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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펙트 게임> 개발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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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0 07:4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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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GM]신나요
[코리아보드게임즈 웹진 원문 바로가기]
2017년~2019년 보드게임계에는 몇 가지 파격적인 화두가 던져졌다. 하나는 <팬데믹 레거시>를 필두로 <글룸헤이븐>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레거시 게임의 흥행이다. 레거시 게임이란 게임 중 구성물을 제거하거나 변조하고 때로는 규칙이 수정되는 등 게임에 진행 과정 발생한 흔적이 영구적으로 남으며 한번 진행한 구간을 다시 할 수 없는 게임을 말한다. 처음에는 구성물을 훼손하고 여러 번 반복해서 게임을 할 수 없는 등의 특징이 마치 보드게임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팬데믹 레거시>의 대성공과 함께 레거시 게임이라는 장르는 보드게임 세계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또 하나의 화두는 스토리 진행형 범죄 미스터리 콘셉트의 게임들이 많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사건의 재구성>, <디텍티브> 등이 확실한 흥행을 거두었는데, 이전에도 이런 소재의 게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시장에서 위세를 떨쳤던 적은 없었다. 이 경향에는 분명 레거시 게임 유행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두 가지 화두가 말해주는 것은 우선 보드게임의 소비자들이 게임의 분위기 연출과 서사적 깊이에 기꺼이 돈을 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진지한 범죄 미스터리가 보드게임의 소재로서 환영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우리에게 ‘본격파 추리 게임’의 구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 글은 그 구상이 구현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글이다.
1. 원칙을 세우자
‘본격파 추리 게임’이라는 용어를 굳이 쓰는 것은 사실 현재까지 시장에 나타난 보드게임 중에서 추리 게임으로서 충분한 완성도를 가진 게임을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추리 게임을 우리 나름대로 정의 내리고, 이 정의에 따라서 뼈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추리 게임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추리 게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최초의 추리 게임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모르그 가의 살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건 소설이잖아!”라고 항변할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맞다. 최초의 추리소설이라 불리는 에드거 앨런 포 작가의 소설이다. 그리고 독자와 작가가 1대1로 플레이하는 추리 게임이기도 하다. 게임의 정의와 범위가 어디까지냐에 대해서는 많은 주장들이 있지만, ‘정해진 규칙에 따라 승패를 가리는 놀이’가 바로 게임이라는 사실에 대해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추리소설도 다양한 방식으로 분화되어 있지만, 고전파의 황금기에는 많은 추리작가들이 추리소설을 작가와 독자 간의 게임으로 인식했다. 현대에도 전통적인 추리소설을 소설의 형식을 빌린 수수께끼 게임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종류의 추리소설을 ‘퍼즐 미스터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독자는 소설의 내용을 읽으며 진범과 범행의 방법을 추리하고, 결말 부분에서 탐정이 등장해 정답을 발표하는 것이 일반적인 진행인데, 작가에 따라서는 간지를 삽입하여 추리편과 해답편을 명백하게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독자들이 이 추리 게임에 기꺼이 뛰어드는 것은 작가가 페어플레이, 즉 무형의 규칙을 지킬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많은 작가들이 저마다 규칙을, 특히 작가가 지켜야 할 규칙을 명문화하였는데 반 다인의 20칙, 녹스 10계, 존 딕슨 카의 4대 공리라고 불리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여러 가지 규칙들이 있지만, 아주 단순하게 좁혀보면 이렇다. 납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정답이 있어야 하고, 독자가 맞힐 수 있어야 한다. 작가는 정보를 충분히 공유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 독자를 속게 만들어야 한다. 작가들은 아슬아슬하게 이 명제를 지키는 방법을 여럿 만들었는데, 그것들을 ‘트릭’이라고 부른다. 즉, 작가의 트릭과 독자의 냉철함을 겨루는 것이 추리 게임의 원형이다.
