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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기획기사 2편 – 두 일본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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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5 09: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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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 [GM]찰리
세키가하라 기획기사 1편 – 일본의 지리(1)
세키가하라 기획기사 1편 – 일본의 지리(2)
세키가하라 기획기사 2편 – 두 일본인 이야기
안녕하세요? [GM]찰리입니다. 이번 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저는 이번 시리즈의 종착지를 세키가하라로 삼고, 일본인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세키가하라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다뤄보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일본의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본에는 사람이 언제부터 살았을까요? 일본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은 12만 년 전의 것으로 한반도의 구석기 문화가 50~60만 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 비하면 늦은 편입니다.
위 사진은 마지막 빙하기 당시의 동아시아 지도입니다. 지금은 바다인 곳들이 육지여서 일본이 대륙과 붙어있었습니다. 인류의 여정은 아프리카 남단에서부터 출발해 전 세계로 뻗어 나갔으니, 동아시아 끝자락에 있던 일본에 가장 늦게 도착했던 것이지요.
빙하기가 끝나고 일본이 섬이 되기 시작한 시점은 간빙기가 시작된 12,500년 전의 일입니다. 이 시기부터 일본은 대륙과 분리되어 섬이 됩니다. 이렇게 고립된 인류는 대륙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석기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이 시기를 조몬 시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일본에 살던 사람들을 조몬인이라고 부릅니다.
연구에 따르면 인류는 기원전 905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농업을 시작했습니다(괴베클리 테페가 연구되며 이 시기는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 보입니다). 이 지역에서부터 시작된 농업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기원전 3000년 경의 일입니다. 국사시간에 한국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농업이 시작되었다고 배우셨던 기억이 나실 겁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이미 간빙기가 한참 진행되어 한반도와 일본이 바다로 갈린 시기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신석기시대인 조몬 시대는 농업 기술이 전해지지 않아 농업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조몬인들은 수렵채집인들이었다는 말이지요.
조몬이라는 말은 우리식으로 발음하면 승문(縄文)으로 줄무늬라는 뜻입니다. 당대에 사용되었던 토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빗살무늬 토기 시대” 같은 말인 셈입니다(빗살무늬 토기 시대라는 말이 어색한 분들도 많겠지만,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토기로 시대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 중 실질적으로 청동기가 사용된 시기는 후기부터이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라는 용어로는 이 시대를 설명하기 어려운 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분법에서는 신석기시대를 빗살무늬 토기 시대로, 청동기 시대를 민무늬 토기 시대로 구분합니다).
조몬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들입니다. 가운데의 토기가 대표적인 조몬 토기입니다. 흰색으로 강조된 부분을 보시면 이 토기가 왜 줄무늬 토기인지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왼쪽의 유물은 조몬 시대 후기의 토기로 화려한 장식이 눈에 띕니다. 비단 조몬 시대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수렵채집시대 후기의 토기들이 농경시대의 토기들보다 화려한 편입니다. 수렵채집 시대에는 일상에 필요한 열량을 섭취하고 나면 더는 노동하지 않고 여가를 보냈던 반면, 농경 시대에는 끊임없이 농사를 지어야 해서 토기에 장식 따위를 할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반도에서도 빗살무늬 토기 이후에는 민무늬 토기가 사용되었던 것이지요. 오른쪽 유물은 어딘가 친숙하지 않나요? 디지몬 시리즈에서 가장 못생긴 디지몬을 꼽자면 1위를 다툴 토우몬이 바로 이 조몬 시대의 토우에서 따온 캐릭터입니다.
