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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의 테마 기행 - 액시스 & 얼라이즈:1942 제2차 세계대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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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8 10: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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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 [GM]찰리
글: [GM]찰리
<액시스 & 얼라이즈: 1942>는 역사상 최대이자 최악의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2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추축국에게 유리하던 전황을 연합국이 뒤집기 시작한 계기가 되는 전투들을 알아보겠습니다.
2. 연합국의 반격
1) 유럽 전역
1942년이 되며 가장 먼저 반격에 나선 것은 소련이었습니다(소련이 가장 먼저 차례를 시작하는 것이 나름 역사의 고증인 셈입니다). 소련은 1941년 12월에 로스토프 전투와 모스크바 공방전을 거치며 독일의 진격을 막고 전선을 물릴 수 있었습니다. 이에 고무된 스탈린은 이 기세를 몰아 더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 독일군을 소련 영토에서 완전히 쫓아내고자 했습니다. 스탈린은 소련 전선 전역에서 반격을 명했고, 일부 전선에서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선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채로 무의미하게 병력만 소모할 뿐이었습니다.
한편 독일은 새로운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장성들은 모스크바로 진격하여 소련군의 기세를 꺾는 작전을 제안했지만, 히틀러의 눈은 캅카스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군은 만성 석유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캅카스 지역의 유정을 차지하여 석유를 확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스탈린은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노릴 것이라 확신하여 캅카스 지역에 대한 공세조짐과 첩보를 모두 무시했습니다.
독일은 청색 작전을 개시해 캅카스 지방으로 진격한다. 이때가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 중 최대 강역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청색 작전”)
6월 28일 독일 남부집단군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리코프(현재의 하르키우)를 탈환하고자 공세 중이던 소련군은 독일군의 역습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맙니다. 독일군은 보급이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쾌진격을 이어나가며 캅카스 지역을 점령해 나갑니다. 독일군의 선전에 고무된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를 앞에 두고 군대를 둘로 나누어 일부는 스탈린그라드(현재의 볼고그라드)로 진격하고 나머지는 남진하여 캅카스의 유전을 점령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기껏 병력을 나눠 점령한 캅카스 유전은 소련군이 미리 파괴를 하여 즉시 사용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많아 당장 점령한 이득을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병력을 나눈 여파로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지옥이 펼쳐집니다.
스탈린그라드는 스탈린의 이름을 딴 도시인만큼 정치적인 상징성이 큰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주력 전차인 T-34의 주요 생산기지일 정도로 캅카스 지방의 공업 중심지였고, 볼가강을 따라 소련 남쪽의 자원을 모스크바로 운송하는 수운의 중심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를 무시하고 캅카스 지방으로 진격하면, 스탈린그라드를 기점으로 진격하는 소련군의 반격에 후미가 노출되기 때문에 캅카스 지방을 점령하려면 반드시 점령할 필요가 있는 도시였습니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해 대규모 폭격을 진행하고 기갑사단을 앞세워 도시에 진입합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인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독일군의 공세에 소련군은 공장에서 갓 나온 전차를 바로 전선에 투입할 정도로 분전했으나, 독일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도시 외곽의 방어선을 돌파합니다.
영화 <에네미 엣 더 게이트>의 한 장면. 소련은 이렇게 볼가 강을 통해 병력을 투입하며 스탈린그라드를 지켜냈다.
하지만 시내에 진입하면서부터 독일군은 장기인 기갑 사단을 활용한 기동포위전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독일이 자랑하는 기갑부대도 폐허 때문에 시내 진입이 어려워 활약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소련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교환비로 승리해 온 독일군이었지만, 시가전에서만큼은 그들도 소련군보다 나은 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시내를 대부분 장악하는 데 성공하며 소련군을 볼가강 인근의 교두보까지 밀어붙입니다. 소련군은 강 건너에서부터 보급과 포격지원을 받아가며 필사적으로 분전하며, 간신히 버텨냅니다. 하지만 버티는 것만으로는 전황을 뒤바꿀 수 없었습니다.
