고라이온>이라는 5단 합체 로봇 애니메이션이 있었는데, 5개의 로봇을 따로따로 완구로 팔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이 완구의 특징은 5개를 다 사야지 합체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아컴호러 카드게임>은 <백수왕 고라이온> 완구마냥 여러 제품으로 쪼개져 있다. 각 제품에는 도전해야 할 시나리오 카드와 플레이어가 사용할 수 있는 덱 구성 소스도 같이 들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시나리오는 캠페인 단위로 서로 이어지는 데다가 플레이어 카드 역시 효율이 좋아 자주 쓰는 카드가 여러 제품에 분산되어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게임이 독특하고 잘 만들어졌으며 의외로 비슷한 게임이 없기에 일단 시작하면 모든 콘텐츠를 모으고 싶다는 열망으로 쉽게 이어진다. '한 번도 안 지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지른 사람은 없는 게임'이 아닐까 생각한다. 구입 후 규칙 등이 어려워서 제대로 못 즐기는 사람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일단 해 보면 다 모으고 싶어지도록 제품 개발을 잘했다.
사실 <아컴호러 카드게임> 한국어판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이 게임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생각이 없었다. 이 게임을 기본판만 맛보고 중지해야 하는 것은 고문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대다수의 보드게임에서 기본판과 확장의 판매 비율이 어떤지를 잘 알고 있고, 어떤 작품의 모든 확장을 한국어판으로 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모든 확장 콘텐츠를 모아 보고 싶은 팬들의 열망을 알지만 이는 쉽지 않은 결정이다. 게다가 기본판에 수록된 광신도의 밤 이이야기는 우몰도스라는 우주적 존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그 강함이나 약함과는 무관하게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가 주역이라는 느낌은 나로서는 조금 별로다. 물론 크툴루 신화는 H.P. 러브크래프트 작가의 단독 창작이라 볼 수 없고, 그의 동료나 후배 등에 가까운 인물인 어거스트 덜레스를 위시해 수많은 팬과 작가들의 손을 거치며 완성된 것이지만, 아무래도 나는 러브크래프트 작가나 어거스트 델레스 작가의 창작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에 좀 더 마음이 간다.
이런저런 장벽에도 불구하고, 코리아보드게임즈가 <아컴호러 카드게임>의 추가 확장판을 계속 공급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나를 이 세계로 뛰어들게 만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어찌 되었건 이 게임은 좋은 게임이고, 독특한 개성을 갖춘 게임이니까.
게임이 여러 제품으로 나뉘어 있다 보니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제품을 먼저 구매해야 하는지 질문을 종종 받는다. 일단은 필수 구성물 몇 가지가 포함된 기본판 1개(편집자 주: 이 글은 <아컴호러 카드게임> 개정판이 나오기 이전에 쓰여진 글이라 여기서 말하는 기본판은 구판입니다)는 반드시 있어야 하며, <던위치의 유산> 확장 세트 정도는 갖추고 시작하는 것이 좋다.
기본판을 2개 구입하는 것이 권장되기도 하는데, 이 게임에서 덱을 만들 때 같은 카드를 2장까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본판에는 상당수의 플레이어 카드가 1장씩만 들어있어, 효율적인 덱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기본판이 2개 필요한 것이다(편집자 주: 구판의 기본판을 기준으로 한 설명입니다. 개정판은 1개만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후 확장에 좋은 플레이어용 카드가 많이 있기 때문에 확장을 많이 구입하게 되면 기본판의 카드가 그렇게 아쉽지는 않을 거라는 입장이다. 물론 기본판에는 마체테나 밀란 크리스토퍼 박사 같은 좋은 카드가 1장만 들어 있어 아쉽기는 하지만, 기본판은 1개로 만족하고 확장에서 추가되는 덱 소스들을 기대하는 것도 좋다(편집자 주: 구판의 기본판을 기준으로 한 설명입니다).
게임의 시작은 주인공 조사자를 선택하고 덱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는 <매직 더 개더링>, <유희왕>, <포켓몬스터> 등의 트레이딩 카드 게임을 모두 어느 수준까지 했기 때문에 덱 만들기가 그렇게 부담이 없으나 모두가 그런 경험을 가진 것은 아니니 이 부분은 진입 장벽이 될 수 있다. 일단 기본판에는 추천하는 초보자용 덱 예시가 있는데 사실 그걸로 게임을 하면 게임의 분위기는 파악할 수 있겠지만, 승리보다는 패배할 일이 더 많을 것이다. 물론 처음 게임을 진행할 때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므로 한 번 쯤은 그대로 사용해보는 것도 좋다. 또 기본판 규칙서에서는 초보자는 로랜드 뱅크스를 선택하라고 추천하는데 이 말씀도 지키는 것을 권장한다. 기본판에 들어 있는 5명의 조사자, 기본판에 들어 있는 카드들, 기본판 규칙서가 추천하는 초보자용 덱의 구성, 기본판 캠페인의 내용 등을 생각할 때 로랜드 뱅크스가 승리할 확률이 높고, 패배하더라도 무언가 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아컴호러 카드게임>을 혼자 즐긴다고 하더라도 2명의 조사자를 관리하는 것이 권장되는데 그래야 서로의 약점 보완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컴호러 카드게임>은 조사자마다의 역할이 완벽하게 나뉘어 있지 않다. 이 게임은 탱커가 앞에 나선다고 적이 탱커하고만 싸워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모든 캐릭터가 탱커, 딜러, 힐러와 같은 여러 역할을 조금씩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래서 그나마 전투에 강하다고 볼 수 있고, 또 적이 나오면 잘 도망치는 웬디 애덤스가 두 번째 캐릭터로 좋다. 