위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조몬 시대의 토기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저 유물이 우리나라 부산시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반도 남부에서 조몬인들의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것은 이 시기에도 한반도 남부와 일본 사이의 인적∙물적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조몬인들은 일본에 가장 먼저 살았던 인류이지만 이렇다 할 문명을 발전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일본 역사의 주역이 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실제로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에서 조몬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조사에 따라 다르지만 3~13%입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일본 내에서도 홋카이도나 오키나와 쪽으로 가면 조몬인 유전자 비중이 많이 늘어난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소수민족인 아이누족은 66~79.3%, 류큐인의 경우 27%로 일본 본토에 비해 확실히 비중이 높습니다. 일본에 가장 먼저 살았지만, 정작 일본의 변방에 조몬인들의 유전자가 더 많이 남아있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이제부터 소개할 민족에게 밀려났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농경과 금속 제련법을 가져온 인류는 야요이인입니다. 일본에서는 이 시기를 기원전 10세기부터로 주장하지만, 세계 학계에서는 고고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기원전 3세기부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한반도 남부에서부터 넘어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온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한반도에서 인구 이동이 일어날 어떠한 압력이 있었을 것으로는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북방계 민족이 한반도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한반도 남부의 민족이 일본으로 이동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들이 이주를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고대 국가를 세우는 고훈시대까지의 시기를 야요이 시대라고 부릅니다.
야요이라는 명칭은 이 시기 유물이 처음 발견된 도쿄도 분쿄구 야요이초의 지명에서 따왔습니다. 이때 발굴된 토기를 야요이 토기라고 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미송리식 토기와 같은 명칭인 것입니다. 조몬 시대의 명칭이 조몬 토기에서 비롯되었듯 야요이 시대라는 명칭도 야요이 토기에서 비롯되었으니 일본의 선사시대는 토기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비교적 화려했던 조몬 토기와는 달리 농사가 시작된 야요이 시대의 토기는 한반도에서도 그러했듯 민무늬임이 특징입니다.
야요이인들은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수렵채집에 머물던 조몬인들을 인구로 압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규슈 지방에 먼저 정착한 후, 세토 내해를 따라 시코쿠와 혼슈까지도 진출합니다. 이 시기의 유물이 도쿄에서도 발견되는 것을 보면, 야요이인들은 일찍부터 혼슈 동부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주류는 규슈나 긴키(간사이) 지방이었습니다. 규슈와 긴키 중 어느 지역이 중심지였느냐는 일본 사학계에서도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슈입니다. 저는 야요이 시대의 초기에는 규슈 지방이 중심지였지만 후기로 가면서 긴키 지방이 중심지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야요이인들은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성읍국가를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의 기록은 일본 사서로는 전해지지 않으나, 중국의 사서를 통해 그 기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사서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후한 세조 광무제 때의 일인 서기 57년입니다(이 시기 한반도는 삼국시대 초기로 석탈해가 신라 이사금에 오르던 해입니다).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건무중원 2년(57년), 왜노국이 받들어 조공하고 하례하였다. 사자는 스스로를 '대부(大夫)'라 칭하니 '왜국' 제일 남쪽지역이다. 광무제가 인수를 주어 하례하였다.
후한서 동이열전 왜(倭)
왜노국은 노국 또는 일본식으로 나노쿠니로 불리는 나라로 사서로 교차검증 가능한 최초의 일본국입니다. 일본을 가리키는 왜나라 왜자가 이 시기부터 쓰입니다. 한 줄짜리 기록이지만 우리는 이 기록에서 많은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왜노국을 왜국과 분리해서 인식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일본이 중국에 최초로 조공을 한 기록이지만, 이 시기에 이미 일본이 큰 섬이고 이곳에 노국 이외에도 여러 세력이 있음을 중국이 인지 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왜노국을 왜국 제일 남쪽 지역이라 설명한 점입니다. 중국에 조공을 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중국에 굴복한다는 뜻이 아니라, 국제 외교전에 나설 수 있는 정도의 국가적 여력이 생겼다는 의미입니다. 물리적으로 봐도 일본에서 중국으로 항해하려면 규슈 지방에서 출발해야 하고 야요이인들은 규슈 지방에 가장 먼저 자리 잡았으니, 중국에 조공을 할 정도의 세력을 가장 먼저 키운 야요이인들은 규슈 지방민들이었을 것입니다.
