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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플렌더의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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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3 14: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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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GM]언테임드
<스플렌더>는 르네상스 시대 보석 상인들의 사업을 배경으로 한 게임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적인 성취가 많았고 유럽 역사에서도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다 보니, 이 시대를 그린 보드게임은 그 배경을 잘 살려서 멋들어진 분위기를 내는 경우가 많다.
<스플렌더>의 경우 게임 규칙이 먼저 만들어진 다음 르네상스 배경이 입혀졌는데, 배경을 나중에 입힌 것치고는 카드와 귀족의 일러스트로 르네상스의 풍미를 잘 살렸다. <스플렌더>의 귀족 타일을 잘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등장하는 귀족 모두가 르네상스 시대 유럽 각지의 실존 인물들이란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이었던 관계로 서로 일련의 관계를 맺었던 경우도 많다. 이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그들의 관계를 따라가 보자. <스플렌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제작사 스페이스 카우보이즈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스플렌더>에 등장하는 귀족 타일은 실존 인물들을 기반으로 새롭게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름 뒤에 표시된 생몰 연도를 살펴보면, 이들 모두가 완전히 동시대의 인물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다. 가장 먼저 태어난 인물은 이사벨 1세, 가장 나중에 태어난 인물은 엘리자베트 폰 외스터라이히인데, 엘리자베트 폰 외스터라이히는 이사벨 1세가 죽은 지 50년이나 지난 뒤에야 태어났다.
각 인물들의 간략한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
이사벨 1세
카스티야와 레온의 여왕.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와 혼인하여 서로의 영토를 통합하고 공동 군주가 됐다. 통합을 통해 탄생한 가톨릭 왕국은 에스파냐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에스파냐를 통일한다. 이사벨 1세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후원하기도 했는데, 이 덕분에 에스파냐는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진출을 선점하며 유럽 제일가는 부를 누릴 수 있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스플렌더의 귀족 타일에 사용된 인물 중 가장 이질적인 인물이다. 다른 인물들이 모두 왕궁과 관련된 인물인 데 반해, 마키아벨리는 귀족이라기보다는 공무원에 가까운 인물로 외교관이자, 정치학자, 저술가로 활동했다. 피렌체의 실권을 쥔 메디치가가 몰락하고 피렌체 공화국이 성립된 시기에 외교관으로 발탁되어 활약하다가 메디치가가 복귀하면서 공직에서 물러난다. 이 시기에 메디치가 에 반대하는 인물이라는 혐의로 공직의 길이 꺾였다.
이 당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의 군주인 로렌초 2세 데 메디치에게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 <군주론>을 헌정했다. 이 헌정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메디치가에게 더 큰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권력자들은 마키아벨리의 이론을 싫어해서 이후 공직과는 더욱 인연이 없었다. 다만 루첼라이 가문 지식인들의 모임에서 명사들을 만나 <로마사 논고>, <정략론> 등의 저서를 더 쓰게 된다.
안 드 브르타뉴
프랑스 북서쪽의 브르타뉴 지방은 프랑스 왕국 산하의 공작령이지만, 안 드 브르타뉴의 아버지 프랑수아 2세 브르타뉴 공작이 재위한 동안에는 프랑스로부터 준독립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1488년 아버지가 말에 떨어져 죽고, 안은 11세의 나이로 브르타뉴 공국의 군주가 됐다. 이 어린 군주에게는 섭정을 맡아줄 인물도 없는 상태였다.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브르타뉴 공국을 프랑스 영토에 편입시키고자 안과 혼인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요절해 후사가 없었고, 샤를 8세 역시 젊은 나이에 죽었다. 이후 오를레앙 공작이던 루이 12세가 새로 프랑스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른 루이 12세는 첫 번째 부인인 잔 드 프랑스와 이혼하고, 안 드 브르타뉴와 재혼한다. 그렇게 해서 안 드 브르타뉴는 프랑스왕 샤를 8세와 루이 12세의 왕비가 된다.
헨리 8세
잉글랜드 종교 개혁의 중심인물, 그가 창시한 영국국교회(성공회)는 왕비가 6명이었던 그의 복잡한 사생활과 관련이 있다. 그의 딸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는 다음 세대 잉글랜드를 핏빛 음모와 거대한 혈전으로 몰고 갔다.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군주이기도 하다.
