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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의 보드게임 테마기행]로빈 후드의 모험 3편 - 정복왕 윌리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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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2 14: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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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 [GM]찰리
지난 이야기
로빈 후드의 모험 1편 - 의적
로빈 후드의 모험 2편 - 잉글랜드의 시작
파주 슈필과 보드게임 페스타로 인해 연재가 많이 늦었습니다. 정복왕 윌리엄부터 <로빈 후드의 모험> 이야기를 풀어야겠다고 생각을 한지는 보름이 넘었는데, 이제야 윌리엄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겠네요.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던 만큼, 빠르게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1) 노르만족
노르만족은 프랑스에 정착한 바이킹들입니다. 이들이 정착한 지역이 바로 2차 세계대전의 상륙작전으로 유명한 노르망디이지요. 노르만족은 9세기경에 프랑스를 침략해 파리까지 점령할 정도로 서프랑크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에 당시 서프랑크의 왕이었던 '단순왕' 샤를 3세는 차라리 이들에게 영지를 주어 봉신으로 삼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해, 노르만족 무리의 우두머리 중 하나였던 롤로를 노르망디 지역의 백작으로 봉하니 이것이 훗날 노르망디 공국이 되는 루앙 백국입니다. 백국의 시조인 롤로는 정복왕 윌리엄 1세의 고조할아버지입니다. 길게 보면 오늘날 엘리자베스 2세의 선조*가 되는 것이죠.
롤로 이후로 노르망디 백작위는 후손들에게 이어지다가 윌리엄 1세의 큰아버지인 리샤르 2세 때에 공로를 인정받아 공작으로 승격됩니다.
*(영국 왕가의 계보도를 정리한 자료들을 보면 보통 웨식스의 앨프레드 대왕을 현대 영국 왕가의 시조로 봅니다. 7왕국을 사실상 통일했던 앨프레드 대왕이 첫 잉글랜드의 왕이며, 잉글랜드는 웨식스를 이었다는 것이지요. 앨프레드 대왕과 윌리엄 1세의 피가 섞이는 것은 플렌테저넷 왕가의 창시자이자 사자심왕과 존왕의 아버지이며 윌리엄 1세의 증손자인 헨리 2세부터입니다. 헨리 2세가 모계로 앨프레드 대왕의 직계였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1세의 정복 이전의 잉글랜드 역사를 포용하기 위해서라도 7왕국 시대의 영웅인 앨프레드 대왕을 선조로 삼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이기는 합니다.)
노르망디 공국의 지도입니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B%A5%B4%EB%A7%9D%EB%94%94_%EA%B3%B5%EA%B5%AD#/media/%ED%8C%8C%EC%9D%BC:Cartenormandie2.PNG)
(출처: https://namu.wiki/w/%EC%B9%B4%EB%A1%A4%EB%A3%A8%EC%8A%A4%20%EC%99%95%EC%A1%B0)
유럽 전체 지도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윌리엄 1세 사후의 지도지만, 당시의 세력도를 보기에는 충분히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파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노르망디 공국이고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잉글랜드 왕국입니다. 빨간 점선으로 표시된 부분은 윌리엄 1세 이전에 잉글랜드를 정복한 덴마크의 크투트 대왕이 세운 북해 제국의 강역인데, 대왕 사후 분열되고 맙니다. 크누트 대왕의 얘기를 자세히 할 것은 아니나 덴마크계 바이킹들이 잉글랜드 왕위를 가졌던 적이 있다는 것만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2) 기욤 2세
이 단락에서 할 이야기는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기 전, 아직 기욤 2세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현대 프랑스식으로 발음하자면 기욤이지만, 당시 노르만인들의 발음으로는 달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증조부가 기욤 1세였기에 노르망디 공작으로서의 기욤은 기욤 2세가 되었지만, 잉글랜드 왕으로서는 첫 번째 윌리엄이기에 윌리엄 1세가 되는 것입니다. 유럽 중세사를 보면, 한 명의 군주가 여러 나라의 작위를 가지면서 나라마다 다르게 불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입니다. 그 나라말로 이름을 바꿔 부르고, 해당 작위에서 해당 이름을 쓴 선조가 있다면 그걸 세서 x세로 치는 것이죠. 앞의 경우는 한국에서도 예전에는 일본이나 중국 사람을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 부르던 경우가 있었으니 어색하지 않지만, 후자는 동양에서는 없던 문화니 생소하기는 합니다. 동양에서 군주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거나 쓰지 않는 피휘 문화가 있었기에 조상의 이름을 따서 자녀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죠.