이런 논리에서 생각했을 때, 적어도 상업적인 보드게임 중에서는 본격적인 추리 게임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스토리와 추리를 강조한 게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개의 경우 추리 과정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거나, 플레이어의 어림짐작을 요구했다. 추리 게임은 <클루>처럼 확고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소거법적 장치를 필요로 한다. 즉 이 사람이 범인이라는 증거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범인일 수 없다는 증거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추리 비슷한 상상을 해서, 그럴 수밖에 없는 답이 아니라 적당히 그럴듯한 답을 도출하는 것에 추리 게임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상하다. 첫째로 추리 게임은 상상력만을 겨루는 게임이 아니라 진실을 찾아내고자 하는 집착과 집중력을 겨루는 게임이기도 하기 때문이며, 둘째로 이런 방식의 게임이라면 플레이어가 작가보다 더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해서 더 멋진 답을 내놓으면 오히려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미스터리 연극 〈쉬어매드니스〉를 보면 추리 게임에서 이런 태도가 얼마나 불공정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연극은 사실 연극의 형태를 낀 다인 게임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극이 사실상 추리소설의 경우처럼 추리 단계와 해답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추리편에 해당하는 내용이 끝나고 나면 관객들은 배우에게 질문을 하거나 자신의 추리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플레이를 하고, 그 시간이 지나면 관객들이 범인으로 생각되는 인물을 지목한다. 문제는 범인의 정체가 이 투표로 정해진다는 것이며, 그 즉시 해당 범인을 중심으로 다음 막이 펼쳐진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각각의 용의자들이 범인일 경우의 시나리오가 모두 존재하기 때문인데, 모두의 시나리오가 존재하는 시점에서 앞에서의 추리는 아무 의미도 없었던 셈이 된다. 모두의 시나리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애초에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근거를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영화나 소설이라면 열린 결말도 나름 매력이 있지만, 게임은 판정이 명확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추리 게임이라면 특히 더 그렇다. 명확한 진상은 추리 게임이 기능하기 위한 제1원칙이다.
반 다인의 20칙 중 15. 사건의 진상은 명백해야 한다. 독자가 사건의 진상을 알고 다시 책을 처음부터 읽었을 때, 모든 단서가 범인을 지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추리 게임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진상과 제대로 된 단서 공개가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면 그래야 제대로 된 게임 진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보드게임계에서는 ‘게임이니까’라는 이유로 이 점이 무시되고는 한다. ‘서스펙트 게임’이라는 프로젝트는 그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실험이기도 하다. 우리는 추리 작가들이 주장했던 여러 법칙과 보드게임의 특성을 참고하여 몇 가지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들을 지키는 방향으로 게임을 만들어나가기로 했다. 그 원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논리적으로 추리하고자 하는 플레이어에게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
범인은 논리적 추리를 통해서 판정할 수 있어야 한다. 논리적으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즉 여러 맥락을 해석하여 사건의 전체적인 정황을 깨닫는 경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경로가 있다고 하여 게임을 추리로 풀고자 하지 않는 플레이어가 입을 불이익은 없지만, 이러한 경로가 없다면 추리로 풀고자 하는 플레이어에게는 반드시 불이익이 생긴다. 이른바 ‘결정적 증거’ 하나를 여러 단서 속에 숨겨놓고 그 증거를 찾아내야만 사건이 해결되는 방식이라면 그것은 추리 게임이 아니라 뽑기 게임이다.
2. 범인은 한 사람이어야 한다.
원조자나 공범자가 있을 수 있으나 명확한 한 사람의 진범이 있어야 한다.
3.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어야 한다.
모든 행동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으며 ‘그냥’ 발견되는 단서도 없다. 이야기 속의 캐릭터가 ‘그냥’ 하는 이상한 행동도 없다.
4. 개발자와 플레이어는 되도록 경기에 공정하게 임해야 한다.
추리 게임은 근본적으로는 플레이어 간의 경기지만, 개발자와 플레이어 간의 공정한 경기를 겸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어떻게든 해석될 수 있는 문제를 만들어서는 안 되며, 플레이어들에게 주어진 단서와 정보들을 통해 명확히 단 한 사람의 진범에게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5. 범인으로 오해받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인물은 있을 수 없다.