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일본의 국보인 한위노국왕인(漢委奴國王印)입니다. 여기서 위(委)는 왜(倭)의 인변을 뺀 오기로 봅니다. 이 유물은 한나라에서 내린 왜노국왕의 금으로 만든 도장으로 1784년에 후쿠오카시 앞바다에 있는 시카노섬에서 한 농부가 발견했다고 합니다. 기록으로 보나 이 유물이 발견된 지역으로 보나, 야요이 시대 초기의 중심지는 규슈 지방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다음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국가는 왜면국입니다. 이 나라의 왕인 스이쇼는 사서에 이름이 기록된 최초의 일본 왕입니다. 사실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나 고사기에는 기원전부터의 역사와 역대 천황의 이름도 적혀있지만, 이 사서는 720년에 천황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천황의 계보가 신화시대부터 끊이지 않은 것으로 기록했기에 연도를 뻥튀기하거나 한 인물이 지나치게 오래 사는 등 기록의 신빈성이 낮습니다. 물론 일본의 기록에서 진실의 실마리를 추측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만, 우리는 갈 길이 머니 고고학적 증거와 교차검증 가능한 기록을 중심으로 고대 일본에서 국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다음 기록이 참 재미있는데, 바로 야마타이국의 히미코 여왕입니다. 히미코 여왕의 이야기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옵니다. 히미코가 위나라에 조공한 것은 서기 238년의 일로 이 시기는 조조의 손자인 조예가 황제이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 중국은 제갈량이 죽은 지 4년이 지난 후로 조예는 사마의를 시켜 요동의 공손연을 토벌하며 위나라의 후방을 평정했습니다. 그 여파로 고구려는 위나라와 직접 대치하게 되었고, 훗날 비류수 전투에서 크게 패해 국내성을 내주고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가 서진이 혼란에 빠진 시기를 틈타 낙랑군 등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합니다.
당대에 생소했던 여왕이 흥미로웠는지, 중국 측 기록은 이전에 왜국이 조공했을 때보다 더 자세합니다. 조공 당시의 기록은 물론 히미코 여왕의 즉위 전후의 일까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其國本亦以男子爲王, 住七八十年, 倭國亂, 相攻伐歷年, 乃共立一女子爲王, 名曰卑彌呼, 事鬼道, 能惑衆, 年已長大, 無夫壻, 有男弟佐治國. 自爲王以來, 少有見者. 以婢千人自侍, 唯有男子一人給飮食, 傳辭出入. 居處宮室樓觀, 城柵嚴設, 常有人持兵守衛.
그 나라(왜)는 본래 또한 남자를 왕으로 삼았는데, 70 ~ 80년을 다스리다가 왜국에 난이 있어/왜국이 어지러워져서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여 오랫동안 서로 싸웠다. 이내 함께 한 여자를 왕으로 세우니, 이름을 히미코卑彌呼라고 한다. (그녀는) 귀도(鬼道)를 섬기고 사람들을 혹하게 했고 나이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남편이 없고 남동생이 있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돕는다. 왕이 된 이후로 본 적이 있는 자가 적었다. (여자) 시종 1,000여 인으로 하여금 시중들게 하며, 오직 남자 한 사람만이 음식을 공급하면 말을 전하여 드나든다. 사는 곳은 궁실과 누각이고 성책을 삼엄하게 둘렀는데, 항상 병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ㅡ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
또한 삼국사기에도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니, 히미코 여왕의 야마타이국은 이전의 왜국들에 비하면 적극적으로 외교전을 펼칠 여력이 있었다고 보입니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이전에는 백여 국이 있다가 히미코 여왕 당대에는 30여 국으로 세력이 정리되었고, 야마타이국이 그중 상국이었습니다. 삼국지에는 히미코 여왕에 속하지 않은 왜국도 있다고 적혀있는데, 이를 미루어보아 히미코 여왕이 조공을 통해서 얻고자 했던 것은 중국의 책봉을 받아 아직 산하에 들어오지 않은 타국을 제압하고 정복할 명분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히미코 여왕은 타국 기록에도 남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활동한 군주였지만, 일본의 기록에는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히미코 여왕이 모티브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신화나 인물은 있지만, 히미코 여왕의 행적과는 맞지 않아서 이 글에서 참고하기는 어렵겠습니다.