기욤 2세는 아버지 로베르 1세의 사생아였습니다. 게다가 어머니의 출신조차 미천했지요. 하지만 그가 로베르 1세의 유일한 아들이었습니다. 로베르 1세는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다녀오는 길에 병사했지만, 어린 아들이 작위를 이을 수 있도록 미리 후계자로 선정하고 신하들에게 충성서약을 해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7세에 공작이 된 사생아의 입지는 불안했습니다. 당장 기욤 2세의 아버지 로베르 1세도 형제 상속으로 공작이 된 마당에 시퍼렇게 살아있는 숙부들은 큰 위협이었지요. 하지만 여러 견제에도 불구하고 기욤 2세는 당시 프랑스 왕인 앙리 1세에 더불어 충신들과 외숙부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하고 15세에 기사로 인정받으며 안정적인 통치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기욤 2세는 사생아라는 자신의 불안한 입지를 극복하기 위해 유력한 가문과 결혼하길 원했고 옆 동네인 플란데런(지금의 벨기에 북부)의 공녀 마틸다에게 청혼합니다(지도로 보면 바로 붙었지만, 두 지역의 대표 도시인 캉과 브뤼셀 간의 거리는 480km에 달합니다). 공작이 입지가 불안해 백작의 딸과 결혼하려 한다는 것이 이상할 수 있겠지만, 중세 유럽은 양판소처럼 공/후/백/자/남 간의 칼 같은 서열이 있던 것은 아닙니다. 공작이라고 무조건 백작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작위 그 자체의 높낮이보다 중요한 것은 가문의 위신과 권력인데, 그점에서 사생아 출신인 어린 공작보다는 당시 프랑스 왕실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던 플란데런 백작이 더 유력한 귀족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틸다는 사생아 아들 따위와 결혼할 수 없다며 청혼 사절을 돌려보냅니다. 이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기욤 2세는 그 길로 말을 달려 플란데런으로 가서 마틸다를 폭행(!)합니다. 폭행 장소가 교회인지 마틸다의 방인지는 이설이 있으나, 어느 쪽이던 기욤 2세가 귀족가의 영애의 머리채를 잡아 패대기친 다음 두들겨 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모습을 본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5세는 당연히 분노하여 검을 빼들려고 했으나 그때 마틸다가 아버지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이 남자가 아니라면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어요!"
'날 이렇게 대한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는 클리세의 원조 같은 일화입니다. 두 사람은 보두앵 5세와 교황 레오 9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했고 금슬도 좋아 아들 4명과 딸 5명 이상을 낳았다고 전해집니다(영아 사망률이 높아 기록되지 않은 아기들도 있던 시절이니 이렇게 전해집니다).
마틸다의 마음이 극적으로 돌아선 이유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중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은 '사생아라는 말에 발끈해서 목숨을 걸고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할 사람이라면, 외도하여 사생아 문제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윌리엄 1세가 외도했다는 정황이나 기록은 없으며 부부의 사이는 좋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많으니, 마틸다의 판단은 정확했던 모양입니다. 많은 자녀를 낳았다는 기록 외에도 부부의 사이가 좋았다는 증거로 꼽히는 것이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원정을 떠날 때, 마틸다가 사비를 털어 마련한 기함 '모라' 호입니다.
3) 윌리엄 1세
이제야 다시 무대가 잉글랜드로 돌아옵니다. 초기의 불안했던 정세를 극복하고 훌륭한 가문 출신의 공비까지 얻은 기욤 2세는 이제 프랑스 왕이 견제해야 할 정도로 유력한 귀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욤 2세가 노리고 있던 것은 프랑스 왕위가 아니라 잉글랜드 왕위였습니다.
