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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찰리의 보드게임 역사기행 - 만리장성 - 제6편 소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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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6 18: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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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 [GM]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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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만리장성>의 일반 판매가 개시되었습니다. 몇몇 소량 상품은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에 금방 매진되기도 했네요. <만리장성>에 보여주신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만리장성>을 5편이나 연재해서 이제 슬슬 다른 게임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마침 이번 주에 일반 판매를 시작하기도 했고 다루지 않으면 아쉬울 인물이 하나 남아서 가볍게 그 인물만 다뤄보고 마무리할까 합니다.
소동파는 송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동파는 호고 이름은 식입니다. 퇴계 이황을 이퇴계로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죠. 그래서 본명은 소식인데, 일러스트와는 동떨어진 이름이군요(아니면 소처럼 먹어서 소식인가...?) 제가 아는 동생들과 닮아서 어딘지 친숙하네요. 플레이버 텍스트에서 보듯 북송 대의 인물입니다.
소동파하면 가장 유명한 것은 그의 시보다도 동파육이지요. 사실 대중적인 요리는 아니었는데, 목란의 이연복 셰프가 스타 셰프가 되면서 그의 시그니쳐 요리인 동파육도 많이 대중화된 느낌입니다. 옛날에는 중화 요릿집에서 시키던 메뉴가 팔보채나 오향장육, 조금 더 내려가면 깐풍기나 칠리새우, 난자완스 정도였는데, 이제는 중화요릿집에 갔다면 멘보샤나 동파육을 먹는 경우가 많다고 느낍니다. 중화라고 한 이유는 중국요리라고 하면, 요즘은 저런 메뉴보다 양꼬치와 마라탕으로 대표되는 결이 조금 다른 식당들이 떠오르는 느낌이라서 그렇습니다. 1세대 화교들로부터 시작된 중화요리와 이후 연변 등지에서 들어온 조선족 및 중국인들로부터 시작된 중국요리는 다르다고 느껴지지요. 한동안 지삼선에 빠져 중국요리를 많이 먹었는데, 요즘은 중화요리가 가끔 생각납니다. 동네 중국집에서 흔히 시키는 짜장면이나 탕수육 말고 꽃빵에 고추잡채로 대표되는 바로 그 정통 중화요리들 말이지요. 이번 주말이 아버지 생신인데 오랜만에 중화요리 어떠시냐고 여쭤봐야겠네요.
(출처: https://namu.wiki/w/%EB%8F%99%ED%8C%8C%EC%9C%A1)
이제는 많이 유명하겠지만, 중국 요리에서 육(肉)은 돼지고기를 의미합니다. 중국인들에게 고기=돼지라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소고기면을 육면이라고 하지 않고 우육면(牛肉麵)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반면 한국 요리에서 육은 보통 소고기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육전이나 육개장은 소고기로 만든 전이나 개장국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중국에서 식당 메뉴를 볼 때, 잘 모르겠다면 저 육자를 찾으면 쉽습니다. 일단 돼지고기를 중국식으로 어떻게 했다면 맛없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음식 얘기를 했더니 너무 옆으로 샜습니다. 그런데 소동파로 초점을 다시 돌려도 음식 얘기를 해야 합니다. 소동파와 동파육에 얽힌 일화를 소개해야 하니까요.
소동파와 동파육에 얽힌 설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중 가장 미담에 가까워 널리 알려진 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동파가 항저우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홍수가 났습니다. 소동파는 이로 인해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구제하고 호수에 제방을 쌓아 침수를 막았지요. 그 덕분에 물난리를 극복해 감복한 백성들이 소동파에게 술과 돼지고기를 올리자 이를 활용해 동파육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줬다는 것입니다.
시도 잘 쓰고 백성을 잘 보살핀 관리였으니 고려와 조선의 선비들은 소동파를 높이 칭송했고 선비의 모범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소동파는 고려를 매우 싫어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요즘 표현으로 말할 것 같으면, 혐한이죠.
소동파가 혐한이 된 이유를 알려면 당시 동아시아의 세력 구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지도부터 보시죠.