히미코 여왕 사후 왜국은 다시 혼란에 빠집니다. 새로 즉위한 남자 왕의 권위를 다른 국에서 인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혼란은 히미코 여왕의 종녀인 토요가 13세의 나이로 여왕에 오르며 진정되었다고 합니다.
히미코 여왕의 야마타이국이 어디에 있었냐는 일본 학계의 뜨거운 감자입니다. 도쿄대학과 규슈대학에서는 규슈설을 교토대학과 오사카대학에서는 긴키설을 지지합니다. 전자는 삼국지에 기록된 야마타이국까지 가는 길을 따져보면 규슈 지방을 벗어나기 어렵고, 규슈 지방에서 한나라 시대의 거울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에 규슈 지방에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후자는 긴키 지방에서는 위나라의 거울이 출토되었고, 삼국지의 기록에서 동남쪽을 남쪽으로 잘못 기록하는 것을 보정하면 긴키 지방 방향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주장 모두 설득력이 있지만, 아직까지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최근 긴키 지방에서 이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아직 발굴이 진행 중입니다. 이 유적이 야마타이국의 것이라면 이 논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겠지만, 아직은 기다려봐야겠습니다.
야마타이국은 야요이 시대 말기에서 고훈 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국가입니다. 한반도에 여러 성읍국가가 있다가 점차 세력이 정리되면서 삼국시대의 고대 국가가 형성되었듯이 일본도 이 시대를 지나며 6~7세기경에는 본격적인 국가의 기틀이 잡히게 됩니다. 이렇게 세워진 나라가 바로 오늘날 일본의 직계 전신이 되는 야마토입니다. 일본에 나중에 들어온 야요이인들이 일본의 역사를 이끌어나가게 된 것이지요.
다음 시간에는 야마토의 이야기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야요이인들은 규슈에서부터 문명을 시작했지만, 정작 규슈 전체가 야요이인들에게 정복되는 것은 8세기의 일입니다. 야마토가 세워진 이후에도 규슈 남부에는 하야토인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야마토인들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했고,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내륙 지역은 조몬인들이 주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해안가에는 야요이인을 비롯한 도래인들도 다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주장이 있습니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인들 중 일부가 규슈 남부에 정착했다는 것이지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은 타이완 섬에서부터 출발해 폴리네시아와 인도네시아 일대로 뻗어나간 해양 민족으로 이들이 규슈 남부까지도 진출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인의 관점에서 편의상 도래인을 야요이인이라는 하나의 민족으로 분류하는 것이지, 당대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똑같이 한반도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출발하기 전부터 정체성이 다를 수 있고, 도착한 후에 정착한 곳이 달라지면서도 정체성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비슷한 청동기와 농경문화를 향유했기에 일찍부터 교류하며 연맹국가를 만들었고 마침내 야마토 건국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하야토인들은 야마토에 복속된 후 동화되어 사라졌기 때문에 이들이 어떤 민족이었을지는 모릅니다. 이들은 부족국가 수준의 공동체를 가졌기에 똑같이 하야토로 분류되어도 어디는 야요이인이 주류이고 어디는 조몬인이 주류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서 대만에서부터 넘어온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열의 도래인이 있었다는 이야기 정도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지만, 하야토인이 전부 대만계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나 싶습니다.
세키가하라 기획기사 1편 – 일본의 지리(2)
세키가하라 기획기사 2편 – 두 일본인 이야기
안녕하세요? [GM]찰리입니다. 이번 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저는 이번 시리즈의 종착지를 세키가하라로 삼고, 일본인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세키가하라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다뤄보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일본의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 첫 번째 일본인
일본에는 사람이 언제부터 살았을까요? 일본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은 12만 년 전의 것으로 한반도의 구석기 문화가 50~60만 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 비하면 늦은 편입니다.
