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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의 보드게임 테마기행] 로빈 후드의 모험 5편 – 사자심왕 리처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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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6 16: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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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GM]언테임드
로빈 후드의 모험 5편 – 사자심왕 리처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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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4개월 만의 재연재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글이 늦어지게 되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늦더라도 반드시 완결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정말 로빈 후드 시대의 이야기까지 왔습니다. 이번 시간의 주인공은 사자심왕 리처드 1세입니다. 예전에는 사자왕이라고도 많이 불렸는데, 영어인 Lionheart를 예전에는 그대로 번역하기 곤란하다고 생각했는지 사자왕이라고 의역한 것이지요. 사자 같은 용맹한 왕이라는 뜻보다는 사자와 같은 담대한 심장을 가진 왕이라는 의미로 붙은 별명이니, 요즘은 사자심왕이라고 "heart"를 살려 번역하는 추세입니다. <로빈 후드의 모험>에서도 사자심왕 리처드로 번역했었지요. (사실 유년기를 90년대에 보낸 저에게 사자왕은 가오가이거입니다.)
(출처: https://namu.wiki/jump/Ybv6mrCDUm5GP%2BoPL1KJ5PYyP%2BN6mzTUgl5iXsL6A82fG6La1XNwFBcUxwFjlilVaT3hVhMnLPBI3SooX%2BX7WQ%3D%3D)
(1) 제3차 십자군 전쟁
1189년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리처드 1세는 지속되는 내전으로 어수선했던 내부를 숙청으로 정리한 뒤, 이듬해에 십자군 전쟁에 나섭니다.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전쟁에 나선 이유는 부왕 헨리 2세 때부터 이미 정해진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1187년 예루살렘 왕국이 살라딘에 의해 멸망함에 따라 교황이 가톨릭 세계에 휴전령을 내리고 십자군 결성을 촉구합니다. 이에 따라 1188년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휴전을 하고 십자군 참가를 선포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후계자에서 배제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리처드 1세가 헨리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십자군 출병은 미뤄진 것이고, 헨리 2세를 계승한 리처드 1세는 십자군에 참여할 의무가 있던 것입니다.
3차 십자군 전쟁은 왕들의 십자군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중세를 호령한 왕들이 다수 참전했던 전쟁입니다.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까지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각 나라의 명군들이 모두 참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중 프리드리히 1세는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기껏 와놓고 강을 건너다 죽는 바람에 군대가 회군했고,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와 갈등을 빚다가 프랑스로 돌아가버립니다. 남은 것은 오직 리처드 1세뿐이였죠.
제3차 십자군 전쟁에서 리처드 1세가 보여준 무용은 그야말로 군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의 무력은 물론 전략적, 전술적인 판단에서도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당대의 서유럽은 중무장한 기사가 주력이었던 반면, 중동은 궁기병이 주력이었습니다. 당시 궁기병의 활로는 중무장한 기사의 갑옷을 뚫을 수 없었기 때문에 숫자가 차이 나더라도 정면 대결이라면 십자군 세력이 해볼 만한 여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동의 뜨거운 날씨는 중무장한 기사들이 쉽게 탈진하게 만들었기에 물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왕국이 멸망하게 된 하틴 전투의 패인은 보급은 고려하지 않은 채로 무리하게 출진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무장이 튼튼하고 전투력이 좋은 병사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략적인 식견이 없다면, 패배를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리처드 1세는 중동에 상륙하기 전 키프로스를 장악하여 해상 보급로를 확보했고, 병사들에게 필요한 보급량을 계산해 보급시키고 무리하게 진군하지 않았습니다. 리처드 1세의 무력은 유명하지만, 이런 지략적인 면모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편입니다. 리처드 1세는 아버지와의 내전에서 갈고닦은 덕분인지 전략적, 정치적 식견도 훌륭한 편이었습니다.
