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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기획기사 5편 – 세키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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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4 09: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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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 [GM]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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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GM]찰리입니다. 이제 길었던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장까지 왔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의 정세와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혼노지의 변 수습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의 원흉으로 국권침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한국인들에게는 국가적 원수입니다. 이 인물들에 대한 한국의 관점은 일본의 관점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히데요시를 입지전적인 인물로 바라보는 일본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야망과 광기로 불타는 인물로 그리는 편입니다. 저는 두 가지 모두 히데요시의 일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데요시는 다이묘는커녕 무사도 아니라 오다의 하인으로 출세길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성실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일처리 능력에 감복한 오다가 그를 중용하면서 다이묘의 지위에 올랐고, 혼노지의 변 직전에는 주코쿠 지방의 군단장까지 맡았습니다. 이 덕분에 그는 혼노지의 변 이후로 가장 먼저 교토에 도달하여 아케치 마츠히데를 토벌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혼노지의 변을 수습한 후 개최한 키요스 회의에서 히데요시는 오다의 세 살배기 장손을 후계자로 밀어 옹립합니다. 하지만 장성한 차남과 삼남은 이에 반발하였고, 히데요시와 비슷한 위치에 있던 다른 가신들 역시 그를 인정하지 않고 반기를 듭니다. 오다의 동맹이었던 도쿠가와 역시 오다의 차남 편에 서서 히데요시와 대적합니다.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 내에서 반기를 든 세력을 각개격파하며 오다 가문을 봉합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혼노지의 변 이후 생긴 혼란을 틈타 세력을 키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쉽게 굴복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도쿠가와와의 전쟁에서는 패전하며 전황이 불리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도쿠가와의 명분이었던 차남 쪽에 병력을 집중하여 오다의 차남과 단독으로 강화를 맺어버립니다. 이렇게 도쿠가와는 병력을 움직일 명분을 잃고 히데요시에게 입조하게 됩니다. 도쿠가와 입장에서 오다 가문의 세력을 거의 흡수하여 600만 석고에 달했던 히데요시와 단독으로 장기전을 끌고 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한편 히데요시 입장에서도 도쿠가와를 제압하는 것이 무리가 있었기에 도쿠가와를 입조시키기 위해 동생을 시집보내고 어머니까지 인질로 보내는 강수를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정권에 가장 위협적인 다이묘를 끝내 제압하지 못하고 훗날의 불씨를 남겨두게 됩니다.
2) 일본 통일
다시 오다의 영역을 발아래에 둔 히데요시는 오사카에 오사카성을 짓고 자신의 거처로 삼습니다. 이제 다시 전국시대 통일 작업에 나설 시기가 된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우선 오다가 하려다가 못한 시코쿠 정벌에 나서 쵸쇼가베 모토치카의 세력을 시코쿠 전역에서 도사 번으로 줄여놓습니다. 그런 다음 규슈를 거의 통일하기 직전이었던 시마즈 가문 정벌에도 나서 규슈 지방까지도 자신에게 복속시킵니다. 혼노지의 변 이전에 전쟁 중이던 모리 가문은 이미 히데요시에게 입조했기 때문에 이제 서일본은 모두 히데요시의 발아래에 있던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동진뿐이었습니다.
이제 히데요시에게 복속하지 않은 세력은 간토의 호조 우지마사와 도호쿠의 다테 마사무네뿐이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자신과 계속 대립각을 세운 호조 가문을 정벌하기 위해 전국적인 동원령을 내렸고, 도합 21만이나 되는 병력을 모집합니다. 히데요시의 정벌군은 호조 가문의 성을 파죽지세로 점령했고, 호조 가문은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도 함락하지 못했다는 오다와라성에서 마지막으로 농성에 들어갑니다. 지연전에 들어가면서 동맹인 다테의 지원과 다른 다이묘들의 반란을 기다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테는 히데요시의 군세를 보고 뒤늦게나마 히데요시의 정벌에 동참했고 다른 다이묘들은 이미 천하의 판도가 정해진 마당에 반란을 일으킬 이유는 없었습니다. 결국 더는 버틸 수 없던 호조 가문은 3개월 만에 오다와라성의 문을 열고 항복합니다. 호조 가문은 멸문당하는 것은 피했으나, 실권자인 호조 우지마사는 할복하고 당주였던 호조 우지나오는 고야산으로 추방당하며 세력이 와해됩니다. 이렇게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마무리하고 일본을 통일하는 데 성공합니다.
3) 도요토미 정권 체제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에게는 한 가지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이전의 가마쿠라씨나 아시카가씨와는 달리 히데요시는 천출이라 정이대장군에 오를 수 없는 신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그에 합당한 지위에 오를 수가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지요. 그런 그의 입장에서 자신의 권위를 세워줄 수 있는 존재는 일본 조정이었습니다.
일본 조정에는 천황의 섭정인 관백이라는 직책이 있었습니다. 막부가 생기기 전에는 일본의 실권을 쥔 직책이지만, 막부 시대로 넘어오며 유명무실해진 직위였습니다. 하지만 막부 시대에도 무가인 정이대장군 가문 출신은 오를 수 없는, 고셋케라 불리는 최상위 공가(조정 귀족)의 전유물인 직책이었습니다. 막부는 황실과 먼 친척인 무인들의 자리이지만, 최상위 공가는 대대로 황후를 배출하는 외척 가문의 자리였다고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고셋케는 황가가 아니지만 오히려 먼 황실 방계보다도 가문의 격이 높았던 것입니다. 조정은 물론 막부의 작위들조차 유명무실하고 참칭 하던 시대였지만, 조정 최상위 직책인 관백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히데요시 시대에 관백직을 놓고 고셋케 간에 갈등이 벌어집니다. 히데요시는 이들의 갈등을 이용하여 자신이 고셋케 중 한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 관백에 취임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런 다음,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 씨를 하사 받아 관백직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가문을 엽니다. 무인이 관백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데, 관백직에 오를 수 있는 새로운 가문이 창시된 것은 전래 없는 파격이었습니다.
관백에 오른 히데요시는 그때까지도 살아있던 마지막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공식적으로 천황에게 직을 반납하게 하여 막부를 끝냅니다. 이제 일본에 이어오던 막부와 조정의 이원정부체제가 종료되고 관백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들어선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첫아들이 요절하고 후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누나의 아들인 히데쓰구를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들입니다. 그리고 그 후계구도를 공고히 하기 위해 히데쓰구에게 관백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태합으로 올라섭니다. 일본에는 흔한 상왕 정치 구도가 관백직으로 재현된 것입니다. 히데요시가 최초의 태합은 아니었지만, 일본사의 모든 태합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에 태합이라고만 해도 일본에서는 히데요시를 지칭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흥선대원군을 대원군이라고만 부르기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인공인 게임의 이름이 <태합입지전>인 것입니다.
<태합입지전>이라는 게임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명목상 일인지하 만인지상, 실질적으로 일본 정점에 선 인물입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지금의 태합이라는 뜻의 “이마타이코(今太閤)”가 자수성가하여 출세한 인물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4) 다이묘 세력 재편
히데요시는 관백에 오른 후, 다이묘들의 세력을 재편하고 통제합니다. 우선 다이묘들이 힘을 기르는 것을 막기 위해 각 다이묘들이 사사로이 통혼하거나 전쟁을 벌이는 것을 금합니다. 이 정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도 명목상 이어졌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개전하게 되는 명분이 되기도 합니다. 당시 우에스기 카케카츠가 성을 세우고 병량을 쌓으며 전쟁을 준비했기에 도쿠가와는 이를 히데요시의 치침을 어긴 것이니 역심을 품은 것이라고 주장했고, 우에스기 측은 오히려 히데요시의 지침을 어기고 세력가들과 통혼하는 도쿠가와가 역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히데요시의 다이묘 세력 구상은 자신의 거성인 오사카를 중심으로 자신의 측근들을 인근에 배치하는 형식으로 다이묘들의 세력권을 안배합니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간토 전봉입니다. 주코쿠의 모리 가문의 경우, 모리 가문을 지지하는 분가 중 하나인 코바야카와 가문의 후계자로 자신의 외조카을 보냈고, 주코쿠에 나름 독립적인 세력을 자랑했던 우키타 가문의 후계자인 우키타 히데이에를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이며 견제했습니다. 하지만 주부의 도쿠가와는 이런 방식으로 견제할 수 없었기에 히데요시는 전봉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입니다.
전봉은 무사 입장에서는 리스크가 있는 행위입니다. 자신이 일군 영지를 모두 포기해야 하며, 새롭게 부임한 영지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막부 치하나 전국시대 동안 전봉된 영지에서 반란에 휩쓸려 사망한 다이묘는 부지기수입니다. 한편 무사라면 자신의 영지를 스스로 접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영지를 접수하지 못한 다이묘 이상으로, 새로운 영지를 잘 다스려 세력을 일군 다이묘도 많았습니다.
