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을 손에 넣고 즐기기까지 참 긴 시간이 걸립니다. 사진이나 낚시 취미를 가진 사람이 장비를 새로 마련한다거나, 레고나 도색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관련 물품을 사는 것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이런 취미라면 최대의 만족이 오는 지점인 실사용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보드게임은 그렇지 않죠. 거기에는 두 가지 필연적인 과정인 ‘정리’와 ‘규칙 익히기’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하나하나 사서 모을 때는 어쨌든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었죠. “니가 지른 게임이다” 같은 맥락에서 말입니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과 함께 살게 되면서 이 일도 공동의 몫이 되었죠. 그러면서 보드게임 생활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이 생겼는데요.

일단, 게임을 고르는 것은 저는 보통 아내에게 일임합니다. 저희 둘 다 각자가 사고 싶은 것을 사는 데에 대해서는 전혀 터치하지 않지만, 특별히 둘 다 절대반지처럼 노리고 있던 게임이 아니라면 그 경우는 아내의 의사를 물어보는 편입니다. 저보다 취향이 좀 더 두루 넓은 아내는 유로 게임도 곧잘 수집하는 편인지라 저는 대개 군말없이 동의하고 사자고 합니다. 아내도 노브레이크로 지르고 보는 사람은 아니라서, 제 예상과 맞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의 게임 선별을 지켜보는 재미도 제법 있더군요. ㅎㅎ

택배가 도착하고 나면 그 다음은 주로 아내의 몫입니다. 창문 옆에도 별 생각 없이 방치해 두는 제 성격과는 달리 아내는 일정 이상 관심가는 게임에 대해서는 박스 포장을 하거든요. 아내가 하는 것을 옆에서 눈동냥하면서 이제 저도 박스 상단 비닐 포장하는 방법에 대해서 좀 익히기는 했습니다만 역시 저는 그것이 몹시, 매우, 귀찮고 번거롭습니다. 요즘의 아내는 저의 성격에 옮은 탓인지 몰라도 몇몇 게임의 비닐 포장을 귀찮아 해서 그냥 다 없애라고 하는 일도 늘었지만 본인이 아끼는 게임은 어김없죠.

보드게이머들의 또 하나의 취미 포인트인 정리는 주로 제 몫입니다. 아내는 그걸 몹시, 매우, 귀찮고 번거롭게 여깁니다. 반면 저는 그걸 좋아합니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의 게임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펀칭하고, 슬리브를 씌우고, 플레이할 때의 편의를 생각해 적절한 크기와 용도의 통이나 지퍼백을 찾아 모으고… 게임이 왔을 때 정리해 놓지 않으면 몸이 닳는 타입인지라, 저 역시 귀찮지만 그 마음보다는 얼른 정리를 끝내고 싶은 마음이 더 큰 편이죠. 아내를 부추겨서 “이거 내가 정리하면 안 될까?”하고 펀칭부터 정리를 시작합니다.

마지막 벽인 규칙 익히기는 게임을 사기로 주도한 사람이 주로 합니다만, 시간 여유가 좀 더 있는 사람이 익히기도 종종 합니다. 아마 모든 과정 중 제일 높은 벽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렇게 해서 규칙까지 익혔다면, 게임 플레이는 공동의 역할이니까요 :)

그러나 지금 저희 집에 있는 게임들 가운데는 밀봉 노플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건 아내가 비닐 포장을 시작하지 않았음을 탓하려는 건 아닙니다(여보, 잘 보고 있죠? ㅎㅎㅎ). 어쨌든 1차적인 즐거움은 채웠으니까요. 원래, 그 게임이 어떤 게임이든 간에 모두 공평하게 가장 즐거운 순간은 역시 게임을 지를 때가 아니겠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