소련군은 추축국의 약점이었던 측면을 돌파해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고립시킨다. 남쪽의 화살표는 고립된 제6군을 구원하다 실패한 만슈타인 원수의 돈 집단군이다. (출처: 나무위키 “스탈린그라드 전투”)
11월이 되자 소련군은 전황을 뒤바꾸기 위해서 역습을 계획합니다. 당시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하던 독일 제6군의 측면은 루마니아군과 헝가리군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전력은 독일군보다 약했고, 그나마도 수가 모자라서 넓은 전선을 감당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소련군은 이 틈을 노리고 90만 대군을 동원해 전선을 돌파했고, 33만에 달하는 독일군을 스탈린그라드에 가두는 데 성공합니다. 병력을 나누지 않았다면 캅카스로 진격했을 병력들이 이쪽 측면을 방어하였을 테니, 독일군은 병력을 나눈 대가를 톡톡히 치 것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독일군은 곧 보급 문제에 시달리게 됩니다. 독일 본국에서는 항공으로 보급을 해결하려 했지만, 워낙 대군이 포위되어있다 보니 수송량도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그나마도 소련 공군의 요격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구출작전도 진행되었으나, 포위망을 돌파하지 못해 결국 실패합니다. 결국 43년 2월 2일에 독일 제6군은 항복합니다. 33만에 달하던 병력은 9만 1천 명만 남았고, 이중 훗날 독일에 살아 돌아온 인원은 고작 6천 명뿐이었다고 합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은 100만 명이 넘는 인원의 사상자를 냈고, 독일군은 40만 명, 다른 추축국 군대까지 포함하면 80만 명의 사상자를 냅니다. 사상자 40만 명은 독일이 향후 서부전선 전체에서 잃은 군대의 숫자와 비슷한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00만 명이 전사하면 200만 명을 동원했던 소련과는 달리,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입은 피해를 전쟁이 끝날 때까지 회복하지 못합니다.
스탈린그라드 전쟁을 기점으로 동부전선의 기류는 달라집니다. 소련은 일방적으로 밀리던 과거와는 달리 독일 못지않은 제병합동전술을 구사하며 반격에 나서기 시작한 반면, 독일군은 이전과 같은 돌파력을 더는 보여주지 못합니다.
2) 지중해 전역
제2차 세계 대전 중 추축국의 지중해 전선 최대 강역. 초록색 선이 추축국의 강역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제2차 세계 대전의 지중해 및 중동 전구”)
1942년에 롬멜은 대규모 공세를 개시합니다. 몰타 항공전으로 인해 보급선을 견제하던 영국군의 움직임이 위축되었고, 전선이 뒤로 밀려 보급선도 짧아져서 보급을 원활하게 받을 수 있었고, 오랜만에 보급을 안정적으로 받은 김에 영국군을 완전히 밀어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영국군은 독일군의 공세를 예측하지 못해서 전선에서 밀려났고, 토브룩 인근의 가잘라에서 방어선을 펼쳐 저항했으나 독일군은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며 방어선을 돌파하고 토브룩을 점령합니다. 토브룩에는 영국군이 미처 폐기하지 못한 다량의 보급품이 있었고, 롬멜은 이 보급품을 바탕으로 리비아 국경을 넘어 이집트로 진격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던 리비아 영토를 내주는 것과 원래 영국의 식민지였던 이집트가 돌파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기 때문에 영국군은 엘 알라마인에서 필사적으로 방어전을 펼칩니다. 이 무렵이 되자 보급은 롬멜의 발목을 또다시 붙잡습니다. 동쪽으로 진격하면서 보급선이 다시 길어진 데다가 몰타섬이 살아나며 영국 해군과 공군이 독일군의 보급선을 차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처칠은 반격을 지시했으나, 당시 중동 사령관이었던 오킨렉 대장은 이를 거부한 끝에 인도로 전출됩니다. 오킨렉 대장이 직접 지휘하던 8군 사령관으로는 버나드 몽고메리 중장이 부임합니다. 몽고메리는 전선을 유지하며 착실히 반격을 준비했습니다. 미국이 참전하면서 풍족해진 보급품을 모으는 한편, 거듭된 패전으로 인해 롬멜에게 압도된 부하들을 질책하고 병사들을 혹독히 훈련시키며 결전을 준비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 대한 요약 영상. 1942년 말이 되자 연합국의 대대적인 반격에 추축국은 속절없이 밀려난다.