위 사진은 마지막 빙하기 당시의 동아시아 지도입니다. 지금은 바다인 곳들이 육지여서 일본이 대륙과 붙어있었습니다. 인류의 여정은 아프리카 남단에서부터 출발해 전 세계로 뻗어 나갔으니, 동아시아 끝자락에 있던 일본에 가장 늦게 도착했던 것이지요.
빙하기가 끝나고 일본이 섬이 되기 시작한 시점은 간빙기가 시작된 12,500년 전의 일입니다. 이 시기부터 일본은 대륙과 분리되어 섬이 됩니다. 이렇게 고립된 인류는 대륙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석기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이 시기를 조몬 시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일본에 살던 사람들을 조몬인이라고 부릅니다.
연구에 따르면 인류는 기원전 905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농업을 시작했습니다(괴베클리 테페가 연구되며 이 시기는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 보입니다). 이 지역에서부터 시작된 농업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기원전 3000년 경의 일입니다. 국사시간에 한국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농업이 시작되었다고 배우셨던 기억이 나실 겁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이미 간빙기가 한참 진행되어 한반도와 일본이 바다로 갈린 시기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신석기시대인 조몬 시대는 농업 기술이 전해지지 않아 농업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조몬인들은 수렵채집인들이었다는 말이지요.
조몬이라는 말은 우리식으로 발음하면 승문(縄文)으로 줄무늬라는 뜻입니다. 당대에 사용되었던 토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빗살무늬 토기 시대” 같은 말인 셈입니다(빗살무늬 토기 시대라는 말이 어색한 분들도 많겠지만,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토기로 시대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 중 실질적으로 청동기가 사용된 시기는 후기부터이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라는 용어로는 이 시대를 설명하기 어려운 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분법에서는 신석기시대를 빗살무늬 토기 시대로, 청동기 시대를 민무늬 토기 시대로 구분합니다).
조몬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들입니다. 가운데의 토기가 대표적인 조몬 토기입니다. 흰색으로 강조된 부분을 보시면 이 토기가 왜 줄무늬 토기인지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왼쪽의 유물은 조몬 시대 후기의 토기로 화려한 장식이 눈에 띕니다. 비단 조몬 시대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수렵채집시대 후기의 토기들이 농경시대의 토기들보다 화려한 편입니다. 수렵채집 시대에는 일상에 필요한 열량을 섭취하고 나면 더는 노동하지 않고 여가를 보냈던 반면, 농경 시대에는 끊임없이 농사를 지어야 해서 토기에 장식 따위를 할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반도에서도 빗살무늬 토기 이후에는 민무늬 토기가 사용되었던 것이지요. 오른쪽 유물은 어딘가 친숙하지 않나요? 디지몬 시리즈에서 가장 못생긴 디지몬을 꼽자면 1위를 다툴 토우몬이 바로 이 조몬 시대의 토우에서 따온 캐릭터입니다.
(아직도 생방송으로 토우몬을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위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조몬 시대의 토기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저 유물이 우리나라 부산시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반도 남부에서 조몬인들의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것은 이 시기에도 한반도 남부와 일본 사이의 인적∙물적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조몬인들은 일본에 가장 먼저 살았던 인류이지만 이렇다 할 문명을 발전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일본 역사의 주역이 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실제로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에서 조몬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조사에 따라 다르지만 3~13%입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일본 내에서도 홋카이도나 오키나와 쪽으로 가면 조몬인 유전자 비중이 많이 늘어난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소수민족인 아이누족은 66~79.3%, 류큐인의 경우 27%로 일본 본토에 비해 확실히 비중이 높습니다. 일본에 가장 먼저 살았지만, 정작 일본의 변방에 조몬인들의 유전자가 더 많이 남아있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이제부터 소개할 민족에게 밀려났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일본인
일본에 농경과 금속 제련법을 가져온 인류는 야요이인입니다. 일본에서는 이 시기를 기원전 10세기부터로 주장하지만, 세계 학계에서는 고고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기원전 3세기부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한반도 남부에서부터 넘어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온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한반도에서 인구 이동이 일어날 어떠한 압력이 있었을 것으로는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북방계 민족이 한반도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한반도 남부의 민족이 일본으로 이동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들이 이주를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고대 국가를 세우는 고훈시대까지의 시기를 야요이 시대라고 부릅니다.
