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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보드게임 이야기] 06. 조카를 이기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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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4 18: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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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신나요
조카는 야성미가 넘치는 아이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마른 체형인데 팔다리 힘으로 문지방을 타고 올라가서, 문에 박아 놓은 철봉에 매달립니다. 승부욕(이라는 건 사실 아이들이라면 다 갖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도 나름 세서 게임이 잘 풀리지 않거나 할 때마다 온 거실을 뛰어다니기도 하고요.
그 조카에게 있어서 저는 “보드게임도 장난감도 사 줘서 좋은 삼촌”입니다. 누나는 경기도에 살고 저는 부산에 살던 시절, 제 앞가림하는 것에 바빠 연락도 먼저 해 주는 적 없는 야박한 동생으로 살던 그때는 조카를 잘 챙겨주는 삼촌도 아니었는데요. 그 아이가 다섯 살쯤 될 무렵 작은 인형 여러 개 들이 한 박스를 보내줬더니, 누나와의 통화 중에 저 너머에서 삼촌 최고를 외치더군요. ㅎㅎ 서울살이를 시작하고 첫 명절에 비로소 조카와 면대면을 하게 되었고, 같이 게임하고 놀 때는 이 삼촌을 빌런 넘버원쯤으로 취급하면서도 어느 명절 은근슬쩍 내민 편지에 “게임 많이 사주는 삼촌 좋아해요”라고 적어 주었습니다.
그 명절에 저와 함께 처음 만난 숙모에 대해서는 아주 호감도가 높습니다. 아주 숙모바라기예요. 처음 보는 (예쁘고 ㅎㅎ) 친절한 숙모는 조카가 꺼내는 게임마다 전혀 싫어하지 않고 같이 척척 해 주었죠. 자신을 말썽쟁이 말괄량이 취급하는 다른 가족들과는 다른 이 숙모가 좋은 그 심정도 알 법합니다.
지난 설날, 저와 아내는 이 아이와 같이 놀아주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작년 추석 조카와 <할리갈리>를 (조카만의 이상한 하우스 룰로) 하면서 게이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은 확인했으니. 그래서 어떤 게임을 챙길까 하다가 그때쯤 출시된 <시티 체이스>를 챙겼어요. 아내는 작년 추석에 선물해(달라고 해서 선물해) 준 <모두의 마블>을 하자고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거 한 게임 하면 2시간은 훅 가겠지 하면서요.
점심을 먹고 거실에 앉아 저녁 식사 시간을 기다리는 시간. 슬그머니 <시티 체이스>를 꺼냈습니다. 박스 겉면에 자동차가 떡하니 박힌 이미지가 이 여자아이에게 먹힐 것인가가 고민이었는데, 처음에는 영 관심 없어 보이던 초등 2학년 조카가 슬금슬금 다가옵니다. 옳거니. 안의 내용물을 꺼냈는데, 건물이나 헬기나 구성물 퀄리티가 제법 있어 보이거든요. 그래서 게임판을 펼치고 하나하나 끼고 있으니까 옆에 와서 거드네요.
작년에 조카가 <할리갈리>를 완전히 엉뚱한(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는) 규칙으로 설명하는 걸 듣고, 이 아이가 게임을 이해하고 할 수 있을지 걱정하며 규칙 설명을 했는데, 잘 알아듣더라구요. 이것이 온 보드게이머 부부가 원한다는 8세 이상 아이인가 감탄하며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첫 게임, 숙모와 숙모바라기 조카가 먼저 경찰을, “작년에 할리갈리 같이 안 해 줘서 꼭 지게 만들고 싶은” 삼촌이 도둑을 했고, 귀신같은
이런 게임의 꽃은 역시 도둑이겠죠. 조카가 도둑을 시작했고, 부부경찰단에 쓰라린 첫 검거를 당하고 나더니 “내가 이길 때까지 계속할 거야!”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아아... 승리는 모든 게임의 시작이자 끝이니. 연거푸 세 게임을 플레이하여 마침내 조카가 도둑으로 탈출에 성공합니다(이 사이 아내도 한 번 도둑을 했고, 총 다섯 게임 중 도둑이 처음으로 탈출에 성공한 셈이었지요).
<시티 체이스>를 끝내고 아내는 이어서 조카를 꼬드기기 시작합니다. “우리 작년에 모두의 마블 사왔잖아. 그거 안 해 봤지? 같이 할까?”
명절이라 온 집안 사람들이 모이기는 했지만, 나이 엇비슷한 어른들이 모였다고 서로의 관심사나 세상 보는 눈이 다 같지는 않습니다. 밥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나누고 나면 이야깃거리는 생각보다 빨리 떨어집니다. 자주 볼 일 없는 가족들이 연에 두 번 만나는 나름 귀한 날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어느 순간 이들이 모여앉는 곳은 TV 앞입니다. 점심을 준비하느라 바빴던 누나도, 귀성길에는 역으로 움직여야 안 막힌다며 명절마다 차를 몰고 경기도로 올라오는 어머니도 이 즈음이면 피곤해서 눈을 붙입니다. 그런 가족들이 켜 놓는 TV 프로그램이 재미있을 리가 없는 조카에게는, 멀리 지방에 있다 보니 얼굴 본 적도 없는 삼촌이 결혼한다며 서울로 올라와서 숙모를 데리고 오기 시작했는데 게임을 같이 해 주는 것이 즐거웠을 겁니다.