도쿠가와의 간토 전봉은 명목상으로는 석고(성인 남성 1명이 1년 동안 먹는 쌀의 양으로 영지의 경제력을 측정하는 단위)를 늘린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셈은 일단 이에야스를 교토에서 먼 변방으로 보내고, 호죠 가문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간토에서 저항을 받아 세력이 약화되거나 최선으로는 반란에 직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야스는 그 뒤에 숨은 뜻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지만, 히데요시의 전봉 명령을 받아들입니다.
이때 도쿠가와가 간토로 전봉되어 자리잡은 곳이 오늘날의 도쿄인 에도 성입니다. 에도 성 일대는 호죠 가문이 간토를 지배하던 시기에도 변방이라 지금과는 달리 시골 어촌이던 곳이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근거지인 가마쿠라도 호죠 가문의 중심지인 오다와라도 아닌 이곳을 도쿠가와가 선택한 이유는 이곳이 간토 내륙과 해안을 잇는 주요 교통지였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는 에도를 중심으로 간토를 발전시켰고, 이전의 영지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보존하며 히데요시의 기대를 완벽히 저버립니다.
5) 히데요시의 최후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일본을 정비한 히데요시는 명나라와 인도를 정벌하겠다는 야망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가도정명을 내세우며 조선을 도발한 끝에 히데요시를 한국인들의 국적으로 만든 임진왜란을 일으킵니다.
히데요시가 측근들조차 반대한 임진왜란을 기어이 일으킨 이유는 히데요시 본인의 야욕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휘하 영주들에게 더 많은 땅을 나눠주거나 다이묘들의 힘을 빼기 위한 것이다와 같은 시각도 있지만, 저는 이러한 시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임진왜란이 내치를 염두에 둔 정책이라는 가설의 반례는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만약 히데요시가 다이묘들의 힘을 빼기 위해 임진왜란을 기획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쿠가와를 임진왜란에 참전시켜야 맞았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내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밖으로 자신의 병력을 출진시킨 바가 없습니다. 단순히 땅이 목적이었다면, 역시나 일본 안에서 도쿠가와나 다른 다이묘를 다시 정벌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히데요시가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무장들을 선봉으로 세워 조선을 침공한 것은, 정말로 조선을 정벌하여 자신의 영지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도쿠가와의 참전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던 이유는 대륙 정벌의 영광을 이에야스에게 나누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히데요시의 이해할 수 없는 정복욕을 결국에는 쇼군에 올라 막부를 창시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 보려는 설도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대장군은 정이대장군이 아니라 정신라대장군입니다(삼국시대 동안 일본은 백제나 가야와 친교하며 신라를 적대했기 때문에 있는 직책입니다). 따라서 히데요시는 정이대장군에 오를 수 없다면, 아예 조선을 정벌하여 정신라대장군에 올라 막부를 열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기껏 막부를 해체하고 관백 체제를 만들었음에도 또 막부를 열고자 했다는 것이 이상한데, 관백은 도요토미 가문 외에도 다른 공가도 오를 수 있으니 안정적으로 승계가 가능한 막부를 열고자 했다고 하면 이해를 해볼 수도 있을 노릇입니다. 정말 그럴 의도였다고 해도 그 여력으로 관백 체제를 안정화시키는 편이 지도자로서 더 올바른 자세였겠지만, 히데요시는 국가의 지도자가 될 그릇이 못 될 인물이었습니다.
히데요시는 굉장히 여색을 밝히는 인물이었지만, 슬하에 자녀가 거의 없었습니다. 일찍이 낳았던 아들들이 모두 영아 시절에 사망했기에, 히데요시는 자신의 조카인 히데츠구를 양자로 맞아 관백에 올려 후계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도중인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첩실인 요도도노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으며 후계 구도가 엉망이 됩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적자를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욕심이 확고했기에, 히데요리가 출생하자 히데츠구는 관백이었음에도 그 지위가 매우 흔들립니다. 히데츠구는 히데요시의 의중을 읽고 히데요리가 아직 어리니 자신의 딸과 혼인시켜 장성할 때까지 자신이 후견인이 되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이 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결국 히데요시는 사소한 트집을 잡아 모반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히데츠구를 할복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히데츠구의 가족은 물론 가신들도 숙청당하면서 도요토미 세력 전체가 약화됩니다. 그나마 살아남은 히데츠구파 가신들은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에 섰으니, 도대체 누굴 위한 숙청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때의 히데요시는 이미 56세로 당시 기준으로는 충분히 고령인 나이라 갓난아기인 히데요리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기는 어려웠습니다. 물론 라이벌 도쿠가와는 73세까지 살았지만, 이에야스의 후계자인 삼남 히데타다는 1579년생으로 1593년 생인 히데요리와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적자에게 일본을 물려주겠다는 근시안적인 욕심 때문에 오히려 가문을 파멸로 몰아간 것입니다.
1598년 히데요시는 가문과 국가를 넘어 이웃 나라에까지 재앙만 안긴 채로 사망합니다. 히데요시 외에는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전쟁이었기에,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일본군은 조선에서 퇴각합니다. 이때 일본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음을 모르는 다이묘는 없었을 것입니다.
1) 칠본창과 오봉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은 무사인 칠본창과 문신인 오봉행으로 나뉩니다. 같은 히데요시파지만 양쪽 계파는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했습니다. 칠본창 중에는 임진왜란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와 한산도 대첩과 명량 해전에 모두 참전해 참패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유명합니다. 같은 무사지만 고니시 유키나카는 칠본창이 아니었고 가토 기요마사와는 철천지 원수로 유명했습니다. 오봉행 중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에 맞선 이시다 미츠나리가 유명합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가신들이 이렇게 사이가 좋지 않음을 알고 있었고, 오히려 이를 이용해 경쟁을 붙여 전공을 올리게끔 했습니다. 임진왜란의 선봉장으로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한 고니시와 가토를 세운 것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후, 이들의 갈등은 봉합되지 않고 벌어지게 됩니다.
2)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의 정세
히데요시 사후,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다이묘는 누가 뭐래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이때 당시의 도쿠가와의 석고는 200만 석이 넘는 규모로 모리 데루모토와 같은 다른 대다이묘와 비교해도 배가 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히데요시 사후의 일본 정세는 친도쿠가와와 반도쿠가와파로 나뉘게 됩니다. 반도쿠가와파의 거두는 주부 지방의 대다이묘인 마에다 토시이에였는데, 토시이에는 히데요시가 신분이 낮을 때부터 부부끼리도 교우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기에 석고 이상의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히데요시 사후에도 오봉행과 칠본창의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에다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 그의 지시를 어기고 다이묘간의 통혼을 하는 도쿠가와를 견제하고 암살을 기도하기도 하며 도요토미 가문의 패권을 지키고자 노력합니다. 하지만 히데요시 사후 얼마 되지 않아 토시이에마저 사망하면서 히데요시 가신단 사이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인물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갈등을 도쿠가와는 놓치지 않습니다.
중재자가 사라진 도요토미 가신단의 갈등은 극에 달해 칠본창 측에서 미츠나리를 죽이려는 시도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자 목숨의 위협을 느낀 미츠나리는 도쿠가와에게 의탁해 구명을 합니다. 이미 정적이었고 훗날 전장에서 맞붙는 둘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굉장히 이상한 일화인데, 이때 도쿠가와는 미츠나리의 정치 생명을 끝장내고자 미츠나리를 보호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미츠나리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의 거성으로 돌아가 은거했고, 미츠나리 대신 이에야스가 오사카에 머물며 일본의 정무를 주도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칠본창의 행보를 보면 이들이 정말 도요토미 가의 충신이 맞는지 의심됩니다. 이들이 조금이라도 대국적인 그림을 볼 수 있었다면, 도요토미의 천하를 지키기 위해 일치단결하여 도쿠가와를 견제하는 것이 맞다는 것은 이 시대 역사를 보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뼛속까지 무사였기에, 정말 순진하게도 요사스러운 문신인 미츠나리가 아니라 믿음직한 대다이묘인 도쿠가와야 말로 도요토미 가문을 제대로 보필해 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마에다 토시이에 사후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택한 것입니다. 영화 타짜의 명대사 “늑대새끼가 어떻게 개 밑으로 들어가냐”는 말처럼 신하의 그릇은 주군의 그릇을 따라가는 법입니다.
이시다가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도요토미 가신단은 풍비박산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반도쿠가와라는 기지는 여전히 의미가 있었기에 이시다는 자신에 편에 설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반도쿠가와에 가장 적극적인 다이묘는 도쿠가와와 바로 인접한 우에스기 카케카츠였습니다. 우에스기 카케카츠는 겐신 사후의 내분을 수습하고 히데요시에게 순응하며 이전과 비슷한 세력을 유지합니다. 도쿠가와와 단독으로 대적할 체급은 아니었지만, 도쿠가와와 바로 인접했기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으로 꼽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의 시발점이 된 것은 우에스기 카케카츠였습니다.