프랑수아 1세
프랑수아 1세는 세 명의 아내를 두고도 아들을 얻는 데 실패했던 루이 12세의 왕위를 계승했다. 프랑수아의 아버지 샤를은 루이 12세의 사촌이었으며, 프랑수아의 부인은 루이 12세와 안 드 브르타뉴 사이에서 태어난 클로드 드 프랑스다. 대외정치와 재정 쪽으로 실패를 거듭하고 특히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와의 전쟁에서는 연전연패했지만, 인격적으로 호탕하고 너그러워 프랑스인이 존경하는 왕 중 하나로 역사에 남았다. 이탈리아 문물을 도입하고 프랑스가 문화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쉴레이만 1세
오스만 제국의 10대 술탄. 문무를 겸비한 명군주로 명망이 높았으며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를 가져온 인물이다. 서쪽으로 진격하여 카를 5세와 대립하는 등 공격적이면서도 내치에도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문학적인 재능도 있어서 많은 시를 남겼다. 모두 가톨릭 신도(헨리 8세는 훗날 영국국교회로 개종)인 다른 등장인물과 달리 유일하게 이슬람 신도인 점이 눈에 띈다.
카를 5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전성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이탈리아 국왕, 에스파냐 국왕 등 다수의 왕관을 머리에 썼다. 에스파냐 국왕으로서는 카를로스 1세라 불린다. 훗날 제국주의 영국의 슬로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실제로 이 카를 5세의 제국을 가리킨 말이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
피렌체의 대표적 명문가인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로렌초 2세 데 메디치의 딸이다(카트린은 프랑스식으로 불린 이름으로, 원래 이탈리아식으로는 카테리나 데 메디치). 프랑수아 1세의 아들 앙리 2세와 혼인했다. 이 혼인의 배경에는 당시 이탈리아를 문화적으로 흠모하던 프랑수아 1세의 입김이 작용했다. 아들 프랑수아 2세가 요절하고 차남 샤를 9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카트린은 섭정으로 나섰으며 이후 정치적인 힘을 발휘했다.
메리 1세
엘리자베트 폰 외스터라이히
프랑스 국왕 샤를 9세의 왕비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에스파냐의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딸이다. 에스파냐 왕비 오스트리아의 안나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의 동생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마티아스의 누나이기도 하다. 1570년 샤를 9세와 혼인했으나 심신이 건강하지 못했던 남편은 1574년 세상을 떠났다.
이들의 관계를 잘 살펴보면, 프랑스 왕가를 중심에 두고 그와 연관된 인물들로 가지를 친 모습이다. <스플렌더>의 제작사인 스페이스 카우보이즈가 프랑스 회사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상한일은 아니다. 이들의 관계를 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동시대 군주들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
카를 5세와 쉴레이만 1세
카를 5세와 헨리 8세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
프랑수아 1세와 쉴레이만 1세
안 드 브르타뉴와 프랑수아 1세
이사벨 1세와 카를 5세
이사벨 1세와 헨리 8세
프랑수아 1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니콜로 마키아벨리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메리 1세
헨리 8세와 메리 1세
메리 1세와 엘리자베트 폰 외스터라이히
엘리자베트 폰 외스터라이히와 카를 5세
<스플렌더>의 경우 게임 규칙이 먼저 만들어진 다음 르네상스 배경이 입혀졌는데, 배경을 나중에 입힌 것치고는 카드와 귀족의 일러스트로 르네상스의 풍미를 잘 살렸다. <스플렌더>의 귀족 타일을 잘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등장하는 귀족 모두가 르네상스 시대 유럽 각지의 실존 인물들이란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이었던 관계로 서로 일련의 관계를 맺었던 경우도 많다. 이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그들의 관계를 따라가 보자. <스플렌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제작사 스페이스 카우보이즈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스플렌더>에 등장하는 귀족 타일은 실존 인물들을 기반으로 새롭게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름 뒤에 표시된 생몰 연도를 살펴보면, 이들 모두가 완전히 동시대의 인물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다. 가장 먼저 태어난 인물은 이사벨 1세, 가장 나중에 태어난 인물은 엘리자베트 폰 외스터라이히인데, 엘리자베트 폰 외스터라이히는 이사벨 1세가 죽은 지 50년이나 지난 뒤에야 태어났다.