아니면 그냥 로랜드 뱅크스 하나로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혼자 두 조사자를 모두 관리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은데다 실제로 초보자가 해 보면 두 명의 강점을 극대화하고 약점을 보완하기보다는 둘의 약점만 더 부각되는 게임이 펼쳐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첫 게임에선 빨리 진행하며 게임 분위기를 익히는 것에 의의를 두자. 어차피 지게 되어 있다. 이 게임은 결코 쉽지 않다. 어느 시점에서는 단서를 모아야 하고, 어느 시점에서는 전투를 해야 한다. 전투를 준비하면 전투 없이 극복해야 하는 상황이 나올 것이고, 단서 찾는 전문가들을 깔아 놓으면 전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나올 것이다. 카드를 플레이하려면 자원이 필요하지만 그 자원은 쉽게 모이지 않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행동이 최고의 행동일 수도 있고, 최악의 행동일 수도 있다. 이렇게 선택과 선택 사이를 방황하다 보면 조우 카드에는 다양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플레이어를 괴롭히는 난관이 기다리고 있으며 조우 카드 너머에 우주적인 음모가 도사린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첫 게임에서 패배하고 나면 우리는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다. 일단 플레이어의 목적은 주로 단서 모으기와 전투라고 할 수 있는데 로랜드 뱅크스는 기본판 등장 조사자 중 전투에 가장 뛰어나면서, 조무라기들이 계속 나온다면 단서도 힘들이지 않고 확보할 수 있는 능력자다. 상황만 된다면 전투와 단서 모으기 양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싸워야 할 적이 나오지 않고, 단서를 얻는 난이도를 뜻하는 장막값을 높이는 조우 카드가 나오기 시작하면 로랜드 뱅크스의 지식이 결코 낮은 것이 아님에도 단서를 찾아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될 것이다.
이 게임이 본격적으로 재미있어지는 것은 한바탕 깨지고 난 뒤 이렇게 반성의 시간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기본판에 1장밖에 없지만 단서 찾기에 큰 도움이 되는 밀란 크리스토퍼 박사 카드를 추가로 확보하기 위해 기본판 1개를 더 주문할 수도 있고(편집자 주: 구판의 기본판을 기준으로 한 설명입니다. 개정판에서는 기본판을 굳이 더 구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서 찾기에 도움이 되는 주황색 카드들을 덱에 더 넣는 선택도 고려해볼 수 있으며, 지식에 특화된 조사자인 데이지 워커를 두 번째 조사자로 해서 덱 2개를 쓰거나 아예 데이지 워커 덱 하나로 재도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재도전을 해도 게임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다른 조사자들로도 해 보고 덱도 조금씩 바꿔보자. 기본판의 카드 소스로는 다양한 덱 구성이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소모성 중립 카드 정도는 약간 바꿔볼 여지가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플레이해보면 카드의 장단점도 파악하고 나의 성향에 맞는 조사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이 슬슬 풀리기 시작하는 것은 조우 카드에 어떤 카드가 나오는지를 알고, 게임 진행에서 겪는 이벤트들을 알고, 내 덱의 장단점을 알기 시작할 때부터다.
혹시라도 <아컴호러 카드게임 확장 세트: 던위치의 유산(이하 던위치의 유산)>을 구입했다면, 게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시점에서 확장에 수록된 플레이어용 카드들을 살펴보자. 이 카드들을 덱에 추가해서 기본판 캠페인에 도전하는 것은 반칙이 아니다. 그리고 <던위치의 유산>에는 좋은 카드가 꽤 많다. 기본판에서는 총을 자산으로 내려놓으면 전투에 상당히 유리했으나 총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에 제한이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던위치의 유산> 카드 중엔 이 문제를 해결할 카드가 있다. 이를 테면 총과 마체테를 동시에 휴대할 수 없었던 문제 같은 것이 <던위치의 유산>에서는 말끔히 해결된다. 경험치를 모아 구입할 수 있는 뇌격총 같은 카드는 지금 시점에서 만날 수 있는 어지간한 전투는 그냥 해결해주며 크툴루와 만나더라도 이길 것 같은 자신감을 심어준다. 카드를 하나하나 읽으면서, '아, 이거 넣으면 재밌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앞으로 도전도 훨씬 재밌을 거고, 확장이 나올 때마다 덱 연구하는 재미도 엄청날 것이다. 나도 그렇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나는 애초에 이 게임이 대단하다고 알고 있었고, FFG의 의도대로 게임에 빠지기는 했는데, <던위치의 유산> 캠페인은 더 대단했다. 특히 신화팩으로 제공되는 몇몇 시나리오는 그 자체가 독립 게임에 가까운 완성도도 있었으며, 아무래도 2차 창작 같은 우몰도스보다는 그동안 <아컴호러>나 <엘드리치 호러> 등의 아컴 파일즈 시리즈를 하며 익숙해진 요그 소토스와 던위치가 좀 더 나에게 고향에 돌아온 느낌을 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8개의 시나리오로 구성된 <던위치의 유산> 캠페인은 AAA 비디오 게임 하나를 클리어하는 정도의 감동과 플레이 타임, 그리고 연구하는 재미를 선사했다.
이 대단한 게임은 2021년부터 더욱 크게 확장됐다. <아컴카드 기본판 리턴투: 돌아온 광신도의 밤>은 기본판 캠페인의 밀도를 높여줬고, 해외 유저 평가가 <던위치의 유산> 세트보다 조금 더 높은 <아컴카드 확장: 카르코사로 가는길>이 2월에 발매되며 수상한 희곡과 카르코사, 그리고 황색의 왕이 이어갈 다음 이야기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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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네일_아컴호러카드게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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