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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 100 - 텔레스트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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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1 10: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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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GM]언테임드
보드게임과 디지털 게임, 그 외의 여러 방식들을 막론하고 특별히 오랫동안 살아남는 게임들이 있다. 이 코너에서 다루는 게임들도 물론 거기에 속하겠지만 더 넓게 보면 바둑과 같은 고전 보드게임들, 그리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긴 시간을 보낸 구전 게임들도 여기에 속한다. 이런 게임들은 특히 더 검증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기물도 문자도 없이 오직 손에서 손으로,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매번 다양한 플레이어를 만나면서도 틀림없이 사랑을 받고, 긴 시간 동안 오직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게임 진행이 누적됨을 통해서만 대를 이어올 수 있었던데는 틀림없이 이유가 있다. 때때로 이런 게임들은 보드게임으로 상용화되어 다시 한번 성공을 거두곤 하는데, <텔레스트레이션>이 바로 그런 게임이다.
<텔레스트레이션>은 2009년에 미국에서 처음 출시된 후 제법 시간이 흐른 2016년에 처음 한국어판이 나온 게임이다. 스케치북에 글자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며 시계방향으로 스케치북을 넘기다가 시작할 때 내 손에 있었던 스케치북이 다시 내 손으로 돌아오면 게임이 끝난다. 먼저 첫 플레이어는 주사위를 이용해 무작위로 선택한 단어를 스케치북에 쓴 다음, 플레이어가 짝수라면 1페이지 '그림을 그려요!'를 펼쳐서 그림 그릴 준비를 하고 플레이어가 홀수일 경우에는 1페이지 '그림을 그려요!'를 펼치고 그대로 왼쪽 사람에게 준다. 이제 모래시계를 뒤집고,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각자 앞장의 단어를 설명하는 그림을 그린다. 모래시계가 다 떨어지고 나면 그림 그리기를 멈추고, 한 페이지를 넘겨 2페이지를 펼친 다음 모두가 동시에 왼쪽 사람에게 자기 스케치북을 준다. 모두가 스케치북을 받고 나면 각자 한 페이지 앞을 펼쳐 몰래 그림을 보고, 다시 2페이지를 펼쳐 답을 적는다. 그리고 스케치북을 다음 페이지로 넘겨서 모두가 동시에 왼쪽 사람에게 스케치북을 넘긴다. 이렇게 계속 반복하다가 스케치북이 한 바퀴 돌아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면 게임이 종료되고 한 명씩 번갈아 가면서 자기 스케치북을 펼쳐 답을 확인한다. 앞에서부터 넘기나 뒤에서부터 넘기나 무관하다. 짐작하겠지만 이 게임은 승패가 중요한 게임이 아니라, 단어 하나가 여러 사람의 해석을 거치는 동안 어떻게 변질되어가는지를 확인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목적인 게임이다. 꼭 한 마디로 설명하라면 '그림 그리는 게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사실 그리는 행위가 핵심이라기보다는 나와 다른 사람의 '다름'이 핵심이다. 이해보다는 오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게임이기 때문이다.
<텔레스트레이션>의 게임 진행 과정. 처음 자기가 받은 스케치북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단어를 보고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을 보고 그 그림이 무엇인지 맞히거나를 반복한다.
<텔레스트레이션>은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상용 보드게임들과 달리 게임 작가의 이름이 공개되어있지 않다. 도서출판산업을 뿌리에 둔 유럽 게임들과 달리 완구산업에 뿌리를 둔 미국 보드게임 시장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게임을 온전히 만들어 낸 '작가'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텔레스트레이션>은 구전 게임을 상품화한 보드게임이다. 패키지의 앞면에 쓰인 'The Telephone Game Sketched Out!'이라는 문구에서부터 이 게임의 원형이 전 세계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던 '텔레폰 게임'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데, 텔레폰 게임이란 정해진 말을 귓속말로 속삭이며 차례차례 전달하다가 마지막 사람에게까지 말이 전달되고 나면 맨 처음 사람이 말한 내용과 마지막 사람이 들은 내용을 비교하는 것이다. 이 게임은 전 세계에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며 파티 게임이나 어린이 교육용 게임으로 활용되었으며, 개그 프로그램이나 영화 등 여러 창작물에 영감을 주었다. 특히 게임의 흐름이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하는 동안 소문이 와전되어가는 것과 같다는 이유로 사회학적 소재로 많이 사용되기도 했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표현한 '비디오 테이프'가 가스레인지로 오해 받고 결국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샤브샤브'가 되었다.