모든 등장인물은 각각 자신의 사연을 갖고 있되 그 사연들이 모여서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6. 살인 방법과 트릭은 현실적이어야 한다.
이야기의 현실성에 집착할 필요는 없으나 살인 방법과 트릭은 현실적이어야 한다.
2. 어떤 규칙으로 만들까?
어떤 형태의 게임으로 만들 것인가는 위에 열거한 법칙과는 또 다른 주제다. 그러나 이 주제는 그리 어려운 주제가 아니었다. 전제가 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많았기 때문에, 배제할 수밖에 없는 것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먼저 추리 게임이라면 명확한 진상을 가진 하나의 사건이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사건에 대한 단서는 서사적으로 주어져야 한다. ‘게임에서 등장한 스도쿠 문제를 풀었더니 범인의 이름이 드러났다’ 같은 방식은 난센스다.
이 시점에서 여러 번 게임을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정해진 이야기를 중심으로 게임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답이 나온다. 여러 플레이어에게 공평한 단서를 주고 해답 풀기 경쟁을 시키는 것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런 시도를 한 게임들도 이미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문제가 있다. 추리 소설 한 권을 혼자서 보는 행위에 비해 장점이랄 게 없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이 방식은 한 권의 추리소설을 네 명이 한 장씩 돌려가며 읽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협력형 게임은 어떨까?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다. 범인은 작중에서 중요한 인물일 필요가 있으며, 그런 중요한 인물을 플레이어 중 한 명이 직접 그 역할을 맡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런 질문들은 결국 전통적인 방법론으로 귀결된다.
사실 추리 게임의 정석적인 구성 방식은 이미 20세기에 완성되었다. ‘머더 미스터리 파티’, 혹은 ‘머더 미스터리 게임’이라고 불리는 역할극이다. 파티 문화가 있는 영미권에서 추리소설 황금기에 태어난 이 게임은 현대에 ‘마피아 게임’ 혹은 ‘늑대인간 게임’이라고 불리는 게임과도 유사하다. 플레이어들이 각자 사건 현장의 용의자나 피해자 역을 맡고, 가상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고 진범을 추리하는 형식의 게임이다. 모두가 각자 탐정이 될 수 있으며, 물론 범인도 참가자 가운데 한 명이다. 플레이어들은 진범을 찾기 위해 현장을 조사하거나 서로 대화를 통해 정보를 이끌어낸다. 이 게임이 탄생한 지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게임마다 세세한 부가 설정이 있을지는 몰라도 기본적인 규칙은 바뀌지 않았다. 우리는 머더 미스터리 게임의 보드게임 버전을 우리가 만들 게임 형식의 방향으로 삼았다.
<서스펙트 게임>은 4~5명의 플레이어가 4명의 중요 인물의 역할을 맡아 조작하는 형식이다. 4명의 인물 모두가 사건의 용의자이고, 그중 한 명의 진범이 있다. 각각의 플레이어에게는 각 인물의 시나리오가 주어지며, 시나리오에 나와 있는 정보는 비대칭적이다. 플레이어들은 정해진 라운드 동안 차례대로 원하는 장소에 가서 원하는 단서를 조사한다. 자신이 찾은 단서는 자신이 계속 보관하며, 단서를 통해 얻은 정보를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공유하는 것은 완전히 플레이어의 선택에 맡겨진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도 상관없고, 말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며, 거짓말을 해도 상관없다. 일부 단서의 경우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영구적으로 은폐하는 것도 가능하며, 특정 장소의 모든 단서를 은폐할 수도 있다.
게임 중에 언제든지, 차례와 상관없이 다른 플레이어에게 질문 혹은 추궁을 하거나, 자신의 추리를 밝힐 수 있다. 마지막 라운드가 끝나면 최종적으로 각자 자신의 추리를 밝히고 자유롭게 토론한 뒤,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범인을 지목한다. 지목된 용의자가 범인이 아니라면 진범이 승리하고 나머지는 모두 패배한다. 만약 지목된 용의자가 범인이었다면, 협박 단계로 넘어간다. 협박 단계에서는 범인이 다른 플레이어들을 한 명씩 지목하며 상대의 중요한 비밀을 추리해야 한다. 범인에게 비밀을 들킨 사람은 즉시 패배하며, 만약 범인이 모든 플레이어를 상대로 협박에 성공했다면 범인이 승리한다.
