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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기획기사 3편 – 야마토와 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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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8 08:4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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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 [GM]찰리
세키가하라 기획기사 1편 – 일본의 지리(1)
세키가하라 기획기사 1편 – 일본의 지리(2)
세키가하라 기획기사 2편 – 두 일본인 이야기
안녕하세요? [GM]찰리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일본의 야마토 시대부터 무로마치 막부시대까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야마토 시대는 야요이 시대 이후의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합쳐서 부르는 말로 이 시기의 국가인 야마토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과거에는 두 시대를 야마토 시대라는 말을 많이 썼지만, 오늘날에는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엄밀하게 구분하는 편입니다.
야마토라고 하면 제 나이 또래의 분들은 대부분 이걸 먼저 떠올리실 겁니다. 스타크래프트에 나오는 배틀크루저의 특수 기술로 게임에서도 손꼽히는 최종병기급 기술이죠. 미국에서 만든 게임의 우주전함 기술 이름이 일본어인 야마토가 된 이유는 미국 제작진들이 애니메이션 우주전함 야마토에서 모티브를 따왔기 때문입니다.
우주전함 야마토는 일본 제국의 야마토급 전함의 1번함인 야마토를 우주전함으로 개조했다는 설정입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전함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지만, 우주전함 야마토의 주제는 반전과 평화입니다. 물론 야마토 전함이라는 상징의 의미와 특공 공격 미화와 같은 요소는 이 애니메이션을 우리 입장에서 편하게만 볼 수는 없게 만드는 요소이긴 합니다.
야마토급 전함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가장 거대한 전함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해군력은 한 나라의 국제적 영향력을 의미하며, 해군에서도 최강의 병기인 전함은 그 나라 해군력을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들은 최강의 전함을 만드는 경쟁을 했고 이러한 거함거포주의의 끝에 다다른 전함이 야마토급 전함인 것입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부터 해전의 주력은 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바뀌었고, 야마토 전함은 최종병기에 걸맞은 활약을 하지 못한 채 함재기들의 집중 공격을 받아 침몰합니다.
야마토급 전함의 이름은 일본의 율령국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율령국은 중국의 성이나 우리나라의 도 같은 개념이라 보시면 됩니다). 야마토는 지금의 나라현 일대에 설치된 율령국 야마토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지요. 일본의 고대국가 야마토의 발현지가 나라현 일대였기 때문에 일본에 율령제가 도입되면서 이 지역의 이름을 야마토로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명목상으로 율령국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해도, 일본 제국이 가장 자랑할만한 전함에 야마토라는 이름을 그 이유만으로 붙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야마토라는 말의 의미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일본인들이었을 테니까요. 고대국가 야마토는 오늘날 일본의 시초로 여겨지는 국가이며,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야마토 민족이라고 부릅니다.
야마토의 한자는 대화(大和)입니다. 일본어를 아시는 분들은 일본에서 한자를 읽는 방법에 소리를 읽는 음독과 뜻을 읽는 훈독이 있는데, 大和는 어떻게 읽어도 야마토로 읽을 수 없습니다. 이는 고대 일본인들이 스스로를 부르던 야마토라는 말을 왜나라 왜(倭) 자의 훈독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왜나라 왜자에 멸칭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소리가 비슷한 화할 화(和) 자로 순화하고 그 앞에 클 대(大) 자를 붙여 大化를 야마토의 표기로 사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왜=야마토라고 봐도 됩니다.
위 지도는 7세기 경의 야마토의 영역입니다. 한반도가 삼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야마토는 한반도의 국가들과 교류하며 주변 세력을 복속시켰습니다. 이 시기에 야마토는 주로 백제나 가야와 교류하고 신라와 적대했는데, 신라에 왜구가 침범했을 뿐만 아니라 신라 또한 왜국을 침공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국지전 이외에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에 왜국이 개입하거나, 일본에서 벌어진 전쟁에 한반도 국가가 개입했던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이 시기의 한반도와 일본은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아스카 시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야마토는 본격적인 중앙집권형 국가로 나아갑니다. 이 시기의 개혁을 주도한 인물이 쇼토쿠 태자였습니다. 쇼토쿠 태자는 당시 왕위계승서열 1위에 섭정직을 수행한 당대의 실권자였습니다. 그는 수나라와 한반도 국가들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불교를 진흥하고 유교를 받아들였고, 관직을 비롯한 법체계를 정립했습니다.