다음으로 반도쿠가와에 참여한 세력은 주코쿠의 다이묘 모리 데루모토였습니다. 주코쿠의 패자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인 모리 데루모토는 할아버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도쿠가와도 무시 못할 세력가였습니다. 게다가 형제 가문인 코바야카와 가문은 아예 히데요시의 조카가 양자로 가문을 이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주변의 조언을 받아 모리 데루모토를 도쿠가와에 대응하는 서군의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자 했고, 데루모토는 외교를 담당한 승려 안코쿠지 에케이의 조언을 받아 이 직을 수락합니다.
이시다 입장에서는 히데요시의 양자들은 소위 말해 믿을맨들이었습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와 우키타 히데이에가 바로 그들입니다. 둘 다 히데요시의 양자지만 이 둘의 입장은 조금 달랐습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조카였습니다. 자식이 없던 히데요시는 히데아키를 양자로 들였다가 코바야카와 가문에 양자로 보내면서 후계구도를 정리하고 주코쿠에 친위세력을 세웠습니다. 한편 우키타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와 혈연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우키타 히데이에의 아버지인 우키타 나오이에는 주코쿠의 패자인 모리 모토나리의 등쌀 속에서도 갖은 수를 동원하여 자립한 다이묘입니다. 하지만 전국시대 말기의 패권전쟁에서 중소 다이묘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었는데, 결국 최후를 앞두고 히데요시를 상대로 마지막 승부수를 겁니다. 자신이 사망하면 자신의 미망인을 거두고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이를 받아들였고, 우키타 히데이에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중용합니다. 임진왜란에서 수많은 노련한 장수들을 두고 젊은 우키타 히데이에가 총사령관으로 오른 이유가 바로 히데요시의 양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두 양자의 행보는 엇갈리게 됩니다.
한편 주부 지방에서 나름의 세력을 자랑하던 사나다 마사유키도 서군으로 제안을 받았는데, 양측에 모두 연이 있던 사나다 마사유키는 도쿠가와의 사위였던 장남은 동군으로 보내고 자신과 차남은 서군으로 참전합니다. 그밖에도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하여 이시다와 가까웠던 소규모 다이묘들도 서군에 참전했습니다.
한편 도쿠가와의 동군에는 마에다 토시이에의 뒤를 이은 마에다 토시나가가 참여합니다. 아버지는 도쿠가와의 가장 큰 정적이었지만, 아들은 정작 도쿠가와 편에 붙은 것입니다. 마에다 토시이에는 사망하면서 아들들에게 도요토미 가문을 지키라는 유훈을 남겼지만, 토시이에의 아내는 그가 죽은 후 아들들에게 “너희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너희 아버지만 못하니 기어라.”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하지만 정확히는 마에다 가문이 먼저 도요토미 가문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토시이에 사후, 마에다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과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입니다. 당연히 마에다 가문에서는 우군인 도요토미파 다이묘들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외면당합니다. 결국 마에다 가문은 토시이에의 아내이자 토시나가의 어머니인 마츠를 인질로 보내고 도쿠가와와 혼인동맹을 하는 것으로 전쟁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도요토미파는 가장 중요한 우군을 잃게 됩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비롯한 칠본창들도 대부분 동군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 시기에 도요토미가의 본진인 오사카에 있었기에 강제적으로 서군에 참여합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영지가 규슈에 있었기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대신, 옆 동네 고니시의 영지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전쟁에 참여합니다.
토호쿠에서는 다테 마사무네와 모가미 요시아키가 동군에 참여합니다. 모가미의 경우 히데츠구가 숙청되는 과정에서 딸이 죽었기에 원한이 있었고, 다테는 모가미의 외조카였습니다. 이 두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우에스기 카케카츠와의 별도의 전선에서 자신들의 전쟁을 이어갑니다.
3) 세키가하라 전역
본격적으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용어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1600년 10월 21일 세키가하라에서 벌어진 회전을 세키가하라 전투라고 부르지만, 이 회전이 있기 전까지 일본 전역에서 벌어진 전투들 역시 뭉뚱그려서 세키가하라 전투로 부르기도 합니다. 저는 전자만을 세키가하라 전투라 부르고, 후자의 의미로는 세키가하라 전역이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은거한 후, 이에야스는 오사카에 머물며 실권을 장악합니다. 이 시기 이에야스는 자신의 지위를 활용해 위협적인 다이묘들을 제압합니다. 가장 먼저 마에다 가문이 자신의 암살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정벌에 나섰고, 앞서 설명했듯 마에다 가문은 이에야스에 복종하는 것으로 이 사건은 종결됩니다.
마에다를 굴복시킨 이에야스는 다음으로 우에스기 카케카츠를 노립니다. 도쿠가와는 우에스기 가문이 성을 짓고 군비를 증강하는 이유를 해명하라며 교토로 상경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우에스기측은 카케카츠의 가신인 나오에 가네쓰구가 나오에장이라고 불리는 반박문을 발표하며 도발로 대응합니다. 이러한 도발에 분노한 이에야스는 우에스기를 토벌하기 위해 오사카를 떠나 본거지인 에도로 돌아갑니다. 이 도발장은 실존했던 것인지, 후대의 창작인지 논쟁의 여지가 있기는 합니다. 무엇이 사실이냐에 따라 우에스기가 이시다와 사전에 교감을 하고 도발을 한 것인지, 오히려 이시다의 거병을 유도하기 위해 도쿠가와가 만든 함정인지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시다는 도쿠가와가 에도로 돌아간 것을 알자 서군을 조직해 거병합니다. 본격적으로 세키가하라 전역이 개전된 것입니다. 이시다는 최대한 많은 다이묘를 세력에 가담시키기 위해 인질을 확보하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호소카와 가문의 인질이었던 호소카와 가라샤가 인질이 되기를 거부하고 사망하며 호소카와 가문이 이탈하며 이시다의 평판은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럼에도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기에, 이시다는 동군 측 성을 함락시키며 거점인 오사카성에 입성합니다.
한편 도쿠가와는 우에스기 카케카츠는 다테와 모가미에게 맡긴 채, 에도에 머물면서 정세를 살핍니다. 그동안 동군의 주력을 맡은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비롯한 무장들은 서군에 속한 오다 히데노부가 다스리던 기후성을 함락시킵니다. 인근의 기후성은 일본의 양대 가도인 나카센도와 도카이도를 장악할 수 있는 거점이었습니다. 도쿠가와가 본거지인 에도에서 서군의 심장인 오사카로 진격하려면 양대 가도를 반드시 거쳐야 했기에 기후성 공략은 이 전역의 향방을 가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기후성을 손에 넣은 도쿠가와는 마침내 에도에서 출진합니다.
이에야스는 스스로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도카이도를 따라 진군했고, 후계자인 히데타다에게는 3만 8천의 병력을 맡겨 나카센도를 따라 진군하게 합니다. 그런데 히데타다는 진군 도중에 서군에 속한 사나다 마사유키의 성을 공략하느라 시간을 많이 지체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합니다. 이에야스는 전투가 끝난 후에나 도착한 히데타다를 매우 질책했다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가주와 후계자가 동시에 전사한 오다 노부나가의 전례를 보고 일부러 히데타다를 대규모 병력과 함께 후방에 배치했다고도 합니다.
비교적 순탄하게 전투를 이어온 동군과는 달리 서군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서군 총대장이었던 모리 데루모토는 오사카 성에 주둔한 채 출진하지 않았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작전회의에 참여하지 않아 배신이 의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후방에 있는 동군 세력인 타나베성을 공략하는데 병력 15,000명이 묶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쿠가와가 기후성을 장악하고 서군의 코앞까지 도달하자 이시다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기전이 될 것처럼 보였던 전쟁은 단판승부로 바뀝니다.
4) 세키가하라 전투
이시다가 선택한 전장은 교토와 오사카로 넘어가는 길목인 세키가하라였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적을 막지 못한다면, 간사이 지방 전체가 적의 위협에 노출되어 병력을 나누어 적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부 결속이 좋지 않은 서군 입장에서 병력을 나누어 적을 막는 것은 더 위험했기에 이시다가 세키가하라를 전장으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양군은 위와 같이 포진합니다. 양측의 병력 숫자는 여러 설이 있지만 각각 적어도 8만 명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11시 방향의 석전삼성(石田三成)이 이시다 미츠나리, 가운데의 덕천가강(德川家康)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이시다는 전선에 위치했던 반면 도쿠가와는 전선에서 약간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9시 방향, 서군의 우현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隆景)가 맡았습니다. 5시 방향에 있는 서군은 모리 히데모토와 킷카와 히로이에입니다.