이 텔레폰 게임은 세계 각지에서 여러 방식으로 변형되었고 그중에는 그림을 사용하는 방식의 게임도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텔레폰 픽셔너리'라고 불리는 게임이다. 텔레폰 게임에 보드게임인 <픽셔너리>를 합친듯한 이름인데, 다른 텔레폰 게임과 달리 종이와 펜을 사용한다. 이 게임은 한국에서도 80년대 말~90년대 초쯤에 초등학생들을 사이에서 유행했던 게임으로, 종이를 여러 차례 접어 여러 칸을 만들거나 종이 여러 개를 스테이플러로 연결해 스케치북처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린이들끼리 플레이할 때는 대개 전자와 같은 방식이 사용된다. 한 사람이 주제를 정해 첫 페이지에 쓰고 나면, 다음 사람은 그 글을 보고 다음 페이지에 그림을, 그다음 사람은 그림을 보고 다음 페이지에 글을 쓰는 방식이다. <텔레스트레이션>은 바로 이 텔레폰 픽셔너리 게임을 보드게임으로 구현한 게임이다. 명색이 게임이다 보니 점수를 얻는 방법 정도를 추가하긴 했지만, 실제로 <텔레스트레이션>을 즐기면서 점수에 신경 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 사실상 원작 그대로라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에 걸쳐 구전된 게임들을 상품화하려면 한 가지 고민을 해결해야 한다. 바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손을 댈 것인가의 문제다. 많은 경우 규칙을 고쳐서 완전히 다른 느낌의 게임으로 만드는 선택을 하지만 대개의 경우 더 나은 게임으로 고치기 보다는 원래 게임보다 못한 게임으로 고치는 결과를 낳는다. 5~10년 수준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 이어질 정도로 사람들이 오랫동안 즐겨온 게임 혹은 놀이는 수많은 규칙의 변형을 거치다가 한가지의 확실한 규칙으로 자리 잡기 마련이다. 그만큼의 역사를 거친 규칙 혹은 방식의 완성도는 쉽게 볼 것이 못 된다. 다시 말해 이미 최적화된 시스템에 변형을 가한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완성품에 결함을 가하는 꼴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상품으로 만든다면 그건 그것대로 상품으로서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텔레폰 픽셔너리. 기다란 종이 맨 위에 아무 문장이나 쓰면 게임이 시작된다.
다음 사람은 문장을 그림으로 옮긴 다음, 자신이 본 문장을 접어서 안 보이게 만들어 다음 사람에게 건넨다. 건네받은 사람은 그림을 보고 문장을 쓰고, 그림을 접어 안 보이게 만들어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식으로 진행된다.
게임 내적인 부분을 변경할 수 없다면 외적인 부분이나 아주 사소한 부분들에 변경을 가해야 한다. 카드 게임의 경우 특수한 카드를 추가해준다거나 사용자의 편의를 위한 장치 등을 넣어준다거나, 원작에서 사용자가 직접 만들게 되어 있는 장치를 미리 만들어서 넣어주는 방법 등이 있다. 이런 예로는 <로보 77>과 <다크 스토리즈>를 들 수 있다. 플레잉 카드를 사용하는 오래된 놀이인 '99'는 번갈아가며 카드를 내고 카드에 표시된 숫자를 더해가다가 99 이상을 만든 사람이 벌점을 받거나 탈락하는 형식의 게임인데, <로보 77>에는 카드의 구성을 플레잉 카드와 달리하면서, 벌점을 표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던 동전을 대신할 토큰을 넣어주었기에 게임을 진행하려 할 때 굳이 동전을 마련할 필요가 없다. 이야기 스무고개라고 표현할 수 있는 평행 사고 퍼즐(우리나라에는 '바다거북스프 괴담'으로 잘 알려져 있다)은 출제자가 이야기 형식의 수수께끼를 내고 참가자들은 출제자에게 질문을 반복하면서 이야기에 등장한 상황의 원인을 추리하는 방식의 놀이다. 이를 상품화한 <다크 스토리즈>는 이미 잘 짜여진 수수께끼 문제들이 들어있어 특별한 준비 없이 바로 즐길 수 있게 만들어 상품으로서의 매력이 보강되었다. 또 다른 예로, 국내에서는 그리 활발하지 않지만 추리 게임 장르인 머더 미스터리 게임의 경우도 상품화된 제품들의 제목은 서로 다를지라도 대부분 규칙은 크게 다르지 않고, 시나리오를 통해 독자성을 확보하려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다크 스토리즈>나 머더 미스터리 게임 장르의 게임들에서 시나리오를 먼저 준비한다는 것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따로 시나리오 준비하는 수고를 덜어주는 데다, 플레이어로 하여금 '더 나은 시나리오'를 기대하게 해준다는 점도 상업화된 게임이 갖는 특별한 장점이다.
