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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시간에 쓰는 미스터리와 미스터리 게임 이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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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1 12:5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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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31 Van.D.Z
안녕하세요 월요병의 화신이자 정상적인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의 구도자, 팀 서스펙트의 직원1, Van(lv.8, 월급도적)입니다.
오늘도 지난 번에 이어 미스터리와 미스터리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지난 회의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게시물 맨 아래의 목차 링크를 확인해주세요. 물론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바쁘신 분들을 위한 한줄 요약도 있습니다.
지난 회 줄거리 한줄 요약: 이스라엘씨는 영국 사람
미스터리 게임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본격적인 범죄 및 탐정 롤플레잉 게임이라는 것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자 여러분 탐정 소설이라는 장르가 태어나고 스코틀랜드야드의 탐정 분과(여기서는 Detective를 일괄적으로 '탐정'이라고 표현하도록 하겠습니다.)가 현실에 등장하면서 이 미스터리 게임의 토양이 갖춰졌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쭉 설명한 바입니다.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생기고 탐정이 생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탐정 놀이가 시작되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놀이라는 건 좀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등장하지 않는 법입니다.
놀이, 특히 대부분의 게임이라는 것은 뿌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아주 신박해보이는 놀이가 어느날 훅 세상에 등장한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여러가지 놀이가 서로 합쳐지고 고쳐지면서 새로운 놀이로 변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누군가가 '놀이가 있으라'라고 말해서 시작된 게 아니란 말이죠. 상용 보드게임들 대부분이 그렇듯이요. 그런데, 놀이는 놀이에 의해서만 발전하지 않습니다. 놀이가 영유하는 역사가 길어질 수록, 다른 것들이 놀이에 영향을 끼칩니다.
잠깐 이 얘기를 해볼까요? 대한민국의 국민 보드게임이라고 하면 뭐가 생각나십니까? 누군가 사자턱이라고 댓글을 달 것 같긴 합니다만 정답은 우리 모두 알고 있죠. 고스톱입니다. 규칙과 족보가 굉장히 복잡하지만 아마도 대한민국 사람 중 반 정도는 그 족보를 줄줄 꿰고 있고, 어디서나 쉽게 판을 벌일 수 있는 게임이죠. 고스톱의 원형은 일본의 코이코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화투가 국내에 들어온 것은 일본 강점기 전후 즈음, 적어도 을사조약 이전인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만 고스톱이라는 놀이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1960년대~70년대쯤에는 이미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짐작은 고스톱 규칙이 변형된 역사로부터 비롯됩니다. 고스톱은 코이코이에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코이코이와는 이미 다른 게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6~70년대부터 200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잔규칙이 붙었기 때문이죠. 그 잔규칙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고스톱은 놀이가 진화하는 과정을 생각하기에 참 좋은 표본이라 하겠습니다. 사사오입 고스톱, 총통 룰, 전두환 싹쓸이 등, 국가 정국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그에 따라 바뀌어온 것이 고스톱이기 때문입니다.
게임은 사회적 놀이입니다. 게임은 게임일 뿐이라고 외치는 수많은 애호가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애시당초 사회와 게임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게임은 그 시대의 문화와 상식과 사건들을 먹고 자랍니다. 미스터리 게임도 그랬습니다. 다시 19세기 영국으로 돌아가봅시다. 롱 어고, 파 파 어웨이, 인 사우스웨스트잉글랜드...
1860년, 영국 사우스웨스트잉클랜드의 월트셔주의 지체높은 신분의 가족이 살던 어느 저택. 이 저택의 옥외 화장실에서 시체가 발견됩니다. 피해자는 3살의 남아 프랜시스 새빌, 바로 이 저택의 주인 새뮤얼 새빌 켄트의 아들이었습니다. 시체는 가슴과 손, 특히 목이 깊게 베인 상태였고, 피해자가 실종된 시간에는 저택 문이 안에서 잠겨 있었습니다. 즉, 외부인의 범행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클로즈드 서클 사건이 현실에서 일어난 셈입니다. 이 사건은 '로드 힐 하우스 살인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화제가 되었습니다.