각 인물들의 간략한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
이사벨 1세
카스티야와 레온의 여왕.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와 혼인하여 서로의 영토를 통합하고 공동 군주가 됐다. 통합을 통해 탄생한 가톨릭 왕국은 에스파냐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에스파냐를 통일한다. 이사벨 1세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후원하기도 했는데, 이 덕분에 에스파냐는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진출을 선점하며 유럽 제일가는 부를 누릴 수 있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스플렌더의 귀족 타일에 사용된 인물 중 가장 이질적인 인물이다. 다른 인물들이 모두 왕궁과 관련된 인물인 데 반해, 마키아벨리는 귀족이라기보다는 공무원에 가까운 인물로 외교관이자, 정치학자, 저술가로 활동했다. 피렌체의 실권을 쥔 메디치가가 몰락하고 피렌체 공화국이 성립된 시기에 외교관으로 발탁되어 활약하다가 메디치가가 복귀하면서 공직에서 물러난다. 이 시기에 메디치가 에 반대하는 인물이라는 혐의로 공직의 길이 꺾였다.
이 당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의 군주인 로렌초 2세 데 메디치에게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 <군주론>을 헌정했다. 이 헌정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메디치가에게 더 큰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권력자들은 마키아벨리의 이론을 싫어해서 이후 공직과는 더욱 인연이 없었다. 다만 루첼라이 가문 지식인들의 모임에서 명사들을 만나 <로마사 논고>, <정략론> 등의 저서를 더 쓰게 된다.
안 드 브르타뉴
프랑스 북서쪽의 브르타뉴 지방은 프랑스 왕국 산하의 공작령이지만, 안 드 브르타뉴의 아버지 프랑수아 2세 브르타뉴 공작이 재위한 동안에는 프랑스로부터 준독립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1488년 아버지가 말에 떨어져 죽고, 안은 11세의 나이로 브르타뉴 공국의 군주가 됐다. 이 어린 군주에게는 섭정을 맡아줄 인물도 없는 상태였다.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브르타뉴 공국을 프랑스 영토에 편입시키고자 안과 혼인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요절해 후사가 없었고, 샤를 8세 역시 젊은 나이에 죽었다. 이후 오를레앙 공작이던 루이 12세가 새로 프랑스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른 루이 12세는 첫 번째 부인인 잔 드 프랑스와 이혼하고, 안 드 브르타뉴와 재혼한다. 그렇게 해서 안 드 브르타뉴는 프랑스왕 샤를 8세와 루이 12세의 왕비가 된다.
헨리 8세
잉글랜드 종교 개혁의 중심인물, 그가 창시한 영국국교회(성공회)는 왕비가 6명이었던 그의 복잡한 사생활과 관련이 있다. 그의 딸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는 다음 세대 잉글랜드를 핏빛 음모와 거대한 혈전으로 몰고 갔다.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군주이기도 하다.
프랑수아 1세
프랑수아 1세는 세 명의 아내를 두고도 아들을 얻는 데 실패했던 루이 12세의 왕위를 계승했다. 프랑수아의 아버지 샤를은 루이 12세의 사촌이었으며, 프랑수아의 부인은 루이 12세와 안 드 브르타뉴 사이에서 태어난 클로드 드 프랑스다. 대외정치와 재정 쪽으로 실패를 거듭하고 특히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와의 전쟁에서는 연전연패했지만, 인격적으로 호탕하고 너그러워 프랑스인이 존경하는 왕 중 하나로 역사에 남았다. 이탈리아 문물을 도입하고 프랑스가 문화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오스만 제국의 10대 술탄. 문무를 겸비한 명군주로 명망이 높았으며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를 가져온 인물이다. 서쪽으로 진격하여 카를 5세와 대립하는 등 공격적이면서도 내치에도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문학적인 재능도 있어서 많은 시를 남겼다. 모두 가톨릭 신도(헨리 8세는 훗날 영국국교회로 개종)인 다른 등장인물과 달리 유일하게 이슬람 신도인 점이 눈에 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전성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이탈리아 국왕, 에스파냐 국왕 등 다수의 왕관을 머리에 썼다. 에스파냐 국왕으로서는 카를로스 1세라 불린다. 훗날 제국주의 영국의 슬로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실제로 이 카를 5세의 제국을 가리킨 말이었다.