야요이라는 명칭은 이 시기 유물이 처음 발견된 도쿄도 분쿄구 야요이초의 지명에서 따왔습니다. 이때 발굴된 토기를 야요이 토기라고 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미송리식 토기와 같은 명칭인 것입니다. 조몬 시대의 명칭이 조몬 토기에서 비롯되었듯 야요이 시대라는 명칭도 야요이 토기에서 비롯되었으니 일본의 선사시대는 토기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비교적 화려했던 조몬 토기와는 달리 농사가 시작된 야요이 시대의 토기는 한반도에서도 그러했듯 민무늬임이 특징입니다.
야요이인들은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수렵채집에 머물던 조몬인들을 인구로 압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규슈 지방에 먼저 정착한 후, 세토 내해를 따라 시코쿠와 혼슈까지도 진출합니다. 이 시기의 유물이 도쿄에서도 발견되는 것을 보면, 야요이인들은 일찍부터 혼슈 동부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주류는 규슈나 긴키(간사이) 지방이었습니다. 규슈와 긴키 중 어느 지역이 중심지였느냐는 일본 사학계에서도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슈입니다. 저는 야요이 시대의 초기에는 규슈 지방이 중심지였지만 후기로 가면서 긴키 지방이 중심지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야요이인들은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성읍국가를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의 기록은 일본 사서로는 전해지지 않으나, 중국의 사서를 통해 그 기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사서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후한 세조 광무제 때의 일인 서기 57년입니다(이 시기 한반도는 삼국시대 초기로 석탈해가 신라 이사금에 오르던 해입니다).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건무중원 2년(57년), 왜노국이 받들어 조공하고 하례하였다. 사자는 스스로를 '대부(大夫)'라 칭하니 '왜국' 제일 남쪽지역이다. 광무제가 인수를 주어 하례하였다.
후한서 동이열전 왜(倭)
왜노국은 노국 또는 일본식으로 나노쿠니로 불리는 나라로 사서로 교차검증 가능한 최초의 일본국입니다. 일본을 가리키는 왜나라 왜자가 이 시기부터 쓰입니다. 한 줄짜리 기록이지만 우리는 이 기록에서 많은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왜노국을 왜국과 분리해서 인식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일본이 중국에 최초로 조공을 한 기록이지만, 이 시기에 이미 일본이 큰 섬이고 이곳에 노국 이외에도 여러 세력이 있음을 중국이 인지 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왜노국을 왜국 제일 남쪽 지역이라 설명한 점입니다. 중국에 조공을 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중국에 굴복한다는 뜻이 아니라, 국제 외교전에 나설 수 있는 정도의 국가적 여력이 생겼다는 의미입니다. 물리적으로 봐도 일본에서 중국으로 항해하려면 규슈 지방에서 출발해야 하고 야요이인들은 규슈 지방에 가장 먼저 자리 잡았으니, 중국에 조공을 할 정도의 세력을 가장 먼저 키운 야요이인들은 규슈 지방민들이었을 것입니다.