머더 미스터리 게임의 방식을 기반으로 깔고 플레이어의 자유도를 상당히 높인 셈인데, 이 경우 플레이어의 성향에 따라 지나치게 다른 게임이 될 가능성을 고려해보았으나 100여 차례의 테스트 플레이를 거친 결과 그런 문제는 없었다. 단, 플레이어들의 성향에 따라서 게임 시간이 변동될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시나리오 하나당 평균 2~3시간이 걸리지만 간혹 추리에 깊게 파고드는 플레이어들의 경우 최대 5시간까지 소모하기도 했다. 게임 시간의 유연성에 착안하여, 플레이어의 취향에 따라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 연구해보기로 하였다.
3. 물리적 표현은 어떻게 할까?
사건과 용의자들이 초반부터 명확하게 제시되고, 각각 저마다의 범죄 동기를 가진 상태에서 정해진 용의자 중 한 명의 범인을 추리하는 형식을 ‘클로즈드 서클(Closed circle of suspects)’이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방식의 추리 장르가 있지만, 플레이어 모두에게 균등한 비중을 분배할 필요가 있는 보드게임에 있어서는 클로즈드 서클 방식의 이야기 설계가 가장 적합하다. 우리는 클로즈드 서클에 한정하여 4개의 시나리오를 만들기로 했고, 그에 기반해 게임의 물적 구조를 설계했다. 클로즈드 서클 형태의 전형적인 추리소설에서의 이야기 진행 과정을 간략하게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사건이 발생했다 → 용의자들이 등장한다 → 증거수집(물증 및 증언)을 시작한다 → 진상이 밝혀진다
게임에서 사건의 발생과 발견 당시의 상황은 가장 처음 등장하며 모두에게 공지되어야 한다. 반면 용의자 각자의 정보는 해당 캐릭터를 사용하는 플레이어에게만 주어져야 한다. 각 캐릭터의 성격이나 상태는 해당 캐릭터를 선택한 후에나 알 수 있으므로, 캐릭터를 고를 최소한의 기준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도 사건의 발생은 게임 전부터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어야 한다. 단, 상세한 사항은 증거 조사를 통해 플레이어가 수집해야 할 것이므로 처음 얻게 되는 공개정보는 최대한 간단한 묘사 정도로 그칠 필요가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최초의 공지는 텍스트로만 정리하기로 했다. 용의자들의 등장은 개인 시나리오와 캐릭터 카드로 나누기로 했다. 개인 시나리오는 해당 캐릭터의 플레이어만 볼 수 있으며, 캐릭터 카드는 각자 맡고 있는 캐릭터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게임 내내 공개된다. 플레이어들이 탐색할 장소는 게임판으로 표현하고, 플레이어들이 각자 어디를 탐색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도록 게임판 위에서 사용될 플레이어 말을 사용하기로 했다. 탐색을 통해 얻은 증거는 공유되는 증거가 아니므로 카드 형태로 만들기로 했다. 증거들은 작은 이미지 만으로 충분히 식별이 가능하다면 이미지로만 표현하고, 부연 설명이 필요하거나 해설이 필요한 경우, 혹은 언어적 증거일 경우는 텍스트로 충분히 설명하기로 했다. 장소 혹은 단서가 은폐되거나 영구히 변조되는 상황은 게임판에 스티커를 붙여 변조하는 방식으로 결정했는데, 이 방식은 <팬데믹 레거시>와 같다.
