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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보드게임 이야기] 07. 한 번의 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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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2 12:4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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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신나요
<아컴호러 카드게임 확장: 잊힌 시대>를 한창 플레이할 할 때였습니다. 덤벼오는 적들을 수호자(또는 그에 준하는 역할)가 막아내는 동안 탐구자(또는 그에 준하는 역할)가 열심히 단서를 조사해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게임이죠. 당시 저의 '사일러스 마쉬'는 적을 막는 것도 단서를 조사하는 것도 어정쩡한 덱이었기에, 싸우다 보니 의도치 않게 단서를 조사하는 등의 예능 플레이를 했는데요. 캠페인의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덤벼오는 적들을 좀 특이하게 막아냈습니다. 피해/공포 흡수용 자산을 탄탄히 갖춰 놓고 적 넷 정도를 혼자 대여섯 라운드 동안(회피하면서) 붙잡아뒀거든요. 그때 '민 티 판'으로 열심히 단서를 캐던 P군이 절 보고 그러더군요. “저러고도 안 죽는 거 실화냐?”
전체 캠페인이 진행되는 내내 주된 역할을 선도하지는 못했지만, 극적인 상황이 닥쳤을 때 보통은 상상하기 어려운 플레이를 성공시키는 이 순간. 그래서 저렇게 놀란 P군의 감탄을 마주하는 순간. 저는 이런 순간을 즐기며 보드게임을 합니다. P군이 모 일본 예능인의 말을 인용하여 종종 하던 말을 저도 빌리자면, “열 번의 레귤러보다 한 번의 레전드”를 위해 게임을 하는 거죠.
그런데 제가 즐기는 이런 레전드는 승리에 방점이 있지는 않습니다. 평균으로 30점이면 잘 하는 게임에서 60점을 찍었다면 전설의 레전드라는 거야 의심의 여지가 없겠죠(혹시 설마 에러플…?). 그러나 적어도 그런 건 경험상 제 실력으로 가능한 업적은 아닙니다. 영리한 수싸움에 입각하여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과는 거리가 좀 있고 차곡차곡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는 상황에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며 즐기기를 선호하는 저는 게임을 할 때 꼴찌는 잘 안 한다 하더라도 승리와도 친하지 않거든요.
남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전략을 세울 머리가 된다면 아마 저도 유로 경쟁 게임을 지금보다 좋아했을 거 같습니다만(ㅎㅎ), 보통은 우왕좌왕 황새 쫓아가기 바쁘거나, “님은 10점 얻는데 나는 왜 2점?”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보니, 제가 어떤 드라마틱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경우는 보통 파티/협력/테마 게임에서 많이 나옵니다. 또 생각해 보면, 유로 경쟁을 할 때는 각자의 점수를 만드는 것에 온 정신이 쏠린 나머지 그렇게 극적인 순간이 있어도 혼자 속으로 즐기는 경우가 많았다면, 파티/협력 게임에서는 그 순간을 다 같이 만끽하는 경우가 많았던 기억입니다.
그러다 보니 게임 플레이 자체가 자연스럽게 그런 순간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더 강해지기도 했죠. <글룸헤이븐>을 할 때 팅커러를 하면 맨날 마지막 방으로 문을 박차고 달려 들어가 광역딜을 박아서 극적 반전을 만들어 놓고 드러눕곤(보통 광역딜이 소진형 기술이다 보니 체력이 바닥나곤 하죠… ㅎㅎ) 했습니다. <광기의 저택>에서는 정신이상에 걸린 바람에 다른 모두가 실패하게 만들어야 제가 승리하는 상황에서 제 캐릭터를 희생시켜서 자진 패배해 가며 다른 모두가 성공하게 만든 적도 있었고요. 이런 류의 플레이는 게임이 끝나고 나서 그 플레이를 함께 곱씹어 가게 만들어줍니다. 그런 순간을 내가 만들어냈다는 뿌듯함은 말할 것도 없고요.
글을 쓰면서 이렇게 정리를 하다 보니 어째 죄다 어시스트 스타일의 게임 플레이기는 한데요. 든 예시가 다 협력이라 그렇지 아닌 게임으로 간다면 이야기가 사뭇 달라지기는 합니다. 그리고 이런 플레이는 남이 하는 걸 보는 맛도 쏠쏠하죠.
<뱅>을 즐긴 기억을 하나 곱씹어 봅니다. 저의 지인 L은 무법자를 맡아 사투 끝에 체력이 딱 1만 남은 채로 만피인 보안관을 독대했습니다. 손에 카드 한 장 딸랑 들고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덤벼라!”
보안관의 차례, 보안관이 “뱅!” 카드를 쓰자 “회피!” 카드를 내서 또 한 번 살아남는 무법자. L은 다시 한 번 자기 차례를 프리패스하고는 웃음을 꾹꾹 참으며 호방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한 번 봐 줬다. 덤벼라!”