이후 한 세대가 지난 673년에 즉위한 덴무 천황은 군주의 호칭을 이전의 대왕(오키미)에서 천황으로 바꿉니다. 국명을 야마토에서 일본으로 바꾼 것도 이 시기로 여겨집니다. 덴무 천황은 정변으로 정권을 잡아 일본사에 유례없을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군주였기에 칭호와 국명을 비롯한 다양한 개혁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서기의 편찬도 덴무 천황의 지시로 시작되었는데, 학문적인 의미라기보다는 현 천황가 정권의 역사적 정당성을 답보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작업이었습니다. 이것이 일본서기의 고대사 부분의 기록이 신뢰성이 낮은 이유입니다. 학자가 학문적인 목적으로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와는 편찬 목적이 달랐던 것이지요.
쇼군은 장군(將軍)의 일본식 독음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쇼군이라고 말하는 막부 수장의 정식 명칭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 일본어로는 세이이타이쇼군이라고 부릅니다. 정이(征夷)라는 말은 이민족을 정벌한다는 말로, 이 직책은 본디 혼슈 북동부나 규슈 남부의 이민족들을 정벌하는 대장군의 직책이었습니다. 장군의 직책명은 어디를 치느냐에 따라 정동장군(征東將軍)이나 정서장군(征西將軍)과 같은 명칭이나 정이장군으로도 불리기도 했습니다.
정이대장군은 천황의 군권을 위임받아 지휘하는 직책이기 때문에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직책이 아니었고 황실 방계의 무가 가문이 맡았습니다. 정이대장군이라는 직책의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제 아무리 실권자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쇼군의 자리에 오를 수는 없었습니다. 정이대장군도 천황만큼이나 신분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황실 방계를 참칭 할 수 없을 만큼 천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이대장군을 칭할 수 없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원래의 마쓰다이라 성에서 조정으로부터 받은 도쿠가와성으로 개성 하면서 황실 방계 가문 족보에 편입되었기에 정이대장군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패권을 잡은 후 막부를 열었지만, 히데요시는 이전과는 다른 체제를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추후 두 인물을 다루며 더 자세히 해보겠습니다.
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를 거치며 일본은 규슈 남부와 혼슈 북동부까지 영역을 넓힙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중앙 정부는 권력 투쟁을 거치며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고, 이민족을 토벌하며 넓어진 영토에 자리 잡은 지방 무사들은 조금씩 힘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중앙 정부의 권력 투쟁에 지방 무사들이 끼어들게 되었고, 그중에서 최종 승자가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모토였습니다.
막부(幕府)는 장막 막에 마을 부자를 씁니다. 일본어로는 바쿠후(ばくふ)라고 읽습니다. 이 말은 본래 장군의 사령부를 가리키는 말로 고대 중국에서부터 사용된 말입니다. 여기서 사령부란 단순한 진영을 넘어 행정 조직을 갖춘 조직을 의미합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장군이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된 조직을 움직인다는 것은 반란의 위험을 내포하는 것이라 예로부터 부를 여는 권한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첫 번째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는 헤이안 시대 말기 중앙의 권력 투쟁을 정리하며 등장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천황에게 양위를 한 전대 천황인 상황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한국이나 중국에도 사례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방원의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실권을 내려놓은 입장이라 군주의 권위가 쪼개져서 충돌할 일이 적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상황이 실권을 쥔 상태로 양위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차기 계승에 개입하여 한 시대에 상황이 여럿 있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러다 보니 중앙 정치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지방의 무사들까지 중앙 권력 투쟁에 끼어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권력의 추는 중앙의 천황과 귀족들에게서 무사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다른 지방 무사들을 모두 꺾고 권력을 잡은 미나모토노 요리모토는 교토에 자리 잡는 대신 자신의 근거지인 가마쿠라로 돌아갑니다. 이미 가마쿠라에 휘하 무사들을 통치할 “막부”가 있는데, 굳이 교토로 옮겨 기반을 잃고 조정에 휘둘릴 필요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다른 무사들 위에 군림하기 위한 직위를 조정에 요청해 받았으니, 그 직위가 바로 정이대장군이었습니다. 이제 일본에 본격적인 막부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가마쿠라 막부가 처음부터 전국적인 지배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일본은 긴키 조정의 영향하에 있었고 막부의 지배력은 동일본에 한정되어 있던 것이지요. 하지만 조정과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원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며 막부의 영향력은 전일본에 미치게 됩니다.