당시 잉글랜드 왕위는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의 왕은 해럴드 2세로 전왕인 참회왕 에드워드의 처남입니다. 해럴드 2세는 후사 없이 사망한 애드워드가 자신을 차기 왕으로 지목했다고 주장하며 왕위에 오릅니다. 해럴드 2세는 웨식스 백작을 비롯해 여러 앵글로색슨 작위를 가진 정통 앵글로색슨이기 때문에 여러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습을 바다 건너에서 분노하면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기욤 2세였습니다. 참회왕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왕위를 넘기겠다 약속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아주 뜬금없지는 않은 것이, 참회왕 에드워드의 어머니가 기욤 2세의 고모할머니라 혈연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해럴드 2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 난파 사고로 인해 기욤 2세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나 봉신이 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해럴드 2세의 즉위는 기욤 2세에게는 하극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에드워드의 약속이 사실이었다는 전제로 그렇다는 말이고 그저 잉글랜드 정복을 위한 기욤 2세의 핑계였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다 건너에 한 명 더, 노르웨이의 하랄 3세도 잉글랜드 정복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하랄 3세가 크누트 대왕의 직계 후손은 아니지만, 크누트 대왕과 그의 아들들이 노르웨이 왕과 잉글랜드 왕을 겸했으니 주장해볼 명분은 있습니다. 그리고 참회왕 에드워드는 자신의 이부형제이자 크누트 대왕의 아들인 하레크누드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았으니 다시 덴마크인들의 왕위를 가져오겠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또한 잉글랜드 내부 권력 투쟁에서 소외된 해럴드 2세의 동생 토스티그가 당대 최고의 전사로 이름난 하랄 3세를 끌어 들었으니, 내부의 지원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잉글랜드 왕위는 삼파전에 들어갑니다. 잉글랜드의 해럴드 2세, 노르망디의 기욤 2세, 노르웨이의 하랄 3세의 각축전인 것이죠. 동시에 둘을 상대해야 하는 해럴드 3세가 불리해 보이지만, 그건 어차피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승자독식, 라스트 맨 스탠딩인 것이죠.
상황은 다음과 같이 전개됩니다. 기욤 2세가 폭풍우로 인해 출항하지 못하는 사이, 해럴드 2세는 먼저 상륙한 하랄 3세와 전투합니다. 하랄 3세가 상륙한 지역은 요크 지방으로 런던으로부터 북쪽으로 300km가 넘는 거리에 있습니다. 해럴드 2세는 병력을 모아 빠르게 행군해 하랄 3세의 군세를 공격했고 그 결과 하랄 3세와 반란자 토스티그가 전사합니다. 이렇게 삼파전의 주역 중 하나가 탈락하게 됩니다. 이 전투는 다리를 중심으로 벌어졌기에 다리 이름을 따서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라고 하는데, 양군의 세력은 하랄 3세가 최대 수송선 300척 규모의 전사 9,000명, 해럴드 2세가 최대 15,000명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3일 뒤 기욤 2세의 노르만 군이 잉글랜드 남부에 상륙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해럴드 2세는 부랴부랴 병력을 모아 남쪽으로 행군합니다. 그리고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가 벌어진 지 보름이 조금 지난 후에 그 유명한 헤이스팅스 전투를 펼치게 됩니다. 양군의 규모는 기욤 2세가 최대 12,000명, 해럴드 2세가 최대 13,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 전쟁에서 해럴드 2세가 전사하고 기욤 2세가 승리하며 잉글랜드 왕위를 두고 벌어진 삼파전에서 최후의 승자는 기욤 2세가 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앵글로색슨족이 한 번에 정복당한 것은 아닙니다. 앵글로색슨족은 대립왕을 세우며 저항했고 기욤 2세는 런던으로 진격해 이들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릅니다. 드디어 정복왕 윌리엄 1세가 된 것입니다.