1942년 10월 23일,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몽고메리는 공격을 개시합니다. 당시 롬멜은 병을 얻어 독일에서 휴양 중이었는데, 영국군의 공세 소식을 듣고 급히 북아프리카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독일군이 아무리 분전해도 몽고메리는 물량을 믿고 진격했으며, 큰 피해를 입었지만 엘 알라마인을 점령합니다.
한편 1942년 11월에 미군은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알제리에 상륙하는 횃불작전을 개시하여 본격적으로 대서양 너머로 군대를 투입합니다. 프랑스 군대의 예상치 못한 저항이 있었지만, 미군은 무사히 알제리를 점령할 수 있었고, 이제 독일군은 양쪽에서 압박을 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튀니지까지 밀려나며 최후의 항전을 벌였으나, 1943년 5월이 되자 더는 전선을 유지할 수 없어 항복합니다. 이제 연합국은 북아프리카를 교두보로 삼아 이탈리아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태평양 전역
영화 <진주만> 중 둘리틀 특공대의 일본 폭격 장면.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던 일본 본토가 폭격을 받은 사건은 일본 군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진주만 공습으로 함대를 잃은 미국은 군과 시민들의 사기를 위해서 무언가 큰 전과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당장의 함대 전력으로는 일본군에 맞서거나 유효한 타격을 주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입안된 작전이 항공모함에 육군 폭격기 B-25를 실어 일본 본토를 타격하는 둘리틀 특공대 작전이었습니다. B-25는 항공모함에 탑재될 것을 상정하지 않고 개발된 기체이기 때문에 기관총을 비롯한 각종 장비를 최소한으로만 실어야 간신히 이함이 가능했고, 착함은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둘리틀 특공대는 폭격을 마친 후 중국으로 날아가 폭격기는 버리고 조종사만 귀환하는 식으로 작전이 진행되었습니다. 폭격에 참여한 B-25는 16기로 수는 많지 않았지만, 이 작전의 목적은 실질적인 피해보다는 심리전의 목적이 컸기에 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둘리틀 특공대는 실질적으로 큰 피해를 주지는 않았으나, 일본 입장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본토에 대한 공격은 일본 해군에게 큰 정치적인 압박을 주었습니다. 일본 해군은 진주만 공습 이후로 미국 태평양 함대가 1년 동안 피해를 회복하지 못하리라 예상했는데, 불과 4개월 만에 본토를 위협한 것입니다. 또한 얼마 후 벌어진 산호해 해전에서는 진주만 공습을 피한 미국 항공모함과의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에 부담을 느낀 일본 해군은 미국 항공모함 함대를 제압할 필요를 느꼈고 미드웨이 해전은 이런 배경에서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화살표로 표시된 곳이 미드웨이섬이다. 점으로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섬이지만, 일본에서 하와이로 가려면 지나치기 어려운 요충지이다. (출처: 구글 어스)
미드웨이는 하와이로부터 북서쪽으로 3460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입니다.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태평양 최전선이었던 섬으로, 이 섬이 돌파되면 그다음은 바로 하와이였습니다. 일본은 미국 항공모함을 잡기 위해 미드웨이부터 점거해야 했고, 미국은 미드웨이를 어떻게든 지켜야 했습니다. 양측의 주요 전력은 미국은 전함 없이 정규 항공모함 3척과 중순양함이 7척이었던 반면, 일본은 전함 11척, 정규항공모함 4척으로 차이가 컸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이 압도적이었던 해군 전력을 나누는 바람에 미드웨이 해전에 참여한 전력은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1942년 6월 3일 항공모함 4척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군 기동함대는 미드웨이섬을 공격합니다. 