저도 저 나름대로, 가족들이 그저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서로의 어떤 모습들을 너무 많이 봐왔기에 느끼는 복합적인 측면도 있고, 완전히 다른 환경 속에서 살다 보니 각자 욕망의 차이도 커서 소통이 원활하지도 않은 부분도 있고요. 그러니 저에게 있어서도 보드게임이 명절에 숨이 트이게 만들어 주는 역할도 조금은 한 셈입니다. 물론 덱스터리티에 취약한지라 조카가 '젠가'를 꺼냈을 때 도망치긴 했지만요.
“삼촌의 파산”을 갈구하던 조카의 뜻대로 삼촌은 이른 파산 성공으로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후 숙모와 조카의 2인 대결로 이어진 <모두의 마블>은, 숙모가 자신에게 돈을 잃는 걸 마음 아파하던 착한 조카가 숙모에게 지면서 끝났습니다. 아이가 이렇게 스스로 지는 걸 선택하는 모습을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에 의외이기도 했고, 나름 훈훈하기도 했네요. 그 와중에 <모두의 마블>이 끝나기까지 1시간 정도밖에 흐르지 않아 숙모는 당황했습니다. ㅎㅎ 그리고 다른 가족들은, 우리가 조카와 놀아준 덕에 자신들이 편안한 오후를 보내서인지 고마워하는 눈치고요.
보드게이머에게 있어 가장 완벽한 나이라는 14세 이상이 될 때 즈음이면 조카에게 사춘기가 먼저 오겠죠. 아마 그 전까지 우리의 명절은 즐겜픽의 연속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음 추석은 <라비린스>로 장식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당장 내일이 어린이날이라 택배로 보낸 <그래비트랙스>가 저를 다시 한번 "모두의 마블로 파산내고 싶지만 좋아하는 삼촌"으로 만들어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 봅니다.
관련 보드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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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린스
Labyrinth (1986)- Xavier Gueniffey Durin, Andreas Härlin, Stephen Hillenburg, illuVision, Max J. Kobbert, Joachim Krause, Horst Laupheimer, Herbert Lentz, Sybille Ring, Wolfgang Scheit, vitamin-be.de, Thomas Weiss, Paul Wind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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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갈리
Halli Galli (1990)- Xavier Gueniffey Durin, Andreas Härlin, Stephen Hillenburg, illuVision, Max J. Kobbert, Joachim Krause, Horst Laupheimer, Herbert Lentz, Sybille Ring, Wolfgang Scheit, vitamin-be.de, Thomas Weiss, Paul Windle, Oliver Freudenreich, Barbara Spel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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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체이스: 경찰 vs 도둑
City Chase (2021)- Xavier Gueniffey Durin, Andreas Härlin, Stephen Hillenburg, illuVision, Max J. Kobbert, Joachim Krause, Horst Laupheimer, Herbert Lentz, Sybille Ring, Wolfgang Scheit, vitamin-be.de, Thomas Weiss, Paul Windle, Oliver Freudenreich, Barbara Spel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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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우리딸이 14세에 시춘기가 오면 세상을 등지고 집에서 보드게임을 했으면 좋겠;;;;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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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논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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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와 게임이라면 제가 큰 실수를 했던게 생각나네요 ㅎ;;;
상어아일랜드였는데 이게 왜 재미있지? ...이런 생각을 하던게 조카에게 보였었나봐요.
(똘똘한 녀석이라 눈치를 금방 챘던거 같...ㅜㅠ)
나중에야 알았었죠 애들과 게임할땐 뭐든 저세상 텐션을 유지해야 한다는걸... 하아... -
그나저나 시티체이스는 게임 샷을 볼 수록 출특을 놓친게 아쉽기도 해요.
하필 그때 완구형 사지마라는 금지령이 떨어진 타임이라 일부러 안 찾아보고 넘겼는데 때깔좋은 저 컴포들을 보고있으면 음... -
ㅎㅎ 아이들은 작으면서도 큰 존재라는 게 달리 하는 말은 아닌 듯해요.
<시티 체이스>는 저도 실제로 개봉해 보고 한 번 놀라고 플레이해 보니 기대 이상으로 깔끔하고 괜찮아서 한 번 더 놀란 게임입니다. -
출특 놓치고도 계속 눈에 밟히는 게임은 언젠가 사게 되더라구요.
최근에 산 롤플레이어도 그랬고...음... -
너무 다정하고 좋은 글이에요! 저도 트렁크에 게임을 바리바리 싣고 초등 조카랑 명절마다 놀았는데, 조카가 명절만 기다린다는 얘기를 들으면 뿌듯하기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중학생이 되면서는 아이돌에 빠지면서 보드게임은 뒷전이 되었지만...ㅎㅎㅎ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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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모두가 좋아하는 게 같을 수 없고, 적당한 때에 놓아주는 마음이 필요할 때도 있는 거 같네요. 그래도 즐거웠던 기억은 마음에 남는 거니깐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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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부러울 정도로 따뜻한 글이라, 기분 좋게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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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사람이 기분 좋아지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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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재밌게 잘 쓰셔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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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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