저런 허세 때문에 모두가 폭소하고,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플레이를 두고두고 이야기 나눕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곱씹어 보면 보드게임 경험 속에 만났던 이런 장면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보통 마피아 게임은 했다 하면 오늘의 레전드가 갱신되곤 합니다. <아임 더 보스>의 재미 포인트에는 “이번엔 누가 거하게 통수맞을까”를 보는 맛이 크잖아요?
사실 즐기는 마음이 있다면 간단한 <할리갈리>를 해도 전설의 플레이는 나오는 법이죠. 그리고 그런 하나의 장면이 만들어지는 순간 그 게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저만의 이야기는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택배 상자를 열어 이번에 새로 주문한 보드게임을 손에 드는 순간, 마음 속으로 “이 게임에서는 어떤 위대한 장면이 펼쳐질까”를 기대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두근거림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죠.
전체 캠페인이 진행되는 내내 주된 역할을 선도하지는 못했지만, 극적인 상황이 닥쳤을 때 보통은 상상하기 어려운 플레이를 성공시키는 이 순간. 그래서 저렇게 놀란 P군의 감탄을 마주하는 순간. 저는 이런 순간을 즐기며 보드게임을 합니다. P군이 모 일본 예능인의 말을 인용하여 종종 하던 말을 저도 빌리자면, “열 번의 레귤러보다 한 번의 레전드”를 위해 게임을 하는 거죠.
그런데 제가 즐기는 이런 레전드는 승리에 방점이 있지는 않습니다. 평균으로 30점이면 잘 하는 게임에서 60점을 찍었다면 전설의 레전드라는 거야 의심의 여지가 없겠죠(혹시 설마 에러플…?). 그러나 적어도 그런 건 경험상 제 실력으로 가능한 업적은 아닙니다. 영리한 수싸움에 입각하여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과는 거리가 좀 있고 차곡차곡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는 상황에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며 즐기기를 선호하는 저는 게임을 할 때 꼴찌는 잘 안 한다 하더라도 승리와도 친하지 않거든요.
남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전략을 세울 머리가 된다면 아마 저도 유로 경쟁 게임을 지금보다 좋아했을 거 같습니다만(ㅎㅎ), 보통은 우왕좌왕 황새 쫓아가기 바쁘거나, “님은 10점 얻는데 나는 왜 2점?”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보니, 제가 어떤 드라마틱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경우는 보통 파티/협력/테마 게임에서 많이 나옵니다. 또 생각해 보면, 유로 경쟁을 할 때는 각자의 점수를 만드는 것에 온 정신이 쏠린 나머지 그렇게 극적인 순간이 있어도 혼자 속으로 즐기는 경우가 많았다면, 파티/협력 게임에서는 그 순간을 다 같이 만끽하는 경우가 많았던 기억입니다.
그러다 보니 게임 플레이 자체가 자연스럽게 그런 순간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더 강해지기도 했죠. <글룸헤이븐>을 할 때 팅커러를 하면 맨날 마지막 방으로 문을 박차고 달려 들어가 광역딜을 박아서 극적 반전을 만들어 놓고 드러눕곤(보통 광역딜이 소진형 기술이다 보니 체력이 바닥나곤 하죠… ㅎㅎ) 했습니다. <광기의 저택>에서는 정신이상에 걸린 바람에 다른 모두가 실패하게 만들어야 제가 승리하는 상황에서 제 캐릭터를 희생시켜서 자진 패배해 가며 다른 모두가 성공하게 만든 적도 있었고요. 이런 류의 플레이는 게임이 끝나고 나서 그 플레이를 함께 곱씹어 가게 만들어줍니다. 그런 순간을 내가 만들어냈다는 뿌듯함은 말할 것도 없고요.
글을 쓰면서 이렇게 정리를 하다 보니 어째 죄다 어시스트 스타일의 게임 플레이기는 한데요. 든 예시가 다 협력이라 그렇지 아닌 게임으로 간다면 이야기가 사뭇 달라지기는 합니다. 그리고 이런 플레이는 남이 하는 걸 보는 맛도 쏠쏠하죠.
<뱅>을 즐긴 기억을 하나 곱씹어 봅니다. 저의 지인 L은 무법자를 맡아 사투 끝에 체력이 딱 1만 남은 채로 만피인 보안관을 독대했습니다. 손에 카드 한 장 딸랑 들고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덤벼라!”
보안관의 차례, 보안관이 “뱅!” 카드를 쓰자 “회피!” 카드를 내서 또 한 번 살아남는 무법자. L은 다시 한 번 자기 차례를 프리패스하고는 웃음을 꾹꾹 참으며 호방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한 번 봐 줬다. 덤벼라!”