(출처: http://chinesewiki.uos.ac.kr/wiki/index.php/%EC%86%A1)
위 지도에서 보다시피 북송대의 동아시아는 여러 나라가 송나라를 압박하는 구도입니다. 나라가 분열되어도 능히 이민족을 막을 국력이 있던 후한 말 삼국지 시대와는 달리, 이민족 국가들은 이제 능히 중국을 압박할 수 있는 국력을 갖추었지요. 이중 가장 큰 위협은 요나라입니다. 요나라는 중원의 당나라가 멸망하고 5대 10국을 거쳐 북송이 건국되는 사이에 발해를 멸망시키고 여진족을 복속시키며 국력을 키웠습니다. 연운 16주를 석경당에게 할양받은 것도 컸지요. 송나라는 당나라 시절에 비해 강해진 요나라를 당나라보다 더 안 좋은 조건에서 상대해야 했던 것입니다. 송나라에게 위협이 되는 국가는 요나라만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라에 비해 작은 나라라고 할지라도 서하 역시 만만치 않은 국력으로 송나라를 압박하던 국가였습니다. 다행인 점은 남쪽의 대리국(현재의 중국 윈난성)은 전신인 남조가 당나라와 전쟁을 자주 했던 것과는 달리 서로 닭이 소를 보듯 교류가 없이 지냈다는 점입니다. 또한 당나라와 치열하게 싸웠던 토번 제국(현재의 티베트)이 내분으로 해체되어 위협이 되지 않기도 했지요.
건국 후 남쪽의 독립국을 점령해 5대 10국을 종결한 송나라는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북벌은 실패하고 맙니다. 그리고 국력이 소진된 북송을 상대로 오히려 요나라가 정벌 계획을 세웁니다. 그 사전 작업으로 후방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고려에 군사를 보내니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는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유명한 1차 여요전쟁입니다. 서희는 요나라의 목적을 알아채고 당시 조정의 일반적인 의견인 땅을 떼어주고 화친을 맺자는 의견을 물리고 도리어 요나라로부터 강동 6주를 받아냈습니다. 본래 발해의 영토였으나 발해가 멸망한 후 여진족이 자리 잡은 강동 6주를 고려가 먹을 테니, 사후에 요나라 황제가 승인하라는 방식이었지요. 강동 6주는 당시 요나라의 영향 하에 있던 곳이 아니었으니, 요나라가 준다고 줄 수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후방을 안정시킨 요나라는 남정을 벌인 끝에 송나라와 전연의 맹을 맺어 형제 관계가 됩니다. 또한 송나라로부터 꼬박꼬박 세입을 받게 됩니다. 이제 요나라는 변방 오랑캐가 아니라 송나라와 함께 동아시아의 확고한 G2가 된 것입니다.
G2 자리에 오른 요나라는 미뤄두었던 고려 정벌을 시작합니다. 본디 1차 여요전쟁에서 요나라가 물러간 조건은 송나라와의 교류를 끊고 요나라에 입조하는 것이었는데, 고려가 그것을 어기고 송나라와 계속 교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고려에 의해 강동 6주에서 쫓겨난 여진족이 요나라로 가서 고려 정벌을 요청했으니 요나라 입장에서는 이제 고려를 정벌할 적기였던 것이죠.
그렇게 2차 여요전쟁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서희 이후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기억하는데, 강감찬이 활약한 것은 3차 여요전쟁으로 2차 여요전쟁은 고려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라가 멸망할 수 있었던 병자호란급 전쟁이었습니다. 2차 여요전쟁은 요나라 성종이 친정에 나선 대규모 원정이었고 고려는 정변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국왕이던 현종은 수도 개경을 버리고 나주까지 몽진을 했고 수도 개경이 함락됨은 물론 서북 지방 일대는 초토화됩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끄는 사이에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거란군의 후방을 공격해 전공을 세웁니다. 이에 부담을 느낀 거란군은 고려 왕의 친조(왕이 직접 요나라로 와서 황제를 알현하라)를 조건으로 내세우고 퇴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고려군의 공격을 받아 추가로 큰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2차 여요전쟁은 고려에게도 큰 위기였지만, 거란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여전히 강동 6주는 고려의 땅이었고 고려는 여러 핑계를 대며 끝내 요나라에 친조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라가 그래서 3차 여요전쟁이 발발하지요. 하지만, 2차 여요전쟁때와는 달리 현종은 국정을 안정화시켰고 전쟁에 충분히 대비를 해둔 상황이었습니다.
고대 동아시아의 군대 동원 규모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에 그 숫자를 100% 믿기가 어려우나 기록에 따르면 요나라가 2차 여요전쟁에 동원한 규모가 40만, 3차 여요전쟁에 동원한 규모가 10만입니다. 정확한 숫자는 믿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요나라의 동원력이 2차 때보다 줄어들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전보다 더 나쁜 조건에서 시작된 전쟁이니만큼, 거란군은 속전속결로 개경을 점령하는 전략을 세웁니다. 이전 2차 여요전쟁때도 개경을 함락해본 경험이 있는 만큼, 이유가 있는 전략이었지요.
