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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게시판 > 업무시간에 쓰는 미스터리와 미스터리 게임 이야기 4
  • 2022-04-08 15:54:29

  • 13

  • 1,020

Lv.31 Van.D.Z

안녕하세요. 이 회사에서 나의 경쟁력은 무엇인가 고민하던 중 어째서인지 이 시리즈 밖에 살 길이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Van(lv.14, 월급탐정)입니다. 오랜만에 본편입니다. 이제 이 시리즈가 제 연봉을 올릴 것인가 내릴 것인가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3편[링크]에서는 1860년과 1897년을 경과하며 이런 기호와 파티 문화가 결합해 원시적인 형태의 미스터리 파티 게임들이 탄생했다는 점을 언급했었죠. 그리고 그런 게임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윙크 살인’과 ‘어둠 속의 살인사건’의 규칙을 소개했습니다. (참조: 19세기말~20세기초의 원시적 추리 게임 규칙 소개) 이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기 전에, 잠깐 좀더 미래로 뛰어넘어가 보겠습니다. 안심하세요. 다음편에서는 다시 20세기 초반으로 돌아올 테니까요.


자, 이제 20세기 초중반, 아마도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영미권에서는 ‘머더 미스터리 파티’가 여기저기서 열리기 시작합니다. 네. 말 그대로 살인사건 가장 파티인 셈입니다. 머더 미스터리 파티라는 건 기본적으로(최소한 20세기에는) 살인사건을 테마로 준비한 하나의 이벤트, 혹은 사교의 장소, 팀워크를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소풍에서 가끔 하는 보물찾기 같은 것이며, 신입사원 워크샵에서 가끔하는 팀빌딩 게임 같은 것입니다. ‘머더 미스터리 파티’라는 용어를 가장 적절하게 의역하자면 ‘탐정 파티’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이런 거랑 비슷합니다.


상상해봅시다. 파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주어진 드레스 코드에 맞춰 차려 입고 파티장에 모입니다. 파티장은 어딘가의 커다란 홀, 아니면 누군가의 큰 저택. 모이는 인원은 적으면 8명 정도, 많으면 50명 정도. 사람들이 모이고 나면 주최자의 진행에 따라서 각각 정해진 배역을 받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정해진 시각까지 자유롭게 파티를 즐기면서 단서를 찾아내고, 범인을 추리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절묘한 사교행사가 되더란 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전원이 탐정입니다.(누군가는 탐정인 척 하는 범인이겠지만) 탐정이 진실에 다가가려면 최대한 많은 사람을 취조해야겠지요? 그러니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게 전혀 주저되거나 어색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취조를 당하는 입장에서도, 자신이 의심받지 않으려면 최대한 적극적으로 대화에 응해야 합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대화를 걸고, 적극 서로를 받아주며, 많은 것들을 자연스레 서로 묻고 답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겁니다.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고요! 물론 게임에 따라서는 시체 역할을 참가자 중 한명이 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은 틀림없이 소외될 수 있습니다. 파티가 끝나고 모두가 하하호호 2차를 떠나는 와중에 그 사람 혼자 외로이 앉아 쓰게 식은 커피를 마시며 인생의 부조리와 시간의 비가역성에 대해 끝없는 철학적 사유를 펼치게 되겠죠. 어쨌거나 이 머더 미스터리 파티라는 것은 실패율이 매우 낮은 사교 행사였습니다. 물론 당신이 탐정소설이나 스릴러 영화의 등장인물이라면 아무리 친구가 필요해도 저런 파티에는 결코 가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진짜 살인사건이 일어날 테니까요.

 

이미지: 피해자 역할이 주로 하는 일.