피렌체의 대표적 명문가인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로렌초 2세 데 메디치의 딸이다(카트린은 프랑스식으로 불린 이름으로, 원래 이탈리아식으로는 카테리나 데 메디치). 프랑수아 1세의 아들 앙리 2세와 혼인했다. 이 혼인의 배경에는 당시 이탈리아를 문화적으로 흠모하던 프랑수아 1세의 입김이 작용했다. 아들 프랑수아 2세가 요절하고 차남 샤를 9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카트린은 섭정으로 나섰으며 이후 정치적인 힘을 발휘했다.
태어난 지 일주일도 안 된 상태에서 스코틀랜드의 여왕에 즉위했다. 헨리 8세의 딸이자 잉글랜드 여왕으로 즉위했던 메리 1세(메리 튜더, 속칭 블러디 메리라고 불림)와는 다른 인물로,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메리 스튜어트라고도 부른다. 귀족적 풍모가 넘치는 당대 최고의 미녀였고 기구한 삶의 궤적으로 후대 예술 작품에서 자주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스코틀랜드를 노리던 헨리 8세와의 사이가 안 좋아진 관계로 프랑스 궁정으로 피신했고,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아들 프랑수아 2세와 혼인해 그의 왕비가 됐다. 시어머니인 카트린을 평민 출신이라 무시해 고부 갈등을 겪었고,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한 이듬해에 요절하자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헨리 스튜어트와 혼인했으나, 그의 죽음과 관련된 의혹을 이유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왕위에서 물러난 메리 1세는 잉글랜드로 망명했으나 결국 유폐되었으며 18년간의 유폐 생활 중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반역죄를 이유로 처형당한다. 헨리 8세의 아버지 헨리 7세의 적장녀의 적손녀였으므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도 가지고 있어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견제를 받았던 것이다.
프랑스 국왕 샤를 9세의 왕비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에스파냐의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딸이다. 에스파냐 왕비 오스트리아의 안나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의 동생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마티아스의 누나이기도 하다. 1570년 샤를 9세와 혼인했으나 심신이 건강하지 못했던 남편은 1574년 세상을 떠났다.
이들의 관계를 잘 살펴보면, 프랑스 왕가를 중심에 두고 그와 연관된 인물들로 가지를 친 모습이다. <스플렌더>의 제작사인 스페이스 카우보이즈가 프랑스 회사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상한일은 아니다. 이들의 관계를 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동시대 군주들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에스파냐 국왕이었던 카를 5세, 오스만 제국의 술탄 쉴레이만 1세는 동시대 인물로, 연령도 비슷하고 재위 기간 역시 비슷한데, 1520년부터 1547년까지 무려 27년 동안이나 함께 각자의 재위를 지키고 있었다. 프랑수아 1세와 쉴레이만 1세는 둘 다 1494년생인 동년배이며, 프랑수아 1세와 헨리 8세는 둘 다 1547년에 사망했다. 동시대에 살았던 군주들이란 서로 사이가 좋기보다는 나쁘기가 십상일 것이다. 특히 걸핏하면 전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던 유럽에서 이들은 서로 치열한 경쟁자였으며 그만큼 전쟁도 많이 했다.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는 매우 적대적인 관계였다. 갈등은 1519년에 치러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에서 카를 5세가 프랑수아 1세를 제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촉발됐다. 이 때문에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를 평생의 적대자로 맹세하기까지 했을 정도다. 이 둘은 재위 기간 내내 서로 앙숙으로 지냈는데, 특히 이탈리아 반도를 놓고 두 나라가 자주 부딪혔다. 1525년 이탈리아의 파비아에서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가 벌인 전투에서는 카를 5세의 신성 로마 제국군이 프랑수아 1세를 포로로 사로잡기까지 했다. 프랑수아 1세의 카를 5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은 기어이 종교를 뛰어넘었고, 1543년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아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이던 니스를 급습하기에 이른다.
카를 5세와 쉴레이만 1세 사이의 관계도 매우 적대적이었다. 지중해 연안에서 급속히 힘을 키운 오스만 제국은 합스부르크와 기독교인이 독점한 지중해 무역을 위협했으며, 1529년과 1532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이던 빈을 포위해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협정을 맺기도 했다.