저런 허세 때문에 모두가 폭소하고,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플레이를 두고두고 이야기 나눕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곱씹어 보면 보드게임 경험 속에 만났던 이런 장면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보통 마피아 게임은 했다 하면 오늘의 레전드가 갱신되곤 합니다. <아임 더 보스>의 재미 포인트에는 “이번엔 누가 거하게 통수맞을까”를 보는 맛이 크잖아요?
사실 즐기는 마음이 있다면 간단한 <할리갈리>를 해도 전설의 플레이는 나오는 법이죠. 그리고 그런 하나의 장면이 만들어지는 순간 그 게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저만의 이야기는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택배 상자를 열어 이번에 새로 주문한 보드게임을 손에 드는 순간, 마음 속으로 “이 게임에서는 어떤 위대한 장면이 펼쳐질까”를 기대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두근거림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죠.
관련 보드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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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더 보스
I'm the Boss! (1994)- William O'Connor, Diego Sanch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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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
BANG! (2002)- William O'Connor, Diego Sanchez, Stefano de Fazi, Alessandro Pierangel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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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룸헤이븐
Gloomhaven (2017)- William O'Connor, Diego Sanchez, Stefano de Fazi, Alessandro Pierangelini, Alexandr Elichev, Josh T. McDowell, Alvaro Neb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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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컴호러 카드 확장: 잊힌 시대
Arkham Horror: The Card Game – The Forgotten Age: Expansion (2018)- William O'Connor, Diego Sanchez, Stefano de Fazi, Alessandro Pierangelini, Alexandr Elichev, Josh T. McDowell, Alvaro Nebot, Andreas Adamek, Justin Adams, W. T. Arnold, Borja Pindado Arribas, Amy Ashbaugh, Cristi Balanescu, Helge C. Balzer, Tiziano Baracchi, Grzegorz Bobrowski, Yoann Boissonnet, Leonardo Borazio, Jon Bosco, Joshua Cairós, Marco Caradonna, Nicole Cardiff, J. B. Casacop, Dennis Chan, Jason Cheeseman-Meyer, Matthew Cowdery, Mauro dal Bo, Nick Deligaris, Anthony Devine, Nele Diel, Stanislav Dikolenko, Ivan Dixon, Alice Duke, Daniel Dulitzky, Logan Feliciano, Anders Finér, Michele Frigo, David Griffith, Ethan Patrick Harris, Ilich Henriquez, Rafał Hrynkiewicz, Clark Huggins, Łukasz Jaskólski, Romana Kendelic, Adam Lane, Robert Laskey, Lindsey Messecar, Michał Miłkowski, Christine Mitzuk, Reiko Murakami, Mike Nash, Héctor Ortiz, Chris Ostrowski, John Pacer, Terry Pavlet, Vlad Ricean, Andreas Rocha, Sebastian Rodriguez, Stephen Somers, Lucas Staniec, Allison Theus, Andreia Ugrai, Magali Villeneuve, Owen William Weber, Andreas Zafiratos, Matt Zeili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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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 상상하고 몰입하게 되는 너무 좋은 글!! 맞아요. 저도 이런 순간들, 또 그 순간들을 계속 얘기하게 되는 함께 플레이한 사람들 덕분에 보드게임을 더욱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컴호러 카드게임을 처음 플레이하고 기막힌 어그로와 회피로 팀을 살렸던 일을 일주일 내내 얘기했던 기억이 나요 ㅋㅋㅋ 아, 정말 게임 하고 싶게 만드는 글이에요! 추천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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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만 빽빽한 글을 언제나 잘 읽어 주시니 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ㅎㅎ 보드게임의 정말 큰 장점은 당장 같이 게임을 즐긴 사람과 그자리에서 경험을 공유한다는 게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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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재미있는 순간들이 보드게임을 계속해서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더라고요 ㅎㅎㅎ 저도 비슷한 취향이라 공감이 많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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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감사합니다. 정말 그 맛에 게임하는 거 같아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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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ㅎㅎ 전설의 레전드는 정말 유로게임들보다는 그런 게임들에서 나오는것 같습니다. 저도 그래서 스토리위주의 게임을 너무 좋아합니다. 토큰을 기가막히게 뽑았거나 조우 급증을 기가막히게 계속뽑거나.. 그러고도 성공하면 두고두고 기분이 좋죠. 광기도 미쳐서 얻은 개별승리조건카드는 별게없어도 갖고있는 본인도 두근두근거리고 다른 사람들도 저게 뭔가 계속 신경쓰이고.. 매판이 추억이 되는지라 보드게임을 계속 하게되고 하는날을 기대하게 되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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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매 판이 추억이 되는 것. 좋은 표현이네요. ㅎㅎ 늘 게임에서 즐거운 추억 만들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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