포진만 놓고 보면 서군(파란색)이 고지대에서 동군(빨간색)을 포위한 형국이라 유리했습니다. 서군의 본대는 적을 학익진으로 포위하고 있었고, 서군 별동대는 적의 퇴로를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일본에 교관으로 온 프로이센 장교에게 누군가 이 포진을 보여주자, 서군의 승리라고 주저 없이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 전투가 동군의 승리로 끝났다는 사실을 알고는 작전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전투의 향방을 가른 것은 작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2시간 동안 대치하던 양군은 안개가 걷히자 격돌합니다. 가장 먼저 앞장선 것은 도쿠가와의 돌격대장 이이 나오마사였습니다. 본래 선봉을 맡았던 후쿠시마 마사노리 역시 부대를 움직였고, 서군은 우키타와 이시다가 이에 응전했습니다.
아침부터 시작된 교전은 정오까지 이어졌고, 이때까지만 해도 서군은 동군을 상대로 밀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익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후미를 맡은 모리 군도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전투에 참여해 준다면 전세를 확실히 유리하게 가져올 수 있었기에 이시다는 봉화를 올려 이들의 참전을 독려합니다.
한편 도쿠가와 역시도 더는 기다리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병력이 다 모이지 않았음에도 적진으로 출진한 이유는 믿을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전황이 교착되도록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는 코바야카와 진영으로 철포를 날립니다. 이에 놀란 코바야카와는 사전에 약속한 대로 서군을 배신하고 공격합니다. 그리고 코바야카와의 배신을 필두로 모래알 같았던 서군의 다이묘들은 이탈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진영이 붕괴된 서군은 분전이 무색하게도 무너지며 전투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동쪽에 있던 서군 별동대는 동군과 내통한 킷카와 히로이에가 아군의 진출로를 막은 채 주저앉으며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이쪽의 총사령관인 모리 히데모토는 자신이 모리 가문의 가주도 아닌지라 킷카와 군을 어찌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기에 병사들에게 도시락을 먹인다는 핑계로 같이 주저앉습니다. 두 다이묘가 이런 판국이었으니 모리 가문의 주전론을 이끈 안코쿠지 에케이도 전장에 나설 수는 없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전투를 관망하다가 오사카로 회군합니다. 이렇게 일본의 운명을 건 대결은 배신으로 종결됩니다.
5) 전후처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은 몰살당합니다. 대부분은 큰 피해를 입고 몰살되었고, 그나마 전력을 유지한 모리 가문은 오사카로 퇴각했다가 도쿠가와에게 항복합니다. 우에스기 카케카츠를 비롯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서군 다이묘들 역시 전투의 결과를 듣고 항복합니다.
서군의 핵심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와 안코쿠지 에케이, 고니시 유키나가는 패전 후 달아났으나 모두 붙잡힙니다. 이들은 조리돌림을 당하고 처형당합니다. 똑같이 서군의 핵심이었던 우키타 히데이에는 처가인 마에다 가문이 구명을 해준 덕분에 목숨은 부지하고 태평양 방면의 외딴섬으로 유배당합니다. 이들의 영지는 모두 몰수되어 동군 다이묘들에게 분배됩니다. 우에스기 카케카츠는 멸문당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영지를 대부분 잃고 본래 가신의 땅이었던 최북부 일부만 유지합니다.
반면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이전보다 더 높은 석고로 영지를 옮깁니다. 하지만 똑같이 배신으로 공을 세운 킷카와 히로이에는 자신이 약속받은 대로 모리 가문을 지키지 못합니다. 도쿠가와는 주코쿠의 대다이묘이자 서군의 총대장이었던 모리 데루모토를 그대로 둘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는 모리 가문의 영지를 모조리 몰수하고 그중 일부를 킷카와 히로이에에게 내리고자 했습니다. 히로이에는 이와 같은 조치에 놀라 자신의 몫으로 올 영지를 모리 가문에 남겨줄 것을 탄원합니다. 결국 모리 가문은 이렇게 일부 영지나마 지키는 데 성공했으나 킷카와 히로이에는 배반자로 낙인찍히고 모리 가문 내에서의 입지도 좁아집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의 석고는 기존의 250만 석에서 400만 석으로 증가됩니다. 반면 도요토미 가문의 직할령은 222만 석에서 65만 석으로 크게 삭감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다른 다이묘들이 연합하더라도 도쿠가와에게 대항하기가 어려운 수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3년이 지난 후, 도쿠가와는 스스로 막부를 개창하고 자신의 본거지인 에도를 수도로 삼습니다. 일본의 마지막 막부인 에도 막부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막부를 개창한 후에도 관백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한 칠본창과 같은 세력은 물론, 그동안 쌓아둔 도요토미 가문의 재력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분상으로도 관백이 정이대장군보다 상위직이기에 에도 막부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려면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반드시 제거해야 했습니다. 도쿠가와는 아직까지 남아있던 도요토미파 다이묘들을 숙청한 후, 마침내 오사카를 정벌합니다.
에도 막부는 이전의 무신 정권보다 오랜 기간인 264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가마쿠라 막부가 141년, 무로마치 막부가 252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무로마치 막부는 전후로 남북조시대와 전국시대가 걸쳐있어 실질적으로 일본 전역을 통치한 기간은 70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완전한 중앙집권을 이루지는 않았지만,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 덕분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일본의 문화와 풍습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선 도쿠가와는 다이묘들을 통제하기 위해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사농공상으로 구분되는 엄격한 신분제를 처음으로 도입합니다. 전국시대만 해도 상인이나 농민 출신으로 출세한 무사들이 있었지만, 에도 막부 시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일본의 경직된 사회변동성은 에도 막부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도쿠가와가 다이묘들의 재정을 소모시키고 견제하고자 만든 제도로는 참근교대도 있습니다. 참근교대는 1년을 주기로 다이묘들이 에도로 상경하여 생활하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다이묘들이 홀로 상경하는 것이 아니라 가신단과 병력을 이끌고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다이묘들의 재정에 큰 부담이 되는 제도였습니다. 게다가 얼마나 화려한 규모로 상경하느냐가 각 다이묘들의 위세를 보여줄 수 있는 일이었기에 나중에는 지나치게 과열되어 막부 차원에서 자제를 명할 정도였습니다. 참근교대로 인해 주기적으로 대규모 인구이동이 발생했기에 에도 시대를 거치며 일본의 교통과 상업이 발전하게 됩니다.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이 된 초밥도 에도 시대에 상업이 발전하며 탄생한 일종의 패스트푸드였습니다.
에도 시대를 거치며 일본의 중심지는 완전히 간토로 넘어갑니다. 간토를 중심지로 삼았으나 한계에 봉착한 가마쿠라 막부나 아예 교토로 중심지를 옮긴 무로마치 막부와는 달랐던 것입니다. 도쿠가와는 에도로 전봉 되면서부터 이 지역을 계획적으로 발전시켰고, 자신의 압도적인 세력을 바탕으로 다이묘들을 효율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시대 최고의 명장이라 천하를 얻고 자신의 막부를 개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쿠가와는 전국시대 최고의 행정가이자 정치가였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다가 지은 밥으로 도요토미가 떡을 지었더니 도쿠가와가 먹었다는 이야기는 도쿠가와 입장에서는 약간 억울한 평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천하를 무력으로 통일하는 것 이상으로 천하를 통치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세키가하라> 기획기사 시리즈는 <세키가하라>가 출시될 즈음에 마지막 편을 올리는 것으로 기획을 했습니다. 처음 생각보다 글이 많이 길어졌지만, 결국 예정된 대로 <세키가하라> 출시를 앞두고 마지막 편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 기획기사는 <세키가하라>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을 미리 알아보실 수 있도록 정보를 전달하고자 연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에 비교적 덜 친숙한 개념들을 설명하기 위해 꽤나 많은 TMI가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부디 재미있게 즐겨주셨길 바랍니다.