하지만 미나모토노 요리모토 사후 막부의 실권은 정이대장군의 외척인 호조 가문에게 있었습니다. 미나모토노 요리모토 본인부터 처가의 힘을 바탕으로 천하를 통일했고, 막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형제를 모두 숙청하며 미나모노토 가문의 힘이 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호조 가문은 신분상 정이대장군에 오를 수는 없었지만, 막부의 섭정이라 할 수 있는 집권(執權, 일본어로 싯켄) 직을 독점하면서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막부 정치는 천황을 대신하는 정이대장군을 대신하는 집권이 실권을 가진 옥상옥의 구조였던 셈입니다.
가마쿠라 막부 말기에 접어들며 호조 가문도 가주가 실권을 잃고 가신들에게 권력이 넘어가면서, 권위가 약하던 막부 체계에 균열이 생깁니다. 또한 원나라의 침공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졌지만, 승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어전이라 무사들에게 나눠줄 땅이 없었기에 불만을 가진 무사들도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이 다시 통치하는 체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고다이고 천황은 수 차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호조 가문에 불만을 가진 무사들을 모아 마침내 막부를 타도합니다. 하지만 그가 꿈꿨던 천황 중심의 통치는 채 3년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힘을 빌려준 무사들의 생각은 달랐기 때문이지요. 그중에는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치도 있었습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처음부터 자신의 막부를 열 생각으로 막부 타도에 가담했습니다(족보상으로 그도 미나모토노 가문과 뿌리가 같은 명문가였습니다). 하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를 세워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아시카가는 독자적으로 군사를 움직여 반란을 꾀합니다. 한때는 천황군에게 쫓길 때도 있었지만, 결국 무사들의 지지를 받아 교토를 점령하고 고다이고 천황을 폐한 다음, 고묘 덴노를 세우고 그로부터 정이대장군에 임명되며 막부를 엽니다. 하지만 폐위된 고다이고 천황이 교토를 탈출하여 나라의 요시노에 새 조정을 세우면서 일본은 남북조시대에 접어듭니다.
위의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북조의 수도인 교토와 남조의 수도인 요시노는 매우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조는 남조를 쉽게 제압하지 못하고 남조에게 교토를 내주고 피난을 가는 일이 있을 정도로 일진일퇴를 거듭합니다. 본디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가문은 고다이고 천황 아래 호조 가문을 타도한 여러 세력 중 하나였기에 이에 맞설 다른 무사들이 건재하기도 했고, 막부 내부의 당파 갈등으로 인해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동생인 아시카가 타다요시가 남조로 항복할 정도로 막부 내부 정치도 혼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북조와 남조는 모두 지방 무사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세력이 큰 무사들을 포섭하기 위해 지방을 통치하고 세금을 거둘 권리를 주었으니 이 직책의 이름이 수호(守護, 일본어로 슈고)입니다. 슈고는 가마쿠라 시대에도 있던 직책이지만, 무로마치 시대의 슈고는 지방 행정관을 넘어 영주로 나아갈 수준의 권한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지역 세력을 흡수하며 훗날 슈고 다이묘가 되는 것입니다.
남북조시대를 종결한 것은 아시카다 다카우지의 손자인 아시카가 요시미츠였습니다. 남조의 기반인 규슈를 정벌하여 남조의 항복을 받아내며 할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일본 통일을 이뤘던 것입니다. 이때가 1392년으로 조선이 건국된 연도와 동일합니다. 이후 그는 명나라로부터 일본 왕으로 책봉받을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누리게 됩니다. 천황이 있지만,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정이대장군임을 명나라에게도 인정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후손 중 그만큼 정이대장군 다운 권력을 휘두른 인물은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 요시미츠도 슈고들을 견제하기 위한 직속 무력 기구를 설치했을 정도로 슈고들의 권력은 막강했고 막부의 의사결정도 슈고들의 합의로 정해졌습니다. 이러한 권력 구조는 훗날 있을 혼란의 씨앗과 같았습니다.
전국시대의 시작과 끝을 나누는 관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저는 1467년 오닌의 난부터 오사카 전투가 끝나는 1615년으로 잡고자 합니다. 148년이나 되는 기간인데, 이중 우리에게 친숙한 오다 노부나가 같은 인물들이 활약하는 시기는 1500년대 중반부터입니다.