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일본의 국보인 한위노국왕인(漢委奴國王印)입니다. 여기서 위(委)는 왜(倭)의 인변을 뺀 오기로 봅니다. 이 유물은 한나라에서 내린 왜노국왕의 금으로 만든 도장으로 1784년에 후쿠오카시 앞바다에 있는 시카노섬에서 한 농부가 발견했다고 합니다. 기록으로 보나 이 유물이 발견된 지역으로 보나, 야요이 시대 초기의 중심지는 규슈 지방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다음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국가는 왜면국입니다. 이 나라의 왕인 스이쇼는 사서에 이름이 기록된 최초의 일본 왕입니다. 사실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나 고사기에는 기원전부터의 역사와 역대 천황의 이름도 적혀있지만, 이 사서는 720년에 천황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천황의 계보가 신화시대부터 끊이지 않은 것으로 기록했기에 연도를 뻥튀기하거나 한 인물이 지나치게 오래 사는 등 기록의 신빈성이 낮습니다. 물론 일본의 기록에서 진실의 실마리를 추측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만, 우리는 갈 길이 머니 고고학적 증거와 교차검증 가능한 기록을 중심으로 고대 일본에서 국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다음 기록이 참 재미있는데, 바로 야마타이국의 히미코 여왕입니다. 히미코 여왕의 이야기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옵니다. 히미코가 위나라에 조공한 것은 서기 238년의 일로 이 시기는 조조의 손자인 조예가 황제이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 중국은 제갈량이 죽은 지 4년이 지난 후로 조예는 사마의를 시켜 요동의 공손연을 토벌하며 위나라의 후방을 평정했습니다. 그 여파로 고구려는 위나라와 직접 대치하게 되었고, 훗날 비류수 전투에서 크게 패해 국내성을 내주고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가 서진이 혼란에 빠진 시기를 틈타 낙랑군 등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합니다.
당대에 생소했던 여왕이 흥미로웠는지, 중국 측 기록은 이전에 왜국이 조공했을 때보다 더 자세합니다. 조공 당시의 기록은 물론 히미코 여왕의 즉위 전후의 일까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其國本亦以男子爲王, 住七八十年, 倭國亂, 相攻伐歷年, 乃共立一女子爲王, 名曰卑彌呼, 事鬼道, 能惑衆, 年已長大, 無夫壻, 有男弟佐治國. 自爲王以來, 少有見者. 以婢千人自侍, 唯有男子一人給飮食, 傳辭出入. 居處宮室樓觀, 城柵嚴設, 常有人持兵守衛.
그 나라(왜)는 본래 또한 남자를 왕으로 삼았는데, 70 ~ 80년을 다스리다가 왜국에 난이 있어/왜국이 어지러워져서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여 오랫동안 서로 싸웠다. 이내 함께 한 여자를 왕으로 세우니, 이름을 히미코卑彌呼라고 한다. (그녀는) 귀도(鬼道)를 섬기고 사람들을 혹하게 했고 나이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남편이 없고 남동생이 있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돕는다. 왕이 된 이후로 본 적이 있는 자가 적었다. (여자) 시종 1,000여 인으로 하여금 시중들게 하며, 오직 남자 한 사람만이 음식을 공급하면 말을 전하여 드나든다. 사는 곳은 궁실과 누각이고 성책을 삼엄하게 둘렀는데, 항상 병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ㅡ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
또한 삼국사기에도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니, 히미코 여왕의 야마타이국은 이전의 왜국들에 비하면 적극적으로 외교전을 펼칠 여력이 있었다고 보입니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이전에는 백여 국이 있다가 히미코 여왕 당대에는 30여 국으로 세력이 정리되었고, 야마타이국이 그중 상국이었습니다. 삼국지에는 히미코 여왕에 속하지 않은 왜국도 있다고 적혀있는데, 이를 미루어보아 히미코 여왕이 조공을 통해서 얻고자 했던 것은 중국의 책봉을 받아 아직 산하에 들어오지 않은 타국을 제압하고 정복할 명분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히미코 여왕은 타국 기록에도 남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활동한 군주였지만, 일본의 기록에는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히미코 여왕이 모티브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신화나 인물은 있지만, 히미코 여왕의 행적과는 맞지 않아서 이 글에서 참고하기는 어렵겠습니다.