보드게임 <세키가하라>에는 게임 작가가 자신의 관점으로 작성한 역사 이야기도 실려있습니다. 한국어판에는 추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에 주석을 달아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해드리고자 했습니다. 작업 과정에서 주석을 더 달 수 없어 아쉬웠던 지점들이 모여 이번 기획기사를 쓰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세키기하라> 기획기사는 이번 편을 끝으로 연재를 마감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워게임 입문을 망설이시는 분들을 위한 간단한 게임 공략을 마지막 기사로 보내드릴 생각입니다. 다음 게시글은 <세키가하라> 기획기사가 아니라 <세키가하라> 공략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키가하라 기획기사 1편 – 일본의 지리(2)
세키가하라 기획기사 2편 – 두 일본인 이야기
세키가하라 기획기사 3편 - 야마토와 막부
세키가하라 기획기사 4편 – 전국시대부터 혼노지의 변까지
안녕하세요? [GM]찰리입니다. 이제 길었던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장까지 왔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의 정세와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도요토미 히데요시
1) 혼노지의 변 수습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의 원흉으로 국권침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한국인들에게는 국가적 원수입니다. 이 인물들에 대한 한국의 관점은 일본의 관점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히데요시를 입지전적인 인물로 바라보는 일본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야망과 광기로 불타는 인물로 그리는 편입니다. 저는 두 가지 모두 히데요시의 일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데요시는 다이묘는커녕 무사도 아니라 오다의 하인으로 출세길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성실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일처리 능력에 감복한 오다가 그를 중용하면서 다이묘의 지위에 올랐고, 혼노지의 변 직전에는 주코쿠 지방의 군단장까지 맡았습니다. 이 덕분에 그는 혼노지의 변 이후로 가장 먼저 교토에 도달하여 아케치 마츠히데를 토벌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혼노지의 변을 수습한 후 개최한 키요스 회의에서 히데요시는 오다의 세 살배기 장손을 후계자로 밀어 옹립합니다. 하지만 장성한 차남과 삼남은 이에 반발하였고, 히데요시와 비슷한 위치에 있던 다른 가신들 역시 그를 인정하지 않고 반기를 듭니다. 오다의 동맹이었던 도쿠가와 역시 오다의 차남 편에 서서 히데요시와 대적합니다.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 내에서 반기를 든 세력을 각개격파하며 오다 가문을 봉합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혼노지의 변 이후 생긴 혼란을 틈타 세력을 키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쉽게 굴복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도쿠가와와의 전쟁에서는 패전하며 전황이 불리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도쿠가와의 명분이었던 차남 쪽에 병력을 집중하여 오다의 차남과 단독으로 강화를 맺어버립니다. 이렇게 도쿠가와는 병력을 움직일 명분을 잃고 히데요시에게 입조하게 됩니다. 도쿠가와 입장에서 오다 가문의 세력을 거의 흡수하여 600만 석고에 달했던 히데요시와 단독으로 장기전을 끌고 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한편 히데요시 입장에서도 도쿠가와를 제압하는 것이 무리가 있었기에 도쿠가와를 입조시키기 위해 동생을 시집보내고 어머니까지 인질로 보내는 강수를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정권에 가장 위협적인 다이묘를 끝내 제압하지 못하고 훗날의 불씨를 남겨두게 됩니다.
2) 일본 통일
다시 오다의 영역을 발아래에 둔 히데요시는 오사카에 오사카성을 짓고 자신의 거처로 삼습니다. 이제 다시 전국시대 통일 작업에 나설 시기가 된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우선 오다가 하려다가 못한 시코쿠 정벌에 나서 쵸쇼가베 모토치카의 세력을 시코쿠 전역에서 도사 번으로 줄여놓습니다. 그런 다음 규슈를 거의 통일하기 직전이었던 시마즈 가문 정벌에도 나서 규슈 지방까지도 자신에게 복속시킵니다. 혼노지의 변 이전에 전쟁 중이던 모리 가문은 이미 히데요시에게 입조했기 때문에 이제 서일본은 모두 히데요시의 발아래에 있던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동진뿐이었습니다.
이제 히데요시에게 복속하지 않은 세력은 간토의 호조 우지마사와 도호쿠의 다테 마사무네뿐이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자신과 계속 대립각을 세운 호조 가문을 정벌하기 위해 전국적인 동원령을 내렸고, 도합 21만이나 되는 병력을 모집합니다. 히데요시의 정벌군은 호조 가문의 성을 파죽지세로 점령했고, 호조 가문은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도 함락하지 못했다는 오다와라성에서 마지막으로 농성에 들어갑니다. 지연전에 들어가면서 동맹인 다테의 지원과 다른 다이묘들의 반란을 기다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테는 히데요시의 군세를 보고 뒤늦게나마 히데요시의 정벌에 동참했고 다른 다이묘들은 이미 천하의 판도가 정해진 마당에 반란을 일으킬 이유는 없었습니다. 결국 더는 버틸 수 없던 호조 가문은 3개월 만에 오다와라성의 문을 열고 항복합니다. 호조 가문은 멸문당하는 것은 피했으나, 실권자인 호조 우지마사는 할복하고 당주였던 호조 우지나오는 고야산으로 추방당하며 세력이 와해됩니다. 이렇게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마무리하고 일본을 통일하는 데 성공합니다.
3) 도요토미 정권 체제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에게는 한 가지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이전의 가마쿠라씨나 아시카가씨와는 달리 히데요시는 천출이라 정이대장군에 오를 수 없는 신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그에 합당한 지위에 오를 수가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지요. 그런 그의 입장에서 자신의 권위를 세워줄 수 있는 존재는 일본 조정이었습니다.
일본 조정에는 천황의 섭정인 관백이라는 직책이 있었습니다. 막부가 생기기 전에는 일본의 실권을 쥔 직책이지만, 막부 시대로 넘어오며 유명무실해진 직위였습니다. 하지만 막부 시대에도 무가인 정이대장군 가문 출신은 오를 수 없는, 고셋케라 불리는 최상위 공가(조정 귀족)의 전유물인 직책이었습니다. 막부는 황실과 먼 친척인 무인들의 자리이지만, 최상위 공가는 대대로 황후를 배출하는 외척 가문의 자리였다고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고셋케는 황가가 아니지만 오히려 먼 황실 방계보다도 가문의 격이 높았던 것입니다. 조정은 물론 막부의 작위들조차 유명무실하고 참칭 하던 시대였지만, 조정 최상위 직책인 관백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히데요시 시대에 관백직을 놓고 고셋케 간에 갈등이 벌어집니다. 히데요시는 이들의 갈등을 이용하여 자신이 고셋케 중 한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 관백에 취임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런 다음,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 씨를 하사 받아 관백직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가문을 엽니다. 무인이 관백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데, 관백직에 오를 수 있는 새로운 가문이 창시된 것은 전래 없는 파격이었습니다.
관백에 오른 히데요시는 그때까지도 살아있던 마지막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공식적으로 천황에게 직을 반납하게 하여 막부를 끝냅니다. 이제 일본에 이어오던 막부와 조정의 이원정부체제가 종료되고 관백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들어선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첫아들이 요절하고 후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누나의 아들인 히데쓰구를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들입니다. 그리고 그 후계구도를 공고히 하기 위해 히데쓰구에게 관백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태합으로 올라섭니다. 일본에는 흔한 상왕 정치 구도가 관백직으로 재현된 것입니다. 히데요시가 최초의 태합은 아니었지만, 일본사의 모든 태합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에 태합이라고만 해도 일본에서는 히데요시를 지칭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흥선대원군을 대원군이라고만 부르기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인공인 게임의 이름이 <태합입지전>인 것입니다.
<태합입지전>이라는 게임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명목상 일인지하 만인지상, 실질적으로 일본 정점에 선 인물입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지금의 태합이라는 뜻의 “이마타이코(今太閤)”가 자수성가하여 출세한 인물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4) 다이묘 세력 재편
히데요시는 관백에 오른 후, 다이묘들의 세력을 재편하고 통제합니다. 우선 다이묘들이 힘을 기르는 것을 막기 위해 각 다이묘들이 사사로이 통혼하거나 전쟁을 벌이는 것을 금합니다. 이 정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도 명목상 이어졌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개전하게 되는 명분이 되기도 합니다. 당시 우에스기 카케카츠가 성을 세우고 병량을 쌓으며 전쟁을 준비했기에 도쿠가와는 이를 히데요시의 치침을 어긴 것이니 역심을 품은 것이라고 주장했고, 우에스기 측은 오히려 히데요시의 지침을 어기고 세력가들과 통혼하는 도쿠가와가 역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히데요시의 다이묘 세력 구상은 자신의 거성인 오사카를 중심으로 자신의 측근들을 인근에 배치하는 형식으로 다이묘들의 세력권을 안배합니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간토 전봉입니다. 주코쿠의 모리 가문의 경우, 모리 가문을 지지하는 분가 중 하나인 코바야카와 가문의 후계자로 자신의 외조카을 보냈고, 주코쿠에 나름 독립적인 세력을 자랑했던 우키타 가문의 후계자인 우키타 히데이에를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이며 견제했습니다. 하지만 주부의 도쿠가와는 이런 방식으로 견제할 수 없었기에 히데요시는 전봉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입니다.
전봉은 무사 입장에서는 리스크가 있는 행위입니다. 자신이 일군 영지를 모두 포기해야 하며, 새롭게 부임한 영지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막부 치하나 전국시대 동안 전봉된 영지에서 반란에 휩쓸려 사망한 다이묘는 부지기수입니다. 한편 무사라면 자신의 영지를 스스로 접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영지를 접수하지 못한 다이묘 이상으로, 새로운 영지를 잘 다스려 세력을 일군 다이묘도 많았습니다.
도쿠가와의 간토 전봉은 명목상으로는 석고(성인 남성 1명이 1년 동안 먹는 쌀의 양으로 영지의 경제력을 측정하는 단위)를 늘린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셈은 일단 이에야스를 교토에서 먼 변방으로 보내고, 호죠 가문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간토에서 저항을 받아 세력이 약화되거나 최선으로는 반란에 직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야스는 그 뒤에 숨은 뜻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지만, 히데요시의 전봉 명령을 받아들입니다.