당시 해럴드 2세가 왕복한 거리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을 갔다가 다시 서산까지 가는 일정이라고 한다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렇게 먼 거리를 짧은 시간 동안 이동하며 중간에 전쟁까지 했으니,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짐작해봅니다.
4) 북부 대학살과 둠스데이 북
하지만 윌리엄 1세가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앵글로색슨족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새롭게 부임한 노르만 영주를 죽이며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덴마크인들을 끌어들이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반란은 주로 요크 지방을 중심으로 한 잉글랜드 북부에서 일어났는데, 윌리엄 1세는 이러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큰 규모의 군사를 일으켜 북부를 초토화시킵니다. 단순히 반란군을 죽인 것을 넘어 주민을 학살하고 밭을 갈아엎거나 농기구와 집을 태워버리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학살당한 사람들 외에도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초토화시킨 결과 잉글랜드 북부는 앵글로색슨 귀족은 물론 농민들도 사라져 거의 빈 땅이 되었고, 그 땅을 노르만 기사들에게 분봉하여 사회 상류층을 노르만계가 장악하게 됩니다.
또한 잉글랜드에서 제대로 세금을 거두기 위해 둠스데이 북을 만듭니다. 이름만 들어서는 무슨 살생부나 저주가 담긴 책 같지만, 잉글랜드 내의 토지와 인구, 가축과 같은 재산을 기록한 문서입니다. 이를 조사해 기록한 이유는 최대한 많이 세금을 거두기 위함이니, 피지배층인 앵글로색슨족 입장에서는 저주가 담긴 살생부나 마찬가지였기는 할 것입니다.
이것이 로빈 후드 의적 서사에서 묘사된 부조리의 시작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동안 먼 길을 돌아왔네요. 로빈 후드에서 나타나는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대립에는 민족과 언어가 다른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피로 물든 역사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르만족 지배층인 사자심왕 리처드 1세는 왜 긍정적으로 그려졌던 것일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빈 후드의 모험 1편 - 의적
로빈 후드의 모험 2편 - 잉글랜드의 시작
파주 슈필과 보드게임 페스타로 인해 연재가 많이 늦었습니다. 정복왕 윌리엄부터 <로빈 후드의 모험> 이야기를 풀어야겠다고 생각을 한지는 보름이 넘었는데, 이제야 윌리엄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겠네요.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던 만큼, 빠르게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1) 노르만족
노르만족은 프랑스에 정착한 바이킹들입니다. 이들이 정착한 지역이 바로 2차 세계대전의 상륙작전으로 유명한 노르망디이지요. 노르만족은 9세기경에 프랑스를 침략해 파리까지 점령할 정도로 서프랑크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에 당시 서프랑크의 왕이었던 '단순왕' 샤를 3세는 차라리 이들에게 영지를 주어 봉신으로 삼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해, 노르만족 무리의 우두머리 중 하나였던 롤로를 노르망디 지역의 백작으로 봉하니 이것이 훗날 노르망디 공국이 되는 루앙 백국입니다. 백국의 시조인 롤로는 정복왕 윌리엄 1세의 고조할아버지입니다. 길게 보면 오늘날 엘리자베스 2세의 선조*가 되는 것이죠.
롤로 이후로 노르망디 백작위는 후손들에게 이어지다가 윌리엄 1세의 큰아버지인 리샤르 2세 때에 공로를 인정받아 공작으로 승격됩니다.
*(영국 왕가의 계보도를 정리한 자료들을 보면 보통 웨식스의 앨프레드 대왕을 현대 영국 왕가의 시조로 봅니다. 7왕국을 사실상 통일했던 앨프레드 대왕이 첫 잉글랜드의 왕이며, 잉글랜드는 웨식스를 이었다는 것이지요. 앨프레드 대왕과 윌리엄 1세의 피가 섞이는 것은 플렌테저넷 왕가의 창시자이자 사자심왕과 존왕의 아버지이며 윌리엄 1세의 증손자인 헨리 2세부터입니다. 헨리 2세가 모계로 앨프레드 대왕의 직계였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1세의 정복 이전의 잉글랜드 역사를 포용하기 위해서라도 7왕국 시대의 영웅인 앨프레드 대왕을 선조로 삼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이기는 합니다.)