일본군은 공습을 통해 미드웨이 기지의 탄약고와 유류 저장고 등 시설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활주로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아서 당장 작전을 수행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한편 공습에 참여한 일본군 항공기들은 기지의 엄청난 대공포화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당시 공격을 이끌던 항공함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는 추가 공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미국 항공모함을 대비하여 대함용 무장을 장착한 함재기들의 무장을 지상 공격용으로 바꿀 것을 지시합니다. 자신들이 기습을 했다고 판단하여 미국 항공모함 함대를 배제한 것인데, 사실 미군은 도청을 통해 일본군의 계획을 모두 알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일본 함대를 맞상대할 항공모함들이 미드웨이를 향해 항해하고 있었고, 일본 정비사들이 한창 함재기들의 무장을 바꾸던 시점에 이들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나구모에게 전해집니다. 나구모는 함재기들의 무장을 다시 원복하라고 지시를 내렸고, 안 그래도 난장판이었던 항공모함 내부는 위험한 폭탄들이 굴러다니는 아수라장이 되어있었습니다. 나구모는 작업을 독촉했지만, 미드웨이 기지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의 공격 때문에 작업은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점에 미국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이 일본 함대 상공에 도착합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뇌격기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세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뇌격기 대대들은 단 한 발의 어뢰도 명중시키지 못하며 거의 모두 전멸합니다. 당시 미국의 어뢰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며, 조종사들의 전술적인 능력도 숙달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참사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축차공격이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본 항공모함의 함재기들은 항공모함이 회피기동을 하느라고 정비를 마치지 못한 상황이었고, 그런 와중에 방공임무를 하던 제로센들은 탄약과 연료 문제로 오히려 착함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급강하폭격기들이 도착하였습니다.
영화 <미드웨이>의 하이라이트인 미국 급강하폭격기 편대의 폭격.
일본 항공모함들은 저공에서 공격하는 미국 뇌격기들에 집중하느라 폭격 직전에야 미국 급강하폭격기를 확인했습니다. 제로센이나 방공포로 대응하기에는 늦어도 너무 늦은 시점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은 항공모함은 카가였습니다. 급강하폭격기 28대가 짧은 시간 동안 수십여 발의 폭탄을 카가에 투하했고, 이중 5발이 카가에 명중했습니다. 한편 카가에 공격이 집중되는 것을 확인한 조종사 3명은 옆에 있던 아카기로 기수를 돌립니다. 당시 카가와 아카기에는 미처 이함하지 못한 채 연료와 무장을 가득 실은 함재기들과, 그 함재기들로부터 떼어낸 교체무장들이 산재해 있었고, 이들이 명중탄으로 인해 엄청난 유폭을 일으킵니다. 카가와 아카기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피해를 입고 침몰합니다.
한편 카가와 아카기의 북서쪽 방향에 있던 일본 항공모함 소류에는 미국 항공모함 요크타운에서 발진한 급강하폭격기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소류의 장병들은 남동쪽 방향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전에 집중하느라 자신들의 북서쪽에서 접근한 미국의 급강하폭격기들을 너무 늦게 발견했고, 카가 및 아카기와 동일한 운명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아직 일본에게는 항공모함이 한 척 남아있었습니다. 일본 해군은 히류에게 반격을 명합니다. 히류에서는 1차로 급강하폭격기를 내보냈고, 이 편대는 요크타운을 발견해 공격하여 기관실에 타격을 주는 큰 피해를 입힙니다. 하지만 공격에 대비해 유폭을 일으킬 수 있는 폭탄이나 연료를 최대한 방재한 덕분에 일본 항공모함들과 같은 운명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장병들의 손상 복구 능력이 일본에 비해 뛰어났기 때문에 침몰의 위기를 극복하고 2시간 여만에 항공모함의 기능을 회복합니다. 하지만 그때 히류에서 발진한 2차 공격대인 뇌격기 편대가 도착했고, 요크타운은 이 공격에 대파되었습니다. 이때 침몰된 것은 아니지만, 승조원을 퇴함시키고 예인되던 와중에 일본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최종적으로 침몰합니다.