오닌의 난은 정이대장군 가문과 슈고 가문의 후계자 문제로 발생한 전란입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정이대장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아들이 없어서 승려로 출가한 동생 요시미를 후계자로 정합니다. 이때 동생에게 설사 아들을 낳더라도 후계를 보장하겠다는 약속까지 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합니다. 이미 휘하의 가신단은 요시마사의 아들을 지지하는 파와 동생을 지지하는 파로 갈려있었고, 요시마사에게는 이들을 누를 권력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후계 문제는 정이대장군 가문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여러 슈고 가문에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고, 막부는 이러한 문제를 일관성 없게 처리하며 분쟁을 키우기만 했습니다. 오닌의 난은 막부의 권력뿐만 아니라 각 가문의 권력을 두고도 벌어진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교토로 상경한 무사들의 전쟁은 11년 동안이나 이어졌고, 전장이었던 교토는 수도의 영광을 잃고 황폐해집니다. 이로 인해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지방의 무사들은 독자적인 행보를 걷게 됩니다. 슈고가 교토에서 전쟁하는 사이 가신이 지역을 장악해 다이묘가 되는 하극상이 일어나고, 간토 지방에서는 지방 무사들끼리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바야흐로 전국시대가 개막된 것입니다.
전국시대는 슈고로 대표되는 기존 권력층이 몰락하고 상인이나 부농으로 대표되는 신흥 권력층이 부상하는 시기였습니다. 이들은 이전의 다이묘와는 다른 강한 권력을 가지고 영지를 다스렸고, 서로의 영지를 노리거나, 상위 다이묘를 하극상하고 그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전국시대에 부상한 이 신흥 다이묘들을 센고쿠 다이묘라고 부릅니다. 한편 일부 슈고 다이묘들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고 살아남아 센고쿠 다이묘가 되기도 했습니다.
위 지도는 전국시대 초기인 1477년의 세력도입니다. 다테나 시마즈처럼 에도 막부 시기까지도 살아남는 가문들도 있지만, 상당수의 가문이 전국시대를 거치며 하극상을 당하거나 다른 가문에게 멸문당해 사라집니다. 다음 시간에는 <세키가하라>에 등장하는 가문을 중심으로 전국시대의 흐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세키가하라 기획기사 1편 – 일본의 지리(2)
세키가하라 기획기사 2편 – 두 일본인 이야기
안녕하세요? [GM]찰리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일본의 야마토 시대부터 무로마치 막부시대까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야마토 시대는 야요이 시대 이후의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합쳐서 부르는 말로 이 시기의 국가인 야마토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과거에는 두 시대를 야마토 시대라는 말을 많이 썼지만, 오늘날에는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엄밀하게 구분하는 편입니다.
1. 야마토
야마토라고 하면 제 나이 또래의 분들은 대부분 이걸 먼저 떠올리실 겁니다. 스타크래프트에 나오는 배틀크루저의 특수 기술로 게임에서도 손꼽히는 최종병기급 기술이죠. 미국에서 만든 게임의 우주전함 기술 이름이 일본어인 야마토가 된 이유는 미국 제작진들이 애니메이션 우주전함 야마토에서 모티브를 따왔기 때문입니다.
(우주전함 야마토의 파동포)
우주전함 야마토는 일본 제국의 야마토급 전함의 1번함인 야마토를 우주전함으로 개조했다는 설정입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전함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지만, 우주전함 야마토의 주제는 반전과 평화입니다. 물론 야마토 전함이라는 상징의 의미와 특공 공격 미화와 같은 요소는 이 애니메이션을 우리 입장에서 편하게만 볼 수는 없게 만드는 요소이긴 합니다.
야마토급 전함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가장 거대한 전함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해군력은 한 나라의 국제적 영향력을 의미하며, 해군에서도 최강의 병기인 전함은 그 나라 해군력을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들은 최강의 전함을 만드는 경쟁을 했고 이러한 거함거포주의의 끝에 다다른 전함이 야마토급 전함인 것입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부터 해전의 주력은 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바뀌었고, 야마토 전함은 최종병기에 걸맞은 활약을 하지 못한 채 함재기들의 집중 공격을 받아 침몰합니다.