노르망디 공국의 지도입니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B%A5%B4%EB%A7%9D%EB%94%94_%EA%B3%B5%EA%B5%AD#/media/%ED%8C%8C%EC%9D%BC:Cartenormandie2.PNG)
(출처: https://namu.wiki/w/%EC%B9%B4%EB%A1%A4%EB%A3%A8%EC%8A%A4%20%EC%99%95%EC%A1%B0)
유럽 전체 지도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윌리엄 1세 사후의 지도지만, 당시의 세력도를 보기에는 충분히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파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노르망디 공국이고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잉글랜드 왕국입니다. 빨간 점선으로 표시된 부분은 윌리엄 1세 이전에 잉글랜드를 정복한 덴마크의 크투트 대왕이 세운 북해 제국의 강역인데, 대왕 사후 분열되고 맙니다. 크누트 대왕의 얘기를 자세히 할 것은 아니나 덴마크계 바이킹들이 잉글랜드 왕위를 가졌던 적이 있다는 것만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2) 기욤 2세
이 단락에서 할 이야기는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기 전, 아직 기욤 2세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현대 프랑스식으로 발음하자면 기욤이지만, 당시 노르만인들의 발음으로는 달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증조부가 기욤 1세였기에 노르망디 공작으로서의 기욤은 기욤 2세가 되었지만, 잉글랜드 왕으로서는 첫 번째 윌리엄이기에 윌리엄 1세가 되는 것입니다. 유럽 중세사를 보면, 한 명의 군주가 여러 나라의 작위를 가지면서 나라마다 다르게 불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입니다. 그 나라말로 이름을 바꿔 부르고, 해당 작위에서 해당 이름을 쓴 선조가 있다면 그걸 세서 x세로 치는 것이죠. 앞의 경우는 한국에서도 예전에는 일본이나 중국 사람을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 부르던 경우가 있었으니 어색하지 않지만, 후자는 동양에서는 없던 문화니 생소하기는 합니다. 동양에서 군주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거나 쓰지 않는 피휘 문화가 있었기에 조상의 이름을 따서 자녀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죠.
기욤 2세는 아버지 로베르 1세의 사생아였습니다. 게다가 어머니의 출신조차 미천했지요. 하지만 그가 로베르 1세의 유일한 아들이었습니다. 로베르 1세는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다녀오는 길에 병사했지만, 어린 아들이 작위를 이을 수 있도록 미리 후계자로 선정하고 신하들에게 충성서약을 해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7세에 공작이 된 사생아의 입지는 불안했습니다. 당장 기욤 2세의 아버지 로베르 1세도 형제 상속으로 공작이 된 마당에 시퍼렇게 살아있는 숙부들은 큰 위협이었지요. 하지만 여러 견제에도 불구하고 기욤 2세는 당시 프랑스 왕인 앙리 1세에 더불어 충신들과 외숙부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하고 15세에 기사로 인정받으며 안정적인 통치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기욤 2세는 사생아라는 자신의 불안한 입지를 극복하기 위해 유력한 가문과 결혼하길 원했고 옆 동네인 플란데런(지금의 벨기에 북부)의 공녀 마틸다에게 청혼합니다(지도로 보면 바로 붙었지만, 두 지역의 대표 도시인 캉과 브뤼셀 간의 거리는 480km에 달합니다). 공작이 입지가 불안해 백작의 딸과 결혼하려 한다는 것이 이상할 수 있겠지만, 중세 유럽은 양판소처럼 공/후/백/자/남 간의 칼 같은 서열이 있던 것은 아닙니다. 공작이라고 무조건 백작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작위 그 자체의 높낮이보다 중요한 것은 가문의 위신과 권력인데, 그점에서 사생아 출신인 어린 공작보다는 당시 프랑스 왕실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던 플란데런 백작이 더 유력한 귀족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틸다는 사생아 아들 따위와 결혼할 수 없다며 청혼 사절을 돌려보냅니다. 이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기욤 2세는 그 길로 말을 달려 플란데런으로 가서 마틸다를 폭행(!)합니다. 폭행 장소가 교회인지 마틸다의 방인지는 이설이 있으나, 어느 쪽이던 기욤 2세가 귀족가의 영애의 머리채를 잡아 패대기친 다음 두들겨 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모습을 본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5세는 당연히 분노하여 검을 빼들려고 했으나 그때 마틸다가 아버지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이 남자가 아니라면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어요!"