반격에 성공했으나, 새벽부터 공격을 이어온 히류의 승조원들은 모두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의 지휘관이었던 야마구치 다몬은 앞서 두 번의 공격대가 각기 다른 항공모함에게 큰 피해를 준 것이라 판단하고 석양이 질 때 다시 공격을 이어나가기 위해 승조원들에게 잠시 휴식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 미국의 반격대가 도착합니다. 모함을 잃은 요크타운의 함재기들을 포함한 공격대는 히류와 그 주변의 일본 함선들에게 폭격을 퍼부었고, 이 공격으로 인해 기동함대의 마지막 남은 항공모함인 히류마저 침몰합니다. 소기의 목적인 일본 항공모함 제압을 완수한 미국 함대는 그대로 동쪽으로 후퇴합니다. 함재기가 뜨기 어려운 야간에 일본 함대를 상대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한편 일본 해군 본대는 항공모함을 4기나 잃은 것을 복수하고자 미국 항공모함을 쫓았으나, 추격에 실패하고 후퇴합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함대의 기동전력을 책임지는 정규항공모함 4척과 322기의 함재기를 잃습니다. 잃은 함재기 중 상당수는 항공모함이 격침당하면서 갈 곳을 잃고 함께 수몰된 것으로, 항공모함이 한 대라도 살아남았다면 살릴 수 있는 함재기도 상당수였다는 뜻입니다. 전사자는 무려 3,500여 명으로 이들 대부분이 숙련된 조종사와 항공모함 운영인력들이었습니다. 한편 미국은 정규항공모함 1척과 항공기 147대를 잃었고, 전사자는 307명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
미국이 미드웨이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보력에서 앞섰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이 미드웨이를 노린다는 것을 감청을 통해 알아냈고, 이를 대비해 최대한 항공모함 전력을 미드웨이에 집중했습니다. 한편 일본은 자신들의 정보가 어나간다고는 상상하지도 못한 채 자신들이 미드웨이를 기습했다고 생각하고 병력을 운영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병력을 지나치게 분산하면서,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사실상 미해군과 전력 차이가 없는 상태로 붙게 되었습니다. 승리의 여신이 미국의 손을 들어준 것처럼 극적인 순간들도 많은 전투였지만, 미국은 진인사대천명이었던 반면에 일본은 안일했기에 전투가 이렇게 전개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도 일본의 함대는 건재하여 미국이 정면으로 맞상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때 잃은 정규항공모함 4척을 다시 재건하지 못했고, 이는 이후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의 기동력을 내내 제한합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인해 독일군의 공세 능력이 꺾였듯이 미드웨이 해전으로 인해 일본 해군의 공세능력 역시 크게 꺾인 것입니다. 이는 이후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군의 발목을 붙잡는 요소가 됩니다.
이후 일본과 미국은 솔로몬 제도를 두고 과달카날 전역에서 전쟁을 벌입니다. 일본은 과달카날섬과 그 주변을 점령하고 비행장 건설에 들어갑니다. 미드웨이에서 주력 항공모함을 잃었기 때문에 일본은 섬에서 발진하는 항공기들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 미국은 일본이 솔로몬 제도의 제공권을 장악한다면 호주와 미국의 연결선이 위협받아 자칫하면 호주를 고립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바로 반격에 나섭니다. 과달카날 전역에서 양측은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으며 일진일퇴했으나, 결과적으로 미국이 과달카날을 점령합니다. 과달카날 전역에서 미국은 주력 항공모함 4척이 모두 침몰하거나 대파될 정도로 손해를 보았지만, 대파된 함선들을 수리하고 새로 건조한 함선들도 하나 둘 취역하며 소모된 전력을 회복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과달카날 전역에서 소모된 전력, 특히 항공전력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개전 초기 미군보다 숙련도가 높았던 일본의 조종사들과 승무원들은 이제 온데간데없었고, 이는 일본이 전쟁 후반기에 카미가제 전술에 집착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1942년을 지나며 전쟁의 주도권은 연합국에게 점차 넘어옵니다. 또한 1943년부터 미국의 전시생산체제가 본격적으로 돌아가며 연합국의 보급 능력은 좋아진 반면 추축국은 전시체제의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주도권을 얻었다 판단한 연합국은 1943년 1월 14일에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회담을 갖고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을 종전의 조건으로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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