야마토급 전함의 이름은 일본의 율령국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율령국은 중국의 성이나 우리나라의 도 같은 개념이라 보시면 됩니다). 야마토는 지금의 나라현 일대에 설치된 율령국 야마토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지요. 일본의 고대국가 야마토의 발현지가 나라현 일대였기 때문에 일본에 율령제가 도입되면서 이 지역의 이름을 야마토로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명목상으로 율령국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해도, 일본 제국이 가장 자랑할만한 전함에 야마토라는 이름을 그 이유만으로 붙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야마토라는 말의 의미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일본인들이었을 테니까요. 고대국가 야마토는 오늘날 일본의 시초로 여겨지는 국가이며,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야마토 민족이라고 부릅니다.
야마토의 한자는 대화(大和)입니다. 일본어를 아시는 분들은 일본에서 한자를 읽는 방법에 소리를 읽는 음독과 뜻을 읽는 훈독이 있는데, 大和는 어떻게 읽어도 야마토로 읽을 수 없습니다. 이는 고대 일본인들이 스스로를 부르던 야마토라는 말을 왜나라 왜(倭) 자의 훈독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왜나라 왜자에 멸칭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소리가 비슷한 화할 화(和) 자로 순화하고 그 앞에 클 대(大) 자를 붙여 大化를 야마토의 표기로 사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왜=야마토라고 봐도 됩니다.
위 지도는 7세기 경의 야마토의 영역입니다. 한반도가 삼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야마토는 한반도의 국가들과 교류하며 주변 세력을 복속시켰습니다. 이 시기에 야마토는 주로 백제나 가야와 교류하고 신라와 적대했는데, 신라에 왜구가 침범했을 뿐만 아니라 신라 또한 왜국을 침공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국지전 이외에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에 왜국이 개입하거나, 일본에서 벌어진 전쟁에 한반도 국가가 개입했던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이 시기의 한반도와 일본은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아스카 시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야마토는 본격적인 중앙집권형 국가로 나아갑니다. 이 시기의 개혁을 주도한 인물이 쇼토쿠 태자였습니다. 쇼토쿠 태자는 당시 왕위계승서열 1위에 섭정직을 수행한 당대의 실권자였습니다. 그는 수나라와 한반도 국가들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불교를 진흥하고 유교를 받아들였고, 관직을 비롯한 법체계를 정립했습니다.
이후 한 세대가 지난 673년에 즉위한 덴무 천황은 군주의 호칭을 이전의 대왕(오키미)에서 천황으로 바꿉니다. 국명을 야마토에서 일본으로 바꾼 것도 이 시기로 여겨집니다. 덴무 천황은 정변으로 정권을 잡아 일본사에 유례없을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군주였기에 칭호와 국명을 비롯한 다양한 개혁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서기의 편찬도 덴무 천황의 지시로 시작되었는데, 학문적인 의미라기보다는 현 천황가 정권의 역사적 정당성을 답보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작업이었습니다. 이것이 일본서기의 고대사 부분의 기록이 신뢰성이 낮은 이유입니다. 학자가 학문적인 목적으로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와는 편찬 목적이 달랐던 것이지요.
2. 쇼군
쇼군은 장군(將軍)의 일본식 독음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쇼군이라고 말하는 막부 수장의 정식 명칭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 일본어로는 세이이타이쇼군이라고 부릅니다. 정이(征夷)라는 말은 이민족을 정벌한다는 말로, 이 직책은 본디 혼슈 북동부나 규슈 남부의 이민족들을 정벌하는 대장군의 직책이었습니다. 장군의 직책명은 어디를 치느냐에 따라 정동장군(征東將軍)이나 정서장군(征西將軍)과 같은 명칭이나 정이장군으로도 불리기도 했습니다.
정이대장군은 천황의 군권을 위임받아 지휘하는 직책이기 때문에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직책이 아니었고 황실 방계의 무가 가문이 맡았습니다. 정이대장군이라는 직책의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제 아무리 실권자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쇼군의 자리에 오를 수는 없었습니다. 정이대장군도 천황만큼이나 신분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황실 방계를 참칭 할 수 없을 만큼 천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이대장군을 칭할 수 없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원래의 마쓰다이라 성에서 조정으로부터 받은 도쿠가와성으로 개성 하면서 황실 방계 가문 족보에 편입되었기에 정이대장군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패권을 잡은 후 막부를 열었지만, 히데요시는 이전과는 다른 체제를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추후 두 인물을 다루며 더 자세히 해보겠습니다.