이때 도쿠가와가 간토로 전봉되어 자리잡은 곳이 오늘날의 도쿄인 에도 성입니다. 에도 성 일대는 호죠 가문이 간토를 지배하던 시기에도 변방이라 지금과는 달리 시골 어촌이던 곳이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근거지인 가마쿠라도 호죠 가문의 중심지인 오다와라도 아닌 이곳을 도쿠가와가 선택한 이유는 이곳이 간토 내륙과 해안을 잇는 주요 교통지였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는 에도를 중심으로 간토를 발전시켰고, 이전의 영지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보존하며 히데요시의 기대를 완벽히 저버립니다.
5) 히데요시의 최후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일본을 정비한 히데요시는 명나라와 인도를 정벌하겠다는 야망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가도정명을 내세우며 조선을 도발한 끝에 히데요시를 한국인들의 국적으로 만든 임진왜란을 일으킵니다.
히데요시가 측근들조차 반대한 임진왜란을 기어이 일으킨 이유는 히데요시 본인의 야욕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휘하 영주들에게 더 많은 땅을 나눠주거나 다이묘들의 힘을 빼기 위한 것이다와 같은 시각도 있지만, 저는 이러한 시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임진왜란이 내치를 염두에 둔 정책이라는 가설의 반례는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만약 히데요시가 다이묘들의 힘을 빼기 위해 임진왜란을 기획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쿠가와를 임진왜란에 참전시켜야 맞았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내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밖으로 자신의 병력을 출진시킨 바가 없습니다. 단순히 땅이 목적이었다면, 역시나 일본 안에서 도쿠가와나 다른 다이묘를 다시 정벌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히데요시가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무장들을 선봉으로 세워 조선을 침공한 것은, 정말로 조선을 정벌하여 자신의 영지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도쿠가와의 참전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던 이유는 대륙 정벌의 영광을 이에야스에게 나누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히데요시의 이해할 수 없는 정복욕을 결국에는 쇼군에 올라 막부를 창시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 보려는 설도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대장군은 정이대장군이 아니라 정신라대장군입니다(삼국시대 동안 일본은 백제나 가야와 친교하며 신라를 적대했기 때문에 있는 직책입니다). 따라서 히데요시는 정이대장군에 오를 수 없다면, 아예 조선을 정벌하여 정신라대장군에 올라 막부를 열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기껏 막부를 해체하고 관백 체제를 만들었음에도 또 막부를 열고자 했다는 것이 이상한데, 관백은 도요토미 가문 외에도 다른 공가도 오를 수 있으니 안정적으로 승계가 가능한 막부를 열고자 했다고 하면 이해를 해볼 수도 있을 노릇입니다. 정말 그럴 의도였다고 해도 그 여력으로 관백 체제를 안정화시키는 편이 지도자로서 더 올바른 자세였겠지만, 히데요시는 국가의 지도자가 될 그릇이 못 될 인물이었습니다.
히데요시는 굉장히 여색을 밝히는 인물이었지만, 슬하에 자녀가 거의 없었습니다. 일찍이 낳았던 아들들이 모두 영아 시절에 사망했기에, 히데요시는 자신의 조카인 히데츠구를 양자로 맞아 관백에 올려 후계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도중인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첩실인 요도도노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으며 후계 구도가 엉망이 됩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적자를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욕심이 확고했기에, 히데요리가 출생하자 히데츠구는 관백이었음에도 그 지위가 매우 흔들립니다. 히데츠구는 히데요시의 의중을 읽고 히데요리가 아직 어리니 자신의 딸과 혼인시켜 장성할 때까지 자신이 후견인이 되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이 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결국 히데요시는 사소한 트집을 잡아 모반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히데츠구를 할복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히데츠구의 가족은 물론 가신들도 숙청당하면서 도요토미 세력 전체가 약화됩니다. 그나마 살아남은 히데츠구파 가신들은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에 섰으니, 도대체 누굴 위한 숙청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때의 히데요시는 이미 56세로 당시 기준으로는 충분히 고령인 나이라 갓난아기인 히데요리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기는 어려웠습니다. 물론 라이벌 도쿠가와는 73세까지 살았지만, 이에야스의 후계자인 삼남 히데타다는 1579년생으로 1593년 생인 히데요리와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적자에게 일본을 물려주겠다는 근시안적인 욕심 때문에 오히려 가문을 파멸로 몰아간 것입니다.
1598년 히데요시는 가문과 국가를 넘어 이웃 나라에까지 재앙만 안긴 채로 사망합니다. 히데요시 외에는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전쟁이었기에,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일본군은 조선에서 퇴각합니다. 이때 일본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음을 모르는 다이묘는 없었을 것입니다.
2. 세키가하라 전투
1) 칠본창과 오봉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은 무사인 칠본창과 문신인 오봉행으로 나뉩니다. 같은 히데요시파지만 양쪽 계파는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했습니다. 칠본창 중에는 임진왜란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와 한산도 대첩과 명량 해전에 모두 참전해 참패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유명합니다. 같은 무사지만 고니시 유키나카는 칠본창이 아니었고 가토 기요마사와는 철천지 원수로 유명했습니다. 오봉행 중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에 맞선 이시다 미츠나리가 유명합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가신들이 이렇게 사이가 좋지 않음을 알고 있었고, 오히려 이를 이용해 경쟁을 붙여 전공을 올리게끔 했습니다. 임진왜란의 선봉장으로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한 고니시와 가토를 세운 것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후, 이들의 갈등은 봉합되지 않고 벌어지게 됩니다.
2)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의 정세
히데요시 사후,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다이묘는 누가 뭐래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이때 당시의 도쿠가와의 석고는 200만 석이 넘는 규모로 모리 데루모토와 같은 다른 대다이묘와 비교해도 배가 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히데요시 사후의 일본 정세는 친도쿠가와와 반도쿠가와파로 나뉘게 됩니다. 반도쿠가와파의 거두는 주부 지방의 대다이묘인 마에다 토시이에였는데, 토시이에는 히데요시가 신분이 낮을 때부터 부부끼리도 교우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기에 석고 이상의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히데요시 사후에도 오봉행과 칠본창의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에다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 그의 지시를 어기고 다이묘간의 통혼을 하는 도쿠가와를 견제하고 암살을 기도하기도 하며 도요토미 가문의 패권을 지키고자 노력합니다. 하지만 히데요시 사후 얼마 되지 않아 토시이에마저 사망하면서 히데요시 가신단 사이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인물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갈등을 도쿠가와는 놓치지 않습니다.
중재자가 사라진 도요토미 가신단의 갈등은 극에 달해 칠본창 측에서 미츠나리를 죽이려는 시도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자 목숨의 위협을 느낀 미츠나리는 도쿠가와에게 의탁해 구명을 합니다. 이미 정적이었고 훗날 전장에서 맞붙는 둘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굉장히 이상한 일화인데, 이때 도쿠가와는 미츠나리의 정치 생명을 끝장내고자 미츠나리를 보호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미츠나리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의 거성으로 돌아가 은거했고, 미츠나리 대신 이에야스가 오사카에 머물며 일본의 정무를 주도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칠본창의 행보를 보면 이들이 정말 도요토미 가의 충신이 맞는지 의심됩니다. 이들이 조금이라도 대국적인 그림을 볼 수 있었다면, 도요토미의 천하를 지키기 위해 일치단결하여 도쿠가와를 견제하는 것이 맞다는 것은 이 시대 역사를 보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뼛속까지 무사였기에, 정말 순진하게도 요사스러운 문신인 미츠나리가 아니라 믿음직한 대다이묘인 도쿠가와야 말로 도요토미 가문을 제대로 보필해 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마에다 토시이에 사후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택한 것입니다. 영화 타짜의 명대사 “늑대새끼가 어떻게 개 밑으로 들어가냐”는 말처럼 신하의 그릇은 주군의 그릇을 따라가는 법입니다.
이시다가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도요토미 가신단은 풍비박산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반도쿠가와라는 기지는 여전히 의미가 있었기에 이시다는 자신에 편에 설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반도쿠가와에 가장 적극적인 다이묘는 도쿠가와와 바로 인접한 우에스기 카케카츠였습니다. 우에스기 카케카츠는 겐신 사후의 내분을 수습하고 히데요시에게 순응하며 이전과 비슷한 세력을 유지합니다. 도쿠가와와 단독으로 대적할 체급은 아니었지만, 도쿠가와와 바로 인접했기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으로 꼽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의 시발점이 된 것은 우에스기 카케카츠였습니다.
다음으로 반도쿠가와에 참여한 세력은 주코쿠의 다이묘 모리 데루모토였습니다. 주코쿠의 패자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인 모리 데루모토는 할아버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도쿠가와도 무시 못할 세력가였습니다. 게다가 형제 가문인 코바야카와 가문은 아예 히데요시의 조카가 양자로 가문을 이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주변의 조언을 받아 모리 데루모토를 도쿠가와에 대응하는 서군의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자 했고, 데루모토는 외교를 담당한 승려 안코쿠지 에케이의 조언을 받아 이 직을 수락합니다.