카를 5세와 헨리 8세는 직접적으로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관계가 원만했다고 볼 수는 없다. 헨리 8세의 첫 번째 부인은 아라곤의 캐서린이었는데, 그녀는 에스파냐의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넷째 딸이자 카를 5세의 이모였다. 캐서린과 헤어지고 앤 불린과 혼인하고자 했던 헨리 8세는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로 해달라고 청원을 했으나, 교황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카를 5세는 이모인 캐서린의 혼인 무효를 거부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혼인 무효 청원이 거부당한 헨리 8세는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이혼을 청원했으나, 이 역시 거부당한다. 하지만, 캐서린과 이혼하고 싶은 헨리 8세의 욕망은 교황의 권력 따위가 눈에도 들어오지 않게 만들었다. 그는 결국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신학자들을 통해 헨리와 캐서린의 혼인이 불법이란 견해를 공포하도록 했다. 이를 계기로 영국 교회는 교황이 있는 로마 교회와 분리돼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헨리 8세의 딸 메리 1세(블러디 메리)는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와 혼인해, 이 둘은 사돈 관계이기도 하다. 즉, 서로 이모부, 처조카이자, 사돈인 것이다. 다만, 메리 1세와 펠리페 2세의 혼인은 헨리 8세가 죽은 다음인 1554년에 행해졌다.
프랑수아 1세와 헨리 8세는 서로 크게 적대하지는 않았다. 프랑수아 1세는 헨리 8세와 동맹을 맺고자 1520년 금란의 들판에서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훗날 프랑수아 1세가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를 프랑스 궁정으로 피신시키는데 협조해 헨리 8세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한 것을 보면 서로 원만하기만 한 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메리 1세가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음을 감안하면 단순하게 망명자의 피신처를 제공한 것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수아 1세와 쉴레이만 1세는 카를 5세에 대항하기 위해 실질적인 동맹 관계를 형성했다. 다만 명문화된 동맹을 맺지는 못했는데, 당시는 종교와 다른 이교도와 정식 조약을 맺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 힘을 합쳐 카를 5세와 신성 로마 제국을 괴롭혔다.
안 드 브르타뉴는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와 루이 12세의 왕비다. 샤를 8세와의 사이에 낳은 아이 4명은 모두 어린 시절에 요절했고, 루이 12세와의 사이에는 딸 둘을 낳았다. 프랑스에서는 살리카 법에 의거해 여성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기 때문에, 큰딸 클로드 드 프랑스를 앙굴렘 백작이자 발루아 공작인 프랑수아 1세와 혼인시키고 그를 왕위 후계자로 삼는다.
이사벨 1세는 페르난도 2세와의 사이에서 1남 4녀를 낳았다. 그중 차녀 후아나 1세는 1504년에 어머니 이사벨 1세로부터 카스티야와 레온의 여왕 자리를 물려받고, 1516년에 아버지 페르난도 2세의 아라곤 여왕 자리도 물려받는다. 하지만, 남편인 펠리페와 아버지 페르난도가 섭정하여 실질적인 통치 행위는 하지 못했다. 페르난도 2세가 죽은 후 후아나의 아들이 카를로스 1세가 돼 공동 통치를 하게 됐다. 그 후 카를로스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며 카를 5세로 불리게 된다.
헨리 7세는 혼인 관계를 통해 잉글랜드와 에스파냐 간의 동맹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이사벨 1세와 헨리 8세는 헨리 7세의 장남 웨일스 공 아서와 이사벨 1세의 막내 딸 캐서린을 혼인시켰다. 하지만, 이 둘의 혼인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혼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상황에서 아서가 심한 병에 걸려 요절한 것이다. 혼인을 통한 동맹을 유지하고 싶었던 헨리 7세는 이 둘의 혼인을 무효화시키고, 둘째 아들인 헨리 8세와 캐서린을 혼인시킨다. 헨리 8세와 캐서린 사이에서는 메리 1세(블러드 메리) 외엔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그로 인해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원했던 헨리 8세와 캐서린의 사이가 틀어졌다.