그런데 이 머더 미스터리 파티에는 때때로 모든 참가자를 위한 스크립트, 즉 대본이 준비되어 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대본에 명시되지 않은 일은 자유롭게 하되, 대본에 명시되어 있는 일은 반드시 해야하는 겁니다. 이 대본이 간단한 경우에는 그 캐릭터가 지금까지 했던 일들이 과거 시점으로 적혀있는 정도지만, 자세한 경우에는 미래 시점, 즉 몇 시에 어디로 가야하며 어디로 이동해야 하고, 누구와 이야기해야 하는지까지 적혀있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사건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파티 중간에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여러분이 추리소설이나 만화에서 자주 보게 되는 머더 미스터리 파티는 대부분 후자의 형태를 묘사하고 있을 겁니다.) 이런 형식일 경우에는 대개 피해자 역에게도 스크립트가 따로 있어서, 죽기 전까지는 스크립트에 따라서 행동해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다른 참가자들은 짜여진 동선에 따라 목격해야 할 것을 목격하게 되고, 해야 할 일을 하게 되겠죠. 자, 스크립트가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준비할 것은 많아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면 되게 재밌더란 말이죠. 이제 머더 미스터리라는 것은 두가지 갈래로 분화됩니다. 긴 시간을 들여 준비하고 더 깊이 빠져들 수 있는 시나리오 방식, 최소한의 것만 빠르게 준비하고 즉흥적으로 즐길 수 있는 방식. 이렇게요. 윙크 살인이 아직까지 살아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와중에 세계대전이 터집니다. 1940년 경에는 영국 대공습까지 일어나죠. 한가하게 머더 미스터리 파티 같은 걸 했다간 모두 함께 끔살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연스럽게 파티는 줄어들고 명맥이 끊기게 되죠. 이 와중에 파티에 가고 싶어서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한 파티광이 만든 게임이 바로 ‘클루’입니다. 최소한의 공간에서 최소한의 인원으로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축소한 거죠. 물론 이 이전에도 머더 미스터리 게임을 상업 보드게임에서 구현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그 이야기를 지금 하면 일부러 시간을 미래로 땡긴 이유가 없어지므로 다음다음편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가 되면서 진정한 의미의 현대가 시작됩니다. 최소한 영국에서는요. 그리고 이 시대를 거치며 머더 미스터리 파티는 조금씩 분업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파티를 설계하는 사람과 파티를 주최하고 향유하는 사람이 점점 나뉘기 시작하죠. 그리고 1980년대를 전후해 박스 형태의 머더 미스터리 파티 키트가 등장합니다. 박스 안에는 스크립트와 매뉴얼이 들어있죠. 주최자는 이 박스 안에 있는 내용물을 모두 읽고…잠깐! 스포일러 위험은 없나요? 이쯤에서 오해를 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머더 미스터리 게임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아마 대부분 동아시아, 아마도 많은 경우 일본이 출처일 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런 게임들(서스펙트 게임을 포함해서)은 원래 의미 그대로의 머더 미스터리 게임이라기보다는, 머더 미스터리 게임을 하는 흉내를 내기 위한 보드게임에 가깝습니다. 카트라이더 레이싱 게임이라는 우리 회사의 신작 보드게임(사장님 보고계시죠?!)이 진짜 카트라이더가 아닌 것처럼요!(어?) 

 

(이 글을 읽은 당신은 카트라이더 레이싱 게임이 사고 싶어집니다)


앞에서 최초의 상업적 머더 미스터리 게임의 시도에 대한 부분은 건너뛰면서 클루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한 이유가 있습니다. 보드게임 형태로 구현된 머더 미스터리 게임은, 실은 클루와 같은 줄기라는 겁니다. 이런 게임들이 일본에서 더 자주 보이는 데는 아주 단순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은 퍼즐 미스터리(선후관계가 꼬이지만 퍼즐 미스터리가 무엇인지는 다음편에 설명하겠습니다.)의 천국입니다. 머더 미스터리 파티 문화가 정착되기엔 본토보다 훨씬 좋은 환경이죠.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서양식 저택이 없습니다! 집이 좁아요! 세상 그 누구보다도 게임을 하고 싶지만 할 수가 없습니다. 일본의 미스터리 광들이 서양식 저택을 얼마나 선망하는지, 그리고 머더 미스터리 게임을 얼마나 갈망하는지는 일본 탐정소설이나 기타 창작물에서 직접적 간접적으로 많이 드러납니다. 특히 우타노 쇼고의 단편집인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의 마지막 에피소드 ‘관館(여기서는 서양식 대저택을 뜻함)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라는 작품은 그 이룰 수 없는 낭만을 잘 표현했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배경 자체가 머더 미스터리 게임을 하는 내용이라 실제로 이런 게임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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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지만 어느 정도는 마니아 상식을 기반으로 깔고 있기 때문에 초심자에겐 추천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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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야기가 돌아옵니다. 자 이 박스형 키트라는 것은 파티를 주최하는 호스트를 위해 준비된 매뉴얼 및 준비물입니다. 게임을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어떤 경우엔 어떻게 대처하고 유도해야 하는지 적혀 있는 물건이죠. 경우에 따라서는 적절한 추가 상품(분장이라거나 공간구성 키트 같은)들이 붙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훨씬 나중의 일입니다. 1980년이라는 시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시기는 컴퓨터가 일반에 보급되던 시기입니다. 그리고 이 키트의 주된 구성은, 텍스트입니다. 구상과 설계가 가능하다면 누구나 집에서 키트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파티를 원하는 호스트들은 그렇게 제작된 키트를 사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키트를 만들어 그런 사람들에게 알음알음 판매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PC통신이, 인터넷이 보급됩니다. 컴퓨터 통신망의 등장은, 개인 판매자들의 유통경로를 확보해주었고 점점 전문적으로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 경, 전문적으로 머더 미스터리 게임 키트를 만들어 파는 회사가 생겨났으니 그것이 바로 레드 해링, 즉 훈제 청어라는 회사입니다.(심지어는, 21세기부터는 배우들을 고용해 연기가 필요한 역할을 맡기고 참가자들은 순수하게 탐정 역할만 하는 대형 이벤트도 발전했으며, 전문 회사에서 아예 이 배우 파견을 옵션으로 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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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왜 이름이 훈제 청어냐고요? 훈제 청어는 “눈을 딴 데로 돌리게 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이는데요, 훈제 청어의 냄새로 사냥개를 홀려서 목표물을 놓치게 만드는 장면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훈제 청어라는 단어는 고전 미스터리에서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하나는 퍼즐미스터리의 작법 중 한가지를, 또 하나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여기서 어 난 읽었는데 왜 모르지?하신다면 다시 읽으실 때가 된 겁니다.)입니다. 자 2007년에 세워진 회사(여전히 운영중입니다)의 이름이 1900년대 초반의 상징들을 가리킨다는 것, 그 자체는 우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우연이 상징하는 바는 참으로 그럴듯합니다. 1900년대 초반으로 다시 돌아가봅시다. 미스터리가 규칙을 갖추기 시작한 시대, 그리고 아가사 크리스티를 포함해 도저히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물론 판매량으로는 우월을 가릴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미스터리의 역사를 쥐고 흔들었던 천재 미스터리 작가들이 두세명도 아니고 열댓명이나 한꺼번에 등장했던 시대로 말이죠.
 