지역 경찰이 곧바로 수사에 나섰지만, 초기에는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로드 힐 하우스는 새뮤얼 새빌의 자녀 7명에다가 하인과 요리사 보모 등이 입주한 대저택이었습니다. 내부인이라고 해봤자 내부인이 너무 많았죠. 게다가 그만한 대저택이라는 건 또 그만한 신분을 보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시만해도 노동계급에 속했던 경찰이 함부로 집을 수색하거나 용의자를 족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수사 방향도 당연하게 그런 조건들의 영향을 받습니다. 경찰은 감히 지체 높은 분들에게 혐의를 돌리지 못했고, 결국 보모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피해자에게 들키는 바람에 입막음을 위해 살해했다는 의심을 씌우기까지 합니다. 세간에서도 신문의 보도를 보면서 이런 저런 추측을 하기 시작하죠. 추측은 루머가 되고, 루머는 진실처럼 받아들여집니다. 더 자극적이고 더 괴상한 가설이 인기를 끌고 경찰은 제자리돌기만 할 뿐입니다. 이 사건은 급기야 19세기 영국의 마블 유니버스 같은 위상을 지니게 됩니다. 상황이 이쯤 되자 '탐정'이 등장합니다. 네. 바로 스코틀랜드 야드의 탐정 분과 초기 멤버인 잭 위쳐 경감입니다.
탐정으로서 수많은 실적을 쌓아 '탐정의 왕자'라고까지 불렸던 유명한 탐정 잭 위처는 곧바로 이 저택 주인의 가족들부터 들쑤시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전까지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비밀들, 즉 가족간의 불화가 세간에 드러납니다. 당시 새뮤얼의 부인은 세번째로 얻은 부인이었습니다. 이 셋째 부인은 원래 자녀들의 가정교사였는데, 둘째부인이 살아있을 때부터 이미 공공연한 사실혼 관계나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둘째부인은 원래 첫째부인 자녀들의 보모였는데, 새뮤엘은 역시나 이 첫째부인이 죽어가는 동안 이 둘째부인과 불륜 중이었습니다. 둘째부인의 자녀들이 셋째부인에게 호감을 가질리가 없었고, 첫째부인의 자녀들은 이미 집안에서 하인 수준으로 차별대우를 받고 있어 집안 전체에 갈등이 충만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피해자는 셋째부인의 아들이었죠. 베일에 싸인 대저택의 비밀들이 드러나자, 세간은 들썩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식사자리에서, 언론사를 향해 보내진 출처를 알 수 없는 투서에서 온갖 가설이 흘러넘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가장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가설은, 새뮤엘이 이번에도 새로운 보모와 불륜을 저지르다가 아들의 목격으로 성관계가 중단되자 분노해서 죽였다는 설이었습니다.
조사 결과 잭 위쳐는 새뮤얼의 딸 콘스탄스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콘스탄스는 무혐의로 풀려나지만 5년 후 그녀 자신의 자발적 자백에 따라 감옥에 가게됩니다. 하지만 사건은 마무리되었어도 여전히 사람들은 '추리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콘스탄스가 범인이 아니라는 가설을 경쟁적으로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집안을 지키기 위해 콘스탄스가 희생양이 되었다는 식의 음모론을 필두로 말이죠. 그리고 이런 음모론을 다룬 책들이 계속 쏟아져나왔고, 이런 책들은 다시 저녁식탁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토록 열띄게 추리하게 된 것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소재의 자극성과 탐정의 등장, 둘째는 신문/출판시장의 경쟁적이고 자극적인 보도, 셋째는 법정에서조차 노동계급인 경찰이 높은 신분의 저택을 함부로 뒤진 것을 비난하는 사회적 기울기. 그리고 이 사건으로 사람들은 음모론의 재미를, 그리고 언론은 음모론의 시장성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시기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영국에서 수많은 사립탐정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후, 영국보다 더 큰 땅덩어리에서 국가규모의, 이번엔 좀더 게임으로서 구체화된 추리게임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1897년 미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해, 뉴욕에서 토막난 시체가 발견됩니다. 곳곳에서요. 서울로 비유하면 팔은 잠실에서, 다리는 종로에서, 머리는 대치동에서 발견되는 식입니다. 뉴욕의 양대 신문인 <뉴욕 저널>과 <뉴욕 월드>는 이 사건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의 보도에서 승리하면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이른바 타블로이드 전쟁의 시작입니다.