텔레스트레이션에는 플레이어에게 점수를 메겨 승자를 정하는 규칙이 존재한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 규칙은 사용되지 않는 편이다.
<텔레스트레이션> 역시 구체적인 모양새는 다르지만 사용자의 편의를 보강하고 이 '사용자에게 맡겨진 것'을 미리 최적화된 형태로 만들어 넣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스케치북과 펜, 그리고 지우개다. 텔레스트레이션의 스케치북은 코팅이 되어 있어 여러 번에 걸쳐 그리고 지우고를 반복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하나의 패키지를 사용해 오랫동안 게임을 할 수 있다. 이 점은 플레이어의 시간과 수고를 상당히 절약해주는 <텔레스트레이션>만의 장점이다. 언제든 상자에서 스케치북을 꺼내 바로 플레이할 수 있으며, 따로 준비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게임에 사용할 단어를 미리 정해두고 무작위로 선정하게 한 것도 상품으로서의 장점이다. 표현하기 너무 어렵지도, 너무 쉽지도 않은 단어들을 미리 선정해 넣었기에, 출제자의 센스와 무관하게 적당한 흐름이 이어지도록 밸런스를 맞췄다. 또한 게임을 아무리 많이 해도 시시해지지 않도록 양면으로 된 단어 카드 100장에 총 1,000개 이상의 단어가 들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의 놀이가 대를 이어 오랫동안 사랑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 놀이가 그만큼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놀이이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는 동안 다듬어지고 발전해서 깊은 완성도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텔레폰 게임이 <텔레스트레이션>으로 상품화되면서 더해진 개발사 측의 수많은 노력도 이 완성도를 더 빛나게 만들었다.
한국어판에 한정해서, 추가로 많은 손들이 더해졌다. 사실 서구권에서는 언어나 단어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게임이 해마다 등장하지만, 이 장르의 게임은 다른 장르에 비해 잘 한국어화 되지 않는 편이다. 그것은 이런 게임들 대부분이 즐기기에는 간단하지만, 한국어로 바꾸는 현지화 작업을 하기에는 까다롭기 때문이다. 사용하는 단어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그렇다. 기본적으로 한국어와 영어는 단어 체계나 문화도 다르고, 같은 단어를 해석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다. 책이라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의역을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단어가 중심이 되는 게임의 경우에는 고정된 맥락이라는 것이 없고, 규칙에 따라 게임을 즐기는 것이 성립해야 하므로 책과 같은 방식으로 번역하기는 곤란하다. 따라서 <텔레스트레이션>과 같은 경우에는 결국 그 1,000개 이상의 단어를 새로 선정하는 방식으로 현지화될 수밖에 없었다. 단어가 중심이 되는 게임에서 사용할 단어를 선정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게임의 난이도, 단어의 대중성, 시의성, 도덕적 고려 등 하나의 단어에 수많은 고민들이 얽힐 수밖에 없다. 그런 수많은 고민들을 양분으로 태어났다는 점만으로도 <텔레스트레이션>이 이제야 이 지면에 실리게 되었다는 것은 다소 늦은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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