'날 이렇게 대한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는 클리세의 원조 같은 일화입니다. 두 사람은 보두앵 5세와 교황 레오 9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했고 금슬도 좋아 아들 4명과 딸 5명 이상을 낳았다고 전해집니다(영아 사망률이 높아 기록되지 않은 아기들도 있던 시절이니 이렇게 전해집니다).
마틸다의 마음이 극적으로 돌아선 이유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중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은 '사생아라는 말에 발끈해서 목숨을 걸고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할 사람이라면, 외도하여 사생아 문제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윌리엄 1세가 외도했다는 정황이나 기록은 없으며 부부의 사이는 좋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많으니, 마틸다의 판단은 정확했던 모양입니다. 많은 자녀를 낳았다는 기록 외에도 부부의 사이가 좋았다는 증거로 꼽히는 것이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원정을 떠날 때, 마틸다가 사비를 털어 마련한 기함 '모라' 호입니다.
3) 윌리엄 1세
이제야 다시 무대가 잉글랜드로 돌아옵니다. 초기의 불안했던 정세를 극복하고 훌륭한 가문 출신의 공비까지 얻은 기욤 2세는 이제 프랑스 왕이 견제해야 할 정도로 유력한 귀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욤 2세가 노리고 있던 것은 프랑스 왕위가 아니라 잉글랜드 왕위였습니다.
당시 잉글랜드 왕위는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의 왕은 해럴드 2세로 전왕인 참회왕 에드워드의 처남입니다. 해럴드 2세는 후사 없이 사망한 애드워드가 자신을 차기 왕으로 지목했다고 주장하며 왕위에 오릅니다. 해럴드 2세는 웨식스 백작을 비롯해 여러 앵글로색슨 작위를 가진 정통 앵글로색슨이기 때문에 여러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습을 바다 건너에서 분노하면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기욤 2세였습니다. 참회왕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왕위를 넘기겠다 약속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아주 뜬금없지는 않은 것이, 참회왕 에드워드의 어머니가 기욤 2세의 고모할머니라 혈연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해럴드 2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 난파 사고로 인해 기욤 2세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나 봉신이 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해럴드 2세의 즉위는 기욤 2세에게는 하극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에드워드의 약속이 사실이었다는 전제로 그렇다는 말이고 그저 잉글랜드 정복을 위한 기욤 2세의 핑계였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다 건너에 한 명 더, 노르웨이의 하랄 3세도 잉글랜드 정복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하랄 3세가 크누트 대왕의 직계 후손은 아니지만, 크누트 대왕과 그의 아들들이 노르웨이 왕과 잉글랜드 왕을 겸했으니 주장해볼 명분은 있습니다. 그리고 참회왕 에드워드는 자신의 이부형제이자 크누트 대왕의 아들인 하레크누드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았으니 다시 덴마크인들의 왕위를 가져오겠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또한 잉글랜드 내부 권력 투쟁에서 소외된 해럴드 2세의 동생 토스티그가 당대 최고의 전사로 이름난 하랄 3세를 끌어 들었으니, 내부의 지원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잉글랜드 왕위는 삼파전에 들어갑니다. 잉글랜드의 해럴드 2세, 노르망디의 기욤 2세, 노르웨이의 하랄 3세의 각축전인 것이죠. 동시에 둘을 상대해야 하는 해럴드 3세가 불리해 보이지만, 그건 어차피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승자독식, 라스트 맨 스탠딩인 것이죠.