프랑수아 1세는 자기 둘째 아들 앙리 2세의 신부로 메디치가의 카트린을 선택했다. 당시 프랑스 귀족들은 크게 반발했으나, 왕태자 프랑수아를 제치고 앙리가 왕이 될리는 없다는 식으로 귀족들을 설득했다. 프랑수아 1세는 카트린과 앙리의 혼인으로 인해 밀라노 공작령을 맡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메디치 가문은 파산에 가까운 상태라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수아 1세는 며느리 카트린을 아꼈으며, 평민 출신이라 무시당하던 카트린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그리고 왕태자 프랑수아는 요절해 앙리가 프랑수아 1세의 왕위를 이으며, 카트린은 평민 출신의 프랑스 왕비가 됐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나머지 등장인물과 직접적인 인연이 없다. 하지만 카트린과는 막연한 인연이 있는데, 니콜로 마키아벨 리가 <군주론>을 헌정한 로렌초 2세 데 메디치가 바로 카트린의 아버지인 것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사망하던 시점에 카트린은 겨우 9살 밖에 안 됐으니, 그 외의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다.
어린 나이에 프랑스로 망명해 프랑스 궁정에서 자란 메리 1세는 평민 출신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았다고 한다. 메리 1세가 카트린과 앙리 2세 사이에 태어난 장남 프랑수아 2세와 혼인한 후 둘은 심각한 고부갈등을 겪었다. 프랑수아 2세가 왕위에 오른 바로 다음 해에 요절하고, 카트린이 섭정으로 정치적 실권을 얻게 되자 메리는 쫓겨나듯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헨리 8세는 메리 1세의 아버지의 외숙이다. 헨리 7세(헨리 8세의 아버지)의 장녀 마가릿 튜더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와 혼인해 제임스 5세를 낳았고, 메리 1세는 그 제임스 5세의 유일한 자녀다. 호시탐탐 스코틀랜드를 노리던 헨리 8세는 메리 1세를 자기 아들 에드워드 6세와 약혼시켰다. 하지만, 헨리 8세의 노골적인 탐욕으로 인해 이 약혼은 깨지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사이가 더욱 더 악화한다. 1547년 잉글랜드군은 핑크 클로의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고, 이에 위협을 느낀 메리의 어머니 마리 드 기즈는 메리를 프랑스 궁정으로 망명시킨다. 1548년 메리는 앙리 2세의 아들 프랑수아 2세와 약혼하고, 훗날 그와 혼인한다. 헨리 7세의 적장녀 마가릿의 손녀인 메리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어, 헨리 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를 괴롭혔다.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혼인이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해 서녀 취급을 받았으므로, 왕위에 대한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며 메리야말로 잉글랜드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란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메리 1세는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왕위에서 쫓겨나기까지 했지만,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잉글랜드에선 제임스 1세)가 어머니의 왕위 계승권 덕분에 자식 없이 죽은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공동 군주가 됐다.
엘리자베트 폰 외스터라이히는 프랑수아 2세의 동생이자 왕위 계승자 샤를 9세의 왕비다. 프랑수아 2세의 왕비인 메리 1세와는 동서지간인 셈이다. 하지만, 엘리자베트가 샤를 9세와 혼인했을 때는 이미 프랑수아 2세가 죽어 메리 1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지 10년이 지난 후였기 때문에 이 둘이 프랑스 궁정에서 직접 대면한 일은 없었다.
카를 5세가 제위에서 내려오자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후계자가 됐고 아들인 펠리페 2세가 에스파냐의 후계자가 됐다. 카를 5세는 자기가 가졌던 모든 지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었으나, 사실상의 대리인으로서 독일 영토를 통치하던 페르디난트를 지지하던 귀족이 많았기에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2세가 그의 황제 직위를 물려받았으며, 막시밀리안 2세는 카를 5세의 딸 마리아 아나와 혼인했다. 엘리자베트는 막시밀리안 2세의 딸이자카를 5세의 외손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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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평소 게임할때는 그렇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이렇게 자세히 보니 더 멋지네요 ㅋㅋㅋ 블러디 메리 의상이 붉은 색이라거나 카를 5세가 뜨는 해를 보고 있는 듯한 연출이 재미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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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 디자인의 구석구석을 잘 살펴 보면, 깨알같은 디테일이 참 많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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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중세시대 인물화겠거니.. 했는데 실존 인물 기반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점이 놀랍네요 거기다 인물관계도까지 디테일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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