이시다 입장에서는 히데요시의 양자들은 소위 말해 믿을맨들이었습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와 우키타 히데이에가 바로 그들입니다. 둘 다 히데요시의 양자지만 이 둘의 입장은 조금 달랐습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조카였습니다. 자식이 없던 히데요시는 히데아키를 양자로 들였다가 코바야카와 가문에 양자로 보내면서 후계구도를 정리하고 주코쿠에 친위세력을 세웠습니다. 한편 우키타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와 혈연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우키타 히데이에의 아버지인 우키타 나오이에는 주코쿠의 패자인 모리 모토나리의 등쌀 속에서도 갖은 수를 동원하여 자립한 다이묘입니다. 하지만 전국시대 말기의 패권전쟁에서 중소 다이묘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었는데, 결국 최후를 앞두고 히데요시를 상대로 마지막 승부수를 겁니다. 자신이 사망하면 자신의 미망인을 거두고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이를 받아들였고, 우키타 히데이에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중용합니다. 임진왜란에서 수많은 노련한 장수들을 두고 젊은 우키타 히데이에가 총사령관으로 오른 이유가 바로 히데요시의 양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두 양자의 행보는 엇갈리게 됩니다.
한편 주부 지방에서 나름의 세력을 자랑하던 사나다 마사유키도 서군으로 제안을 받았는데, 양측에 모두 연이 있던 사나다 마사유키는 도쿠가와의 사위였던 장남은 동군으로 보내고 자신과 차남은 서군으로 참전합니다. 그밖에도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하여 이시다와 가까웠던 소규모 다이묘들도 서군에 참전했습니다.
한편 도쿠가와의 동군에는 마에다 토시이에의 뒤를 이은 마에다 토시나가가 참여합니다. 아버지는 도쿠가와의 가장 큰 정적이었지만, 아들은 정작 도쿠가와 편에 붙은 것입니다. 마에다 토시이에는 사망하면서 아들들에게 도요토미 가문을 지키라는 유훈을 남겼지만, 토시이에의 아내는 그가 죽은 후 아들들에게 “너희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너희 아버지만 못하니 기어라.”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하지만 정확히는 마에다 가문이 먼저 도요토미 가문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토시이에 사후, 마에다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과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입니다. 당연히 마에다 가문에서는 우군인 도요토미파 다이묘들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외면당합니다. 결국 마에다 가문은 토시이에의 아내이자 토시나가의 어머니인 마츠를 인질로 보내고 도쿠가와와 혼인동맹을 하는 것으로 전쟁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도요토미파는 가장 중요한 우군을 잃게 됩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비롯한 칠본창들도 대부분 동군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 시기에 도요토미가의 본진인 오사카에 있었기에 강제적으로 서군에 참여합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영지가 규슈에 있었기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대신, 옆 동네 고니시의 영지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전쟁에 참여합니다.
토호쿠에서는 다테 마사무네와 모가미 요시아키가 동군에 참여합니다. 모가미의 경우 히데츠구가 숙청되는 과정에서 딸이 죽었기에 원한이 있었고, 다테는 모가미의 외조카였습니다. 이 두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우에스기 카케카츠와의 별도의 전선에서 자신들의 전쟁을 이어갑니다.
3) 세키가하라 전역
본격적으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용어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1600년 10월 21일 세키가하라에서 벌어진 회전을 세키가하라 전투라고 부르지만, 이 회전이 있기 전까지 일본 전역에서 벌어진 전투들 역시 뭉뚱그려서 세키가하라 전투로 부르기도 합니다. 저는 전자만을 세키가하라 전투라 부르고, 후자의 의미로는 세키가하라 전역이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은거한 후, 이에야스는 오사카에 머물며 실권을 장악합니다. 이 시기 이에야스는 자신의 지위를 활용해 위협적인 다이묘들을 제압합니다. 가장 먼저 마에다 가문이 자신의 암살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정벌에 나섰고, 앞서 설명했듯 마에다 가문은 이에야스에 복종하는 것으로 이 사건은 종결됩니다.
마에다를 굴복시킨 이에야스는 다음으로 우에스기 카케카츠를 노립니다. 도쿠가와는 우에스기 가문이 성을 짓고 군비를 증강하는 이유를 해명하라며 교토로 상경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우에스기측은 카케카츠의 가신인 나오에 가네쓰구가 나오에장이라고 불리는 반박문을 발표하며 도발로 대응합니다. 이러한 도발에 분노한 이에야스는 우에스기를 토벌하기 위해 오사카를 떠나 본거지인 에도로 돌아갑니다. 이 도발장은 실존했던 것인지, 후대의 창작인지 논쟁의 여지가 있기는 합니다. 무엇이 사실이냐에 따라 우에스기가 이시다와 사전에 교감을 하고 도발을 한 것인지, 오히려 이시다의 거병을 유도하기 위해 도쿠가와가 만든 함정인지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시다는 도쿠가와가 에도로 돌아간 것을 알자 서군을 조직해 거병합니다. 본격적으로 세키가하라 전역이 개전된 것입니다. 이시다는 최대한 많은 다이묘를 세력에 가담시키기 위해 인질을 확보하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호소카와 가문의 인질이었던 호소카와 가라샤가 인질이 되기를 거부하고 사망하며 호소카와 가문이 이탈하며 이시다의 평판은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럼에도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기에, 이시다는 동군 측 성을 함락시키며 거점인 오사카성에 입성합니다.
한편 도쿠가와는 우에스기 카케카츠는 다테와 모가미에게 맡긴 채, 에도에 머물면서 정세를 살핍니다. 그동안 동군의 주력을 맡은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비롯한 무장들은 서군에 속한 오다 히데노부가 다스리던 기후성을 함락시킵니다. 인근의 기후성은 일본의 양대 가도인 나카센도와 도카이도를 장악할 수 있는 거점이었습니다. 도쿠가와가 본거지인 에도에서 서군의 심장인 오사카로 진격하려면 양대 가도를 반드시 거쳐야 했기에 기후성 공략은 이 전역의 향방을 가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기후성을 손에 넣은 도쿠가와는 마침내 에도에서 출진합니다.
이에야스는 스스로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도카이도를 따라 진군했고, 후계자인 히데타다에게는 3만 8천의 병력을 맡겨 나카센도를 따라 진군하게 합니다. 그런데 히데타다는 진군 도중에 서군에 속한 사나다 마사유키의 성을 공략하느라 시간을 많이 지체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합니다. 이에야스는 전투가 끝난 후에나 도착한 히데타다를 매우 질책했다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가주와 후계자가 동시에 전사한 오다 노부나가의 전례를 보고 일부러 히데타다를 대규모 병력과 함께 후방에 배치했다고도 합니다.
비교적 순탄하게 전투를 이어온 동군과는 달리 서군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서군 총대장이었던 모리 데루모토는 오사카 성에 주둔한 채 출진하지 않았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작전회의에 참여하지 않아 배신이 의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후방에 있는 동군 세력인 타나베성을 공략하는데 병력 15,000명이 묶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쿠가와가 기후성을 장악하고 서군의 코앞까지 도달하자 이시다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기전이 될 것처럼 보였던 전쟁은 단판승부로 바뀝니다.
4) 세키가하라 전투
이시다가 선택한 전장은 교토와 오사카로 넘어가는 길목인 세키가하라였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적을 막지 못한다면, 간사이 지방 전체가 적의 위협에 노출되어 병력을 나누어 적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부 결속이 좋지 않은 서군 입장에서 병력을 나누어 적을 막는 것은 더 위험했기에 이시다가 세키가하라를 전장으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양군은 위와 같이 포진합니다. 양측의 병력 숫자는 여러 설이 있지만 각각 적어도 8만 명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11시 방향의 석전삼성(石田三成)이 이시다 미츠나리, 가운데의 덕천가강(德川家康)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이시다는 전선에 위치했던 반면 도쿠가와는 전선에서 약간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9시 방향, 서군의 우현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隆景)가 맡았습니다. 5시 방향에 있는 서군은 모리 히데모토와 킷카와 히로이에입니다.
포진만 놓고 보면 서군(파란색)이 고지대에서 동군(빨간색)을 포위한 형국이라 유리했습니다. 서군의 본대는 적을 학익진으로 포위하고 있었고, 서군 별동대는 적의 퇴로를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일본에 교관으로 온 프로이센 장교에게 누군가 이 포진을 보여주자, 서군의 승리라고 주저 없이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 전투가 동군의 승리로 끝났다는 사실을 알고는 작전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전투의 향방을 가른 것은 작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2시간 동안 대치하던 양군은 안개가 걷히자 격돌합니다. 가장 먼저 앞장선 것은 도쿠가와의 돌격대장 이이 나오마사였습니다. 본래 선봉을 맡았던 후쿠시마 마사노리 역시 부대를 움직였고, 서군은 우키타와 이시다가 이에 응전했습니다.