상황은 다음과 같이 전개됩니다. 기욤 2세가 폭풍우로 인해 출항하지 못하는 사이, 해럴드 2세는 먼저 상륙한 하랄 3세와 전투합니다. 하랄 3세가 상륙한 지역은 요크 지방으로 런던으로부터 북쪽으로 300km가 넘는 거리에 있습니다. 해럴드 2세는 병력을 모아 빠르게 행군해 하랄 3세의 군세를 공격했고 그 결과 하랄 3세와 반란자 토스티그가 전사합니다. 이렇게 삼파전의 주역 중 하나가 탈락하게 됩니다. 이 전투는 다리를 중심으로 벌어졌기에 다리 이름을 따서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라고 하는데, 양군의 세력은 하랄 3세가 최대 수송선 300척 규모의 전사 9,000명, 해럴드 2세가 최대 15,000명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3일 뒤 기욤 2세의 노르만 군이 잉글랜드 남부에 상륙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해럴드 2세는 부랴부랴 병력을 모아 남쪽으로 행군합니다. 그리고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가 벌어진 지 보름이 조금 지난 후에 그 유명한 헤이스팅스 전투를 펼치게 됩니다. 양군의 규모는 기욤 2세가 최대 12,000명, 해럴드 2세가 최대 13,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 전쟁에서 해럴드 2세가 전사하고 기욤 2세가 승리하며 잉글랜드 왕위를 두고 벌어진 삼파전에서 최후의 승자는 기욤 2세가 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앵글로색슨족이 한 번에 정복당한 것은 아닙니다. 앵글로색슨족은 대립왕을 세우며 저항했고 기욤 2세는 런던으로 진격해 이들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릅니다. 드디어 정복왕 윌리엄 1세가 된 것입니다.
당시 해럴드 2세가 왕복한 거리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을 갔다가 다시 서산까지 가는 일정이라고 한다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렇게 먼 거리를 짧은 시간 동안 이동하며 중간에 전쟁까지 했으니,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짐작해봅니다.
4) 북부 대학살과 둠스데이 북
하지만 윌리엄 1세가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앵글로색슨족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새롭게 부임한 노르만 영주를 죽이며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덴마크인들을 끌어들이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반란은 주로 요크 지방을 중심으로 한 잉글랜드 북부에서 일어났는데, 윌리엄 1세는 이러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큰 규모의 군사를 일으켜 북부를 초토화시킵니다. 단순히 반란군을 죽인 것을 넘어 주민을 학살하고 밭을 갈아엎거나 농기구와 집을 태워버리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학살당한 사람들 외에도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초토화시킨 결과 잉글랜드 북부는 앵글로색슨 귀족은 물론 농민들도 사라져 거의 빈 땅이 되었고, 그 땅을 노르만 기사들에게 분봉하여 사회 상류층을 노르만계가 장악하게 됩니다.
또한 잉글랜드에서 제대로 세금을 거두기 위해 둠스데이 북을 만듭니다. 이름만 들어서는 무슨 살생부나 저주가 담긴 책 같지만, 잉글랜드 내의 토지와 인구, 가축과 같은 재산을 기록한 문서입니다. 이를 조사해 기록한 이유는 최대한 많이 세금을 거두기 위함이니, 피지배층인 앵글로색슨족 입장에서는 저주가 담긴 살생부나 마찬가지였기는 할 것입니다.
이것이 로빈 후드 의적 서사에서 묘사된 부조리의 시작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동안 먼 길을 돌아왔네요. 로빈 후드에서 나타나는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대립에는 민족과 언어가 다른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피로 물든 역사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르만족 지배층인 사자심왕 리처드 1세는 왜 긍정적으로 그려졌던 것일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첨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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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워요!! 재밌게 또 잘 이해되게 쓰시네요 *_* 다음 편도 기대됩니다!! 마틸다 얘기는 충격적이지만.. ㅋㅋㅋ 날 때린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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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복잡하게 느껴지던 영국사 한조각을 쉽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기욤2세 = 윌리엄 1세 이군요
노르망디의 롤로 백작과, 스템퍼드브릿지 전투의 하랄 3세는 임페리움에서도 등장합니다 ㅎㅎ 반갑습니다(?)
로빈훗의 등장이 기다려지는군요, 잘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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