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를 거치며 일본은 규슈 남부와 혼슈 북동부까지 영역을 넓힙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중앙 정부는 권력 투쟁을 거치며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고, 이민족을 토벌하며 넓어진 영토에 자리 잡은 지방 무사들은 조금씩 힘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중앙 정부의 권력 투쟁에 지방 무사들이 끼어들게 되었고, 그중에서 최종 승자가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모토였습니다.
3. 막부
막부(幕府)는 장막 막에 마을 부자를 씁니다. 일본어로는 바쿠후(ばくふ)라고 읽습니다. 이 말은 본래 장군의 사령부를 가리키는 말로 고대 중국에서부터 사용된 말입니다. 여기서 사령부란 단순한 진영을 넘어 행정 조직을 갖춘 조직을 의미합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장군이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된 조직을 움직인다는 것은 반란의 위험을 내포하는 것이라 예로부터 부를 여는 권한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첫 번째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는 헤이안 시대 말기 중앙의 권력 투쟁을 정리하며 등장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천황에게 양위를 한 전대 천황인 상황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한국이나 중국에도 사례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방원의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실권을 내려놓은 입장이라 군주의 권위가 쪼개져서 충돌할 일이 적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상황이 실권을 쥔 상태로 양위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차기 계승에 개입하여 한 시대에 상황이 여럿 있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러다 보니 중앙 정치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지방의 무사들까지 중앙 권력 투쟁에 끼어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권력의 추는 중앙의 천황과 귀족들에게서 무사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다른 지방 무사들을 모두 꺾고 권력을 잡은 미나모토노 요리모토는 교토에 자리 잡는 대신 자신의 근거지인 가마쿠라로 돌아갑니다. 이미 가마쿠라에 휘하 무사들을 통치할 “막부”가 있는데, 굳이 교토로 옮겨 기반을 잃고 조정에 휘둘릴 필요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다른 무사들 위에 군림하기 위한 직위를 조정에 요청해 받았으니, 그 직위가 바로 정이대장군이었습니다. 이제 일본에 본격적인 막부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가마쿠라 막부가 처음부터 전국적인 지배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일본은 긴키 조정의 영향하에 있었고 막부의 지배력은 동일본에 한정되어 있던 것이지요. 하지만 조정과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원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며 막부의 영향력은 전일본에 미치게 됩니다.
하지만 미나모토노 요리모토 사후 막부의 실권은 정이대장군의 외척인 호조 가문에게 있었습니다. 미나모토노 요리모토 본인부터 처가의 힘을 바탕으로 천하를 통일했고, 막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형제를 모두 숙청하며 미나모노토 가문의 힘이 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호조 가문은 신분상 정이대장군에 오를 수는 없었지만, 막부의 섭정이라 할 수 있는 집권(執權, 일본어로 싯켄) 직을 독점하면서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막부 정치는 천황을 대신하는 정이대장군을 대신하는 집권이 실권을 가진 옥상옥의 구조였던 셈입니다.
가마쿠라 막부 말기에 접어들며 호조 가문도 가주가 실권을 잃고 가신들에게 권력이 넘어가면서, 권위가 약하던 막부 체계에 균열이 생깁니다. 또한 원나라의 침공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졌지만, 승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어전이라 무사들에게 나눠줄 땅이 없었기에 불만을 가진 무사들도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이 다시 통치하는 체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4. 남북조시대와 무로마치 막부
고다이고 천황은 수 차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호조 가문에 불만을 가진 무사들을 모아 마침내 막부를 타도합니다. 하지만 그가 꿈꿨던 천황 중심의 통치는 채 3년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힘을 빌려준 무사들의 생각은 달랐기 때문이지요. 그중에는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치도 있었습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처음부터 자신의 막부를 열 생각으로 막부 타도에 가담했습니다(족보상으로 그도 미나모토노 가문과 뿌리가 같은 명문가였습니다). 하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를 세워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아시카가는 독자적으로 군사를 움직여 반란을 꾀합니다. 한때는 천황군에게 쫓길 때도 있었지만, 결국 무사들의 지지를 받아 교토를 점령하고 고다이고 천황을 폐한 다음, 고묘 덴노를 세우고 그로부터 정이대장군에 임명되며 막부를 엽니다. 하지만 폐위된 고다이고 천황이 교토를 탈출하여 나라의 요시노에 새 조정을 세우면서 일본은 남북조시대에 접어듭니다.