하지만 고려군은 이런 거란군의 전략을 읽고 꾸준히 견제합니다. 마치 진출하는 테란군을 뮤짤로 끊어내듯이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군은 개경 근처에 도달합니다. 고려 주력군은 전선에 있었기에 수도 방비는 허술한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현종은 청야 전술을 사용해 일대를 초토화시키고 모든 백성을 개경에 모아 항전의지를 불태웁니다. 지도자가 수도에서 결사항전의지를 다지는 것이 전황을 어떻게 바꾸는지는 이미 우리 시대에도 증명이 되고 있지요. 아무리 대군이라고 해도 현지 보급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공성을 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고려 주력군이 언제라도 도착해 후방을 습격할 수 있었던 상황이기도 했고요. 결국 거란군은 퇴각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퇴각을 하던 거란군을 회전에서 포위 섬멸한 전투가 바로 귀주대첩입니다. 살수대첩과 이미지가 섞여 수공으로 거란군을 물리쳤다고 알고 계신 분들도 있는데, 귀주대첩은 양측이 배수진을 치고 회전을 벌인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거란군은 기록적인 대패를 하여 지휘관급 장수들도 다수 전사한 끝에 수천의 병사만 간신히 살아 돌아갑니다. 이후 고려는 천리장성을 세우고 군대를 기르며 국방에 더욱 힘을 썼고 요나라는 두 번 다시 대대적으로 침공하지 못합니다.
당대의 G2이자 북송에게 판정승을 거둔 요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했기에 고려의 위상은 크게 높아집니다. 이제 고려는 동아시아의 소국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수호자가 된 것이지요. 고려가 요나라나 송나라를 정벌할 만큼의 국력을 가진 것은 아니나 두 나라 모두 고려를 정벌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고려가 둘 중 한 세력에 완전히 붙는다면 현재의 교착상태가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었죠. 그래서 고려는 갑은 아니지만 슈퍼 을의 지위를 가질 수 있던 것입니다.
당시 고려의 위상을 보여주는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조공 무역을 간 고려 사신이 하사품을 10배로 뜯어가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하사품은 대도시에서 팔아 금이나 은으로 바꿔 가져 가고, 황제에게 입시하기에 앞서 고려 사신이 다른 나라 사신들을 먼저 만나 접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송나라 사신이 요나라에 갔는데 고려 사신이 있어 "고려 사신이 어찌 적국인 요나라에 입조했는가?(너흰 우리에게 칭신했으니 요나라와 교류해선 안된다는 뜻)"라고 묻지 고려 사신이 "어쩌라고."를 시전 했던 일화도 있습니다. 소동파는 바로 이런 시대의 인물이었기에 고려 사신의 거만한 태도를 보며 분개한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고려는 같은 행동을 요나라에도 했기는 합니다. 요나라와도 조공 무역을 하며 더 많은 것을 뜯어오고 당시에는 군사 기밀인 지도를 받아다 송나라와 공유하기도 했을 정도이니 소동파의 이런 태도는 거국적인 시각이 모자라 보이기도 합니다.
소동파의 고려에 대한 입장은 오해론으로 유명한 상소문을 보면 명확합니다. 기사라 긁어올 수 없어 링크로 대체합니다.
저는 소동파의 상소를 읽다 보니 어딘가 트럼프의 논리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 백성들은 굶주렸는데(미국 국민들은 실업자 신세인데), 조공 무역으로 퍼주느라 이들을 보살피지 못한다(세계의 리더 노릇을 한다고 다른 나라를 대신 지켜주고 공장도 다 해외에 짓는다). 그러니 고려와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이제 보호무역으로 돌아서고 국방비도 받겠다). 두 사람 모두 자국 중심주의적인 논리를 펼치니 비슷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천 년 전의 역사에서 오늘날의 기시감을 느끼는 것이 역사를 배울 때의 또 다른 재미이기도 하지요.
이번 소동파편을 끝으로 찰리의 보드게임 역사기행 <만리장성>편을 마칩니다. 이번 편에서는 동파육부터 시작해 고려사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여요전쟁까지 다루게 되었네요. 이번 기획기사가 여러분이 <만리장성>을 즐기시는 또 하나의 재미가 되었길 바랍니다. 조만간 다음 기획기사로 여러분을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댓글이 찰리를 일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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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의 적벽부보다 동파육이 더 유명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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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파육이 많이 대중화되면서 소동파와 동파육에 얽힌 사례가 매체에서 많이 다뤄져서 인지도가 많이 올라가지 않았나 싶어 그렇게 표현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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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깟 먹을것이!!! 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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