아침부터 시작된 교전은 정오까지 이어졌고, 이때까지만 해도 서군은 동군을 상대로 밀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익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후미를 맡은 모리 군도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전투에 참여해 준다면 전세를 확실히 유리하게 가져올 수 있었기에 이시다는 봉화를 올려 이들의 참전을 독려합니다.
한편 도쿠가와 역시도 더는 기다리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병력이 다 모이지 않았음에도 적진으로 출진한 이유는 믿을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전황이 교착되도록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는 코바야카와 진영으로 철포를 날립니다. 이에 놀란 코바야카와는 사전에 약속한 대로 서군을 배신하고 공격합니다. 그리고 코바야카와의 배신을 필두로 모래알 같았던 서군의 다이묘들은 이탈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진영이 붕괴된 서군은 분전이 무색하게도 무너지며 전투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동쪽에 있던 서군 별동대는 동군과 내통한 킷카와 히로이에가 아군의 진출로를 막은 채 주저앉으며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이쪽의 총사령관인 모리 히데모토는 자신이 모리 가문의 가주도 아닌지라 킷카와 군을 어찌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기에 병사들에게 도시락을 먹인다는 핑계로 같이 주저앉습니다. 두 다이묘가 이런 판국이었으니 모리 가문의 주전론을 이끈 안코쿠지 에케이도 전장에 나설 수는 없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전투를 관망하다가 오사카로 회군합니다. 이렇게 일본의 운명을 건 대결은 배신으로 종결됩니다.
5) 전후처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은 몰살당합니다. 대부분은 큰 피해를 입고 몰살되었고, 그나마 전력을 유지한 모리 가문은 오사카로 퇴각했다가 도쿠가와에게 항복합니다. 우에스기 카케카츠를 비롯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서군 다이묘들 역시 전투의 결과를 듣고 항복합니다.
서군의 핵심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와 안코쿠지 에케이, 고니시 유키나가는 패전 후 달아났으나 모두 붙잡힙니다. 이들은 조리돌림을 당하고 처형당합니다. 똑같이 서군의 핵심이었던 우키타 히데이에는 처가인 마에다 가문이 구명을 해준 덕분에 목숨은 부지하고 태평양 방면의 외딴섬으로 유배당합니다. 이들의 영지는 모두 몰수되어 동군 다이묘들에게 분배됩니다. 우에스기 카케카츠는 멸문당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영지를 대부분 잃고 본래 가신의 땅이었던 최북부 일부만 유지합니다.
(출처: 위키피디아. 세키가하라의 승패를 가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사진. 본래 코바야카와 가문의 문장은 가운데와 같은 모양이지만, 히데아키 본인은 오른쪽의 낫 모양 가몬을 개인적으로 사용할 때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위의 세키가하라 풍경도에서는 가운데 가몬만 확인된다. 하지만 보드게임 <세키가하라>를 비롯한 서양 콘텐츠에서는 코바야카와를 오른쪽 문양으로 표시한다.)
반면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이전보다 더 높은 석고로 영지를 옮깁니다. 하지만 똑같이 배신으로 공을 세운 킷카와 히로이에는 자신이 약속받은 대로 모리 가문을 지키지 못합니다. 도쿠가와는 주코쿠의 대다이묘이자 서군의 총대장이었던 모리 데루모토를 그대로 둘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는 모리 가문의 영지를 모조리 몰수하고 그중 일부를 킷카와 히로이에에게 내리고자 했습니다. 히로이에는 이와 같은 조치에 놀라 자신의 몫으로 올 영지를 모리 가문에 남겨줄 것을 탄원합니다. 결국 모리 가문은 이렇게 일부 영지나마 지키는 데 성공했으나 킷카와 히로이에는 배반자로 낙인찍히고 모리 가문 내에서의 입지도 좁아집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의 석고는 기존의 250만 석에서 400만 석으로 증가됩니다. 반면 도요토미 가문의 직할령은 222만 석에서 65만 석으로 크게 삭감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다른 다이묘들이 연합하더라도 도쿠가와에게 대항하기가 어려운 수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3년이 지난 후, 도쿠가와는 스스로 막부를 개창하고 자신의 본거지인 에도를 수도로 삼습니다. 일본의 마지막 막부인 에도 막부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막부를 개창한 후에도 관백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한 칠본창과 같은 세력은 물론, 그동안 쌓아둔 도요토미 가문의 재력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분상으로도 관백이 정이대장군보다 상위직이기에 에도 막부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려면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반드시 제거해야 했습니다. 도쿠가와는 아직까지 남아있던 도요토미파 다이묘들을 숙청한 후, 마침내 오사카를 정벌합니다.
3. 에도 막부
에도 막부는 이전의 무신 정권보다 오랜 기간인 264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가마쿠라 막부가 141년, 무로마치 막부가 252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무로마치 막부는 전후로 남북조시대와 전국시대가 걸쳐있어 실질적으로 일본 전역을 통치한 기간은 70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완전한 중앙집권을 이루지는 않았지만,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 덕분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일본의 문화와 풍습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선 도쿠가와는 다이묘들을 통제하기 위해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사농공상으로 구분되는 엄격한 신분제를 처음으로 도입합니다. 전국시대만 해도 상인이나 농민 출신으로 출세한 무사들이 있었지만, 에도 막부 시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일본의 경직된 사회변동성은 에도 막부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도쿠가와가 다이묘들의 재정을 소모시키고 견제하고자 만든 제도로는 참근교대도 있습니다. 참근교대는 1년을 주기로 다이묘들이 에도로 상경하여 생활하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다이묘들이 홀로 상경하는 것이 아니라 가신단과 병력을 이끌고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다이묘들의 재정에 큰 부담이 되는 제도였습니다. 게다가 얼마나 화려한 규모로 상경하느냐가 각 다이묘들의 위세를 보여줄 수 있는 일이었기에 나중에는 지나치게 과열되어 막부 차원에서 자제를 명할 정도였습니다. 참근교대로 인해 주기적으로 대규모 인구이동이 발생했기에 에도 시대를 거치며 일본의 교통과 상업이 발전하게 됩니다.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이 된 초밥도 에도 시대에 상업이 발전하며 탄생한 일종의 패스트푸드였습니다.
에도 시대를 거치며 일본의 중심지는 완전히 간토로 넘어갑니다. 간토를 중심지로 삼았으나 한계에 봉착한 가마쿠라 막부나 아예 교토로 중심지를 옮긴 무로마치 막부와는 달랐던 것입니다. 도쿠가와는 에도로 전봉 되면서부터 이 지역을 계획적으로 발전시켰고, 자신의 압도적인 세력을 바탕으로 다이묘들을 효율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시대 최고의 명장이라 천하를 얻고 자신의 막부를 개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쿠가와는 전국시대 최고의 행정가이자 정치가였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다가 지은 밥으로 도요토미가 떡을 지었더니 도쿠가와가 먹었다는 이야기는 도쿠가와 입장에서는 약간 억울한 평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천하를 무력으로 통일하는 것 이상으로 천하를 통치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4. 에필로그
이번 <세키가하라> 기획기사 시리즈는 <세키가하라>가 출시될 즈음에 마지막 편을 올리는 것으로 기획을 했습니다. 처음 생각보다 글이 많이 길어졌지만, 결국 예정된 대로 <세키가하라> 출시를 앞두고 마지막 편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 기획기사는 <세키가하라>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을 미리 알아보실 수 있도록 정보를 전달하고자 연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에 비교적 덜 친숙한 개념들을 설명하기 위해 꽤나 많은 TMI가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부디 재미있게 즐겨주셨길 바랍니다.
보드게임 <세키가하라>에는 게임 작가가 자신의 관점으로 작성한 역사 이야기도 실려있습니다. 한국어판에는 추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에 주석을 달아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해드리고자 했습니다. 작업 과정에서 주석을 더 달 수 없어 아쉬웠던 지점들이 모여 이번 기획기사를 쓰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세키기하라> 기획기사는 이번 편을 끝으로 연재를 마감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워게임 입문을 망설이시는 분들을 위한 간단한 게임 공략을 마지막 기사로 보내드릴 생각입니다. 다음 게시글은 <세키가하라> 기획기사가 아니라 <세키가하라> 공략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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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이후로 일본의 역사가 많이 바꼈다고 생각합니다. 양질의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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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전국시대의 긁직한 시간들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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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기사도 잘 봤습니다.
역시나 완벽한 글에 오타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끄는 서군의 우현은 '코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아니라,
그의 양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같습니다.
알차고 재밌는 5편 기사 작성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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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히데아키 이야기를 아래에서 해놓고 위에서 이런 실수를 했네요. 바로 정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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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밌어요. 연재된 5편 모두 정말 정신 없이 읽었습니다.
한국에선 일본 역사를 접하는게 의외로 흔치 않은것 같아요.
잘 모르고 지내다가 세키가하라 발매 기념으로 한번 정독했는데
그동안 궁금했던게 싹 내려가는 느낌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다른기회에 에도막부 이후 이야기도 한번 봤으면 좋겠습니다 ㅋㅋ
수고하셨습니다! -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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