위의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북조의 수도인 교토와 남조의 수도인 요시노는 매우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조는 남조를 쉽게 제압하지 못하고 남조에게 교토를 내주고 피난을 가는 일이 있을 정도로 일진일퇴를 거듭합니다. 본디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가문은 고다이고 천황 아래 호조 가문을 타도한 여러 세력 중 하나였기에 이에 맞설 다른 무사들이 건재하기도 했고, 막부 내부의 당파 갈등으로 인해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동생인 아시카가 타다요시가 남조로 항복할 정도로 막부 내부 정치도 혼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북조와 남조는 모두 지방 무사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세력이 큰 무사들을 포섭하기 위해 지방을 통치하고 세금을 거둘 권리를 주었으니 이 직책의 이름이 수호(守護, 일본어로 슈고)입니다. 슈고는 가마쿠라 시대에도 있던 직책이지만, 무로마치 시대의 슈고는 지방 행정관을 넘어 영주로 나아갈 수준의 권한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지역 세력을 흡수하며 훗날 슈고 다이묘가 되는 것입니다.
남북조시대를 종결한 것은 아시카다 다카우지의 손자인 아시카가 요시미츠였습니다. 남조의 기반인 규슈를 정벌하여 남조의 항복을 받아내며 할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일본 통일을 이뤘던 것입니다. 이때가 1392년으로 조선이 건국된 연도와 동일합니다. 이후 그는 명나라로부터 일본 왕으로 책봉받을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누리게 됩니다. 천황이 있지만,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정이대장군임을 명나라에게도 인정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후손 중 그만큼 정이대장군 다운 권력을 휘두른 인물은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 요시미츠도 슈고들을 견제하기 위한 직속 무력 기구를 설치했을 정도로 슈고들의 권력은 막강했고 막부의 의사결정도 슈고들의 합의로 정해졌습니다. 이러한 권력 구조는 훗날 있을 혼란의 씨앗과 같았습니다.
5. 전국시대
전국시대의 시작과 끝을 나누는 관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저는 1467년 오닌의 난부터 오사카 전투가 끝나는 1615년으로 잡고자 합니다. 148년이나 되는 기간인데, 이중 우리에게 친숙한 오다 노부나가 같은 인물들이 활약하는 시기는 1500년대 중반부터입니다.
오닌의 난은 정이대장군 가문과 슈고 가문의 후계자 문제로 발생한 전란입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정이대장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아들이 없어서 승려로 출가한 동생 요시미를 후계자로 정합니다. 이때 동생에게 설사 아들을 낳더라도 후계를 보장하겠다는 약속까지 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합니다. 이미 휘하의 가신단은 요시마사의 아들을 지지하는 파와 동생을 지지하는 파로 갈려있었고, 요시마사에게는 이들을 누를 권력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후계 문제는 정이대장군 가문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여러 슈고 가문에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고, 막부는 이러한 문제를 일관성 없게 처리하며 분쟁을 키우기만 했습니다. 오닌의 난은 막부의 권력뿐만 아니라 각 가문의 권력을 두고도 벌어진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교토로 상경한 무사들의 전쟁은 11년 동안이나 이어졌고, 전장이었던 교토는 수도의 영광을 잃고 황폐해집니다. 이로 인해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지방의 무사들은 독자적인 행보를 걷게 됩니다. 슈고가 교토에서 전쟁하는 사이 가신이 지역을 장악해 다이묘가 되는 하극상이 일어나고, 간토 지방에서는 지방 무사들끼리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바야흐로 전국시대가 개막된 것입니다.
전국시대는 슈고로 대표되는 기존 권력층이 몰락하고 상인이나 부농으로 대표되는 신흥 권력층이 부상하는 시기였습니다. 이들은 이전의 다이묘와는 다른 강한 권력을 가지고 영지를 다스렸고, 서로의 영지를 노리거나, 상위 다이묘를 하극상하고 그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전국시대에 부상한 이 신흥 다이묘들을 센고쿠 다이묘라고 부릅니다. 한편 일부 슈고 다이묘들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고 살아남아 센고쿠 다이묘가 되기도 했습니다.
위 지도는 전국시대 초기인 1477년의 세력도입니다. 다테나 시마즈처럼 에도 막부 시기까지도 살아남는 가문들도 있지만, 상당수의 가문이 전국시대를 거치며 하극상을 당하거나 다른 가문에게 멸문당해 사라집니다. 다음 시간에는 <세키가하라>에 등장하는 가문을 중심으로 전국시대의 흐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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