목차

업무시간에 쓰는 미스터리와 미스터리 게임 이야기 1 [링크]: "에드가 앨런 포는 가난하게 죽었다"
업무시간에 쓰는 미스터리와 미스터리 게임 이야기 2 [링크]: "이스라엘 씨는 영국 사람"
  -번외: 19세기말~20세기초의 원시적 추리 게임 규칙 소개 [링크]
업무시간에 쓰는 미스터리와 미스터리 게임 이야기 3 [링크]: "천딸라!"

  - 번외: 창작물 속 명탐정의 명대사들[링크]

업무시간에 쓰는 미스터리와 미스터리 게임 이야기 4 [현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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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루
    Clue (1949)
    • Peter Dobbin, René Goscinny, Matt Groening, Rune Johansson, Henning Ludvigsen, Stephen Millingen, Anthony E. Pratt, Drew Struzan, Albert Uderzo, Urs Waldvogel
11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Lv.31 정서희
    • 2022-04-08 16:12:04

    넘 흥미진진해요 +_+
    • Lv.47 폭풍먼지
    • 2022-04-08 16:32:54

    조금.. 시고싶어졌습니다 카트라이더!!!
    • Lv.31 Van.D.Z
    • 2022-04-08 16:50:03

    • Lv.47 폭풍먼지
    • 2022-04-08 19:18:32

    아니 진짜네요 ㄷㄷ;;;;
    전 파슈를 기다립니다.;;;;;;
    • 스태프 [GM]찰리
    • 2022-04-08 18:06:16

    이제 일상으로의 복귀가 시작되고 있으니 원조 머더 미스테리 게임도 조직해서 해보고 싶네요.
    • Lv.47 채소밭
    • 2022-04-08 19:55:14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 Lv.19 그라운
    • 2022-04-08 21:55:29

    너무 좋습니다.
    • Lv.21 doerui
    • 2022-04-10 00:14:35

    시리즈 재밌어요ㅎㅎㅎ
    • Lv.42 아따기야
    • 2022-04-10 06:27:56

    와우... 정말 시대상이랑 보드게임, 문학작품까지 아우르는 내용이라 너무 흥미진진하네요. 이런 여러가지 분야를 연결시키시는대에서 통찰력마저 느껴집니다. 훈제청어는 노래에 나왔었는데 그런 뜻이었군요 ㅎㅎ
    클루가 추억보정으로 인생게임인데 머더미스터리의 정말 단순화된 보드게임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보입니다. 각종 과정을 뺀 단순 소거만 남은 게임이군요..
    일본이 본토보다 더 머더 미스터리류가 적격인 이유가 궁금하네요. 어떤 특성 때문인지..
    1일 1월루 부탁드립니다!
    • Lv.31 Van.D.Z
    • 2022-04-10 11:16:27

    그게 대체 무슨 노래죠???!
    • Lv.12 프로젝트고구마
    • 2022-11-17 17:17:27

    뒤늦게 읽고있습니다만, 정말 재밌습니다.
    다음편 얼른 읽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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