진상이 밝혀지는 부분은 대개의 경우 탐정의 ‘추리 쇼’로 표현되는데, 이 추리 쇼는 사실 작가의 페어플레이를 증명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장면에서 ‘범인은 누구누구고 어떻게 죽였다’만으로 설명을 끝내지 않고, 탐정 자신이 어떻게 범인을 확증할 수 있었는지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도 ‘지금까지 주어진 단서들을 충분히 고찰했다면 당신도 정답을 맞힐 수 있었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추리 게임에서도 역시 이 부분을 대충 넘어갈 수 없다. 하지만 승패가 난 시점에선 더 이상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플레이어들도 있을 것이고, 이런 플레이어들에게 추리 쇼는 쓸데없고 귀찮은 일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게임의 추리 쇼를 게임의 바깥쪽에 따로 두고,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만 웹으로 개방하기로 했다. 단,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각 시나리오를 클리어한 사람들에게만 코드가 제공될 예정이다. 서술한 내용에 따라, 시나리오 하나당 공개정보가 적힌 시트, 각 캐릭터의 개인 시나리오와 캐릭터 카드, 게임판과 스티커, 단서 카드 50여 장이 들어가며, 이 구성물들은 각각의 시나리오 상자에 들어간다. 게임말과 기타 구성물들은 공통적으로 사용되므로, 시나리오 상자와 별도로 게임 상자에 들어간다.
4. 시나리오를 만들자!
여기까지 결정했으면 이제 시나리오, 즉 이야기를 만들 차례다. 추리 게임의 이야기는 다른 게임의 이야기와 다르다. 추리 소설 자체가 가진 게임으로서의 기능을 해치지 않으면서, 다인 게임의 특성도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추리 게임은 ‘이야기가 포함된 게임’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게임을 굴러가게 만드는 엔진이 되어야 한다. 플레이어들이 스스로 대화를 하게 유도하고 각자의 대화 속에서 단서가 드러나야 한다. 우리는 상호작용과 이야기가 반반씩 자리를 양보한 상태가 아니라, 상호작용을 위한 프로세스를 짜 올린 결과 플롯이 완성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이에 따라 이야기를(즉, 게임 내에서의 여러 가능성들을) 이루는 속성들을 최대한 구분해 숫자로 정렬하고, 그 숫자로부터 구성을 선택해 이야기의 흐름을 거꾸로 짜 올리는 방식을 택했다. 이 작업을 위해 우리는 그동안 프로토타입 테스트 플레이를 통해 수집한 내용들을 기반으로 각각의 요소들에 이름을 붙여 숫자로 정렬하고 도표화해 하나의 도구로 만들었는데, 우리는 이 도구를 ‘이야기 나무’라고 부른다.
이야기를 짜 올리는 과정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한 모토로 삼았던 것은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였다. 게임의 밸런스를 손쉽게 맞추겠다는 미명하에 이야기에서 맥락에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나거나, 캐릭터가 작중에서의 설정과 관계없이 오직 플레이어를 위해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등의 선택지는 배제하도록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미나토 가나에 작가의 소설 <고백>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는데, 이 책에서는 한 줄기의 사건을 두고 각 챕터마다 다른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이루어진다. 미나토 가나에 작가가 <고백>을 쓴 작법은 다르겠으나, 우리는 이 책에서 힌트를 얻어 캐릭터마다의 이야기를 먼저 만들고 그것을 합쳐 하나로 만드는 시도를 시작했다.
1년간의 시나리오 작업 끝에 3개의 시나리오로 이뤄진 3부작 이야기 하나와 1개의 단편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이 중에서 3부작 시나리오는 한국 테이블탑 게임 디자이너 모임을 통해 외부 테스트 플레이가 진행되었고, 이야기의 완성도와 게임의 재미 면에서 모두 호평을 받았다.
자, 그러면 이제 내용을 모두 완성했으니 모양과 하드웨어를 만들 차례다!
(다음 글에 계속)
첨부1
서스펙트게임썸네일.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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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기게임이면 안된다고 하셨는데 왜 결국 단서 뽑기 게임으로 만드셨나요? 플레이어간 단서공유가 안되니 뽑기 게임이나 마찬가지가 되버렸고 범인역할만 너무 불리하게 되어있어서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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