히미코 여왕 사후 왜국은 다시 혼란에 빠집니다. 새로 즉위한 남자 왕의 권위를 다른 국에서 인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혼란은 히미코 여왕의 종녀인 토요가 13세의 나이로 여왕에 오르며 진정되었다고 합니다.
히미코 여왕의 야마타이국이 어디에 있었냐는 일본 학계의 뜨거운 감자입니다. 도쿄대학과 규슈대학에서는 규슈설을 교토대학과 오사카대학에서는 긴키설을 지지합니다. 전자는 삼국지에 기록된 야마타이국까지 가는 길을 따져보면 규슈 지방을 벗어나기 어렵고, 규슈 지방에서 한나라 시대의 거울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에 규슈 지방에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후자는 긴키 지방에서는 위나라의 거울이 출토되었고, 삼국지의 기록에서 동남쪽을 남쪽으로 잘못 기록하는 것을 보정하면 긴키 지방 방향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주장 모두 설득력이 있지만, 아직까지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최근 긴키 지방에서 이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아직 발굴이 진행 중입니다. 이 유적이 야마타이국의 것이라면 이 논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겠지만, 아직은 기다려봐야겠습니다.
야마타이국은 야요이 시대 말기에서 고훈 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국가입니다. 한반도에 여러 성읍국가가 있다가 점차 세력이 정리되면서 삼국시대의 고대 국가가 형성되었듯이 일본도 이 시대를 지나며 6~7세기경에는 본격적인 국가의 기틀이 잡히게 됩니다. 이렇게 세워진 나라가 바로 오늘날 일본의 직계 전신이 되는 야마토입니다. 일본에 나중에 들어온 야요이인들이 일본의 역사를 이끌어나가게 된 것이지요.
다음 시간에는 야마토의 이야기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번외. 세 번째 일본인
야요이인들은 규슈에서부터 문명을 시작했지만, 정작 규슈 전체가 야요이인들에게 정복되는 것은 8세기의 일입니다. 야마토가 세워진 이후에도 규슈 남부에는 하야토인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야마토인들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했고,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내륙 지역은 조몬인들이 주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해안가에는 야요이인을 비롯한 도래인들도 다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주장이 있습니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인들 중 일부가 규슈 남부에 정착했다는 것이지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은 타이완 섬에서부터 출발해 폴리네시아와 인도네시아 일대로 뻗어나간 해양 민족으로 이들이 규슈 남부까지도 진출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인의 관점에서 편의상 도래인을 야요이인이라는 하나의 민족으로 분류하는 것이지, 당대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똑같이 한반도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출발하기 전부터 정체성이 다를 수 있고, 도착한 후에 정착한 곳이 달라지면서도 정체성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비슷한 청동기와 농경문화를 향유했기에 일찍부터 교류하며 연맹국가를 만들었고 마침내 야마토 건국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하야토인들은 야마토에 복속된 후 동화되어 사라졌기 때문에 이들이 어떤 민족이었을지는 모릅니다. 이들은 부족국가 수준의 공동체를 가졌기에 똑같이 하야토로 분류되어도 어디는 야요이인이 주류이고 어디는 조몬인이 주류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서 대만에서부터 넘어온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열의 도래인이 있었다는 이야기 정도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지만, 하야토인이 전부 대만계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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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적어 주신 글에 품평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세키가하라 전투를 설명 할 때 전국시대와 나오는 가문만 설명해도 충분히 많은 분량일텐데 일본 지리와 일본 민족 태동까지 설명하는것은 TMI컨셉이라도 과유불급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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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대장군을 설명하려다보니 이 시대부터 얘기를 하면 좋겠다 싶었는데 너무 많이 거슬러 올라간 느낌도 있네요. 다음 편에는 전국시대를 열어볼 수 있도록 진도를 나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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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걸 다 태클이네요 참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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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v.21 달빛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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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7 10:59:28
삭제된 댓글입니다. -
재밌게 잘 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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