황색 언론은 경쟁사보다 빨리 자극적인 보도를 하기 위해 경찰의 수사를 방해하기도 했으며, 상대 언론사에 침입하거나 전화선을 끊어놓기도 했습니다. 증거물 조작은 일도 아닙니다. 대중에게 흘러들어가는 소식은 대부분 경찰이 아니라 언론이 발표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게임이 시작됩니다.
"토막 살인 사건의 미스터리를 풀어낸 독자에게 500달러의 포상금을 드립니다"
뉴욕저널의 이 기사가 나간 직후, 뉴욕월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있었습니다.
"1,000 달러"
수많은 사람들이 "클루!"를 외치며 신문사로 투서를 보냈고, 사람들은 어디서나 그 "문제"에 대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사건이 종결된 이후에도 언론은 게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소재를 찾고, 설문조사와 공모전을 벌였습니다. 사람들도 그것을 좋아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인 파티에서는 간단한 범인 찾기 게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1860년과 1897년을 경과하며 이런 기호와 파티 문화가 결합해 원시적인 형태의 미스터리 파티 게임들이 탄생합니다. 아래 링크에서 소개한 어둠 속의 살인사건, 윙크 살인 등이 대표적입니다.
[링크]19세기말~20세기초의 원시적 추리 게임 규칙 소개
하지만 이것은 현대적인 미스터리 게임에 충분히 가까워지기 전의 일입니다. 당시의 미스터리 게임은 우연에 더 많이 기댔고, '문제'의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미스터리 게임의 다음 단계는 20세기 중반에 가까워져서야 찾아옵니다. 그것은 수많은 천재작가들이 쏟아져나오며 탐정 소설의 '게임으로서의 가치'를 확립해가던, 탐정소설의 황금기 이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기서 간단한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책을 팔아낸 소설가는 누구일까요?
목차
업무시간에 쓰는 미스터리와 미스터리 게임 이야기 1 [링크]
업무시간에 쓰는 미스터리와 미스터리 게임 이야기 2 [링크]
-번외: 19세기말~20세기초의 원시적 추리 게임 규칙 소개 [링크]
업무시간에 쓰는 미스터리와 미스터리 게임 이야기 3 [현재 게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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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라는 분이 기네스북에 올라있으시네요. ㄷㄷ 20억부 이상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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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댓글이 정답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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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추 갑니다. 선후 후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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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펙트 게임으로 미스터리쪽에 입문한 사람입니다. 이런 글 너무 좋아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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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펙트 게임 덕에 미스터리 세계로 입문하셨다니 미스터리 전도사로서 이보다 기쁜 일이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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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애거서 크리스티가 등장하는군요! 언론과 미스터리라는 키워드를 보니 한참 후의 이야기겠지만 조디악 사건두 생각나구요! 너무 재밌게 읽고있습니당 ㅎㅎ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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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미스터리 게시판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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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잘 보았습니다. 흥미진진하군요. 추리의 역사가 생각보다 길지 않다는걸 오늘 보면서 또 느낍니다.
보수적이었다거나.. 클래식했다고 해야하나.. 뭔가 그런 가십 주제도 억압된 사회에서
추리는 현실과 상상을 오가는 위험한 놀이같은것이었다는 느낌이네요. 다음글도 얼른 부탁드립니다 ㅎㅎ -
오...애거서 크리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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