리처드 1세는 전장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훌륭한 지휘관이자 최강의 기사였습니다. 리처드 1세의 무용에 대해서는 적군인 이슬람 측에서조차 믿을 수 없을 수준의 활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믿기 어려운 전공은 사실상 함락된 성을 구원하기 위해 배에서 뛰어내린 다음, 80여 명의 기사들과 함께 돌진하여 성을 약탈하던 수만에 달하는 이슬람 병사들을 몰아내어 성을 구원한 일입니다. 어찌나 기가 질렸는지 이슬람 측에서는 그를 사탄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한신과 항우가 합쳐진 듯한 리처드 1세의 활약 덕분에 십자군은 연전연승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의 리처드 1세의 모습은 중세 모든 왕들의 귀감이 될만한 기사 중의 기사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연전연승하고 보급에 심혈을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수적으로 열세였고 사방이 포위된 상태였는 데다가, 물을 구하기가 어려워 장거리 원정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을 탈환하기보다는 살라딘을 최대한 흔들어서 최대한 유리하게 협상을 맺고자 했습니다. 게다가 먼저 돌아간 필리프 2세가 잉글랜드령 프랑스 영지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며, 리처드 1세도 시간을 오래 끌 수 없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건 살라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출처: https://namu.wiki/jump/Ybv6mrCDUm5GP%2BoPL1KJ5G4Q5PoRgp0ZuvlR1KgQILm590gCdaWGi%2FnIIkCEX%2FvoEA4X2AM4hpT%2F20Rr224%2Fjvw2Zbre5ubYef6zL%2FxzpWRzQMaiY8NDkmWM4QZF4Yzw2FudOUaclivaMy2qTzg3Iw%3D%3D)
두 왕은 이슬람의 예루살렘 지배를 인정하되, 기독교도들의 순례를 보장하고, 해안가의 십자군 도시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평화 조약을 맺습니다. 조약을 맺은 후, 십자군들이 성지 순례를 하고 성묘 교회에서 마지막 미사를 드리는 것으로 3차 십자군은 종료되고 리처드 1세는 유럽으로 돌아옵니다.
(2) 왕의 귀환
리처드 1세의 귀국길은 험난했습니다. 지중해 항해에서 문제가 계속 생긴 끝에 현재의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 국경 지대 인근에서 배가 난파됩니다. 리처드 1세는 매형인 하힌리히 사자공의 도움을 받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으로 향했지만, 아크레에서 모욕했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에게 포로로 붙잡히게 됩니다. 레오폴드 5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힌리히 6세(사자공 하힌리히와는 다른 사람입니다)에게 리처드 1세를 넘깁니다.
리처드 1세를 넘겨받은 하힌리히 6세는 제국 법정에 그를 기소합니다. 죄목은 시칠리아를 점거하려 한 무력 행위, 키프로스 정복, 코라도 암살 배후였습니다. 실제로 죄가 있어서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 왕이라는 최고의 포로의 몸값을 책정하기 위한 형식적인 과정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책정된 리처드 1세의 보석금은 15만 마르크로 당시 잉글랜드의 연간 소득의 2~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리처드 1세는 죄수처럼 다뤄지며 고생하기도 했지만, 영국의 신하들이 신성로마제국으로 찾아와 협정에 나서며 독방에서 해방되어 귀빈 대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 여러 독일 귀족들과 친분을 다질 수 있었고 덕분에 황제와의 교섭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존과 필리프 2세의 뒷 공작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1세는 1년이 조금 넘는 포로 생활 끝에 석방되어 잉글랜드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잉글랜드의 진짜 왕이 귀환한 것입니다.
(3) 필리프 2세와의 전쟁
리처드 1세는 가볍게 존을 제압하고 필리프 2세와의 전쟁에 나섭니다. 두 왕은 일진일퇴를 반복했지만, 서서히 전황은 리처드 1세 쪽으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을 거치며 군신의 경지에 오른 리처드 1세를 필리프 2세가 감당하기는 어려웠던 것입니다. 어느새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가 뺏은 영지를 대부분 수복하고 파리 외곽까지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궁지에 몰린 필리프 2세는 갖은 음모를 동원해 리처드 1세의 세력에 균열을 내려고 했습니다.
(출처: https://namu.wiki/w/%ED%97%A8%EB%A6%AC%202%EC%84%B8#s-4)
지도에서 보이듯 당시 프랑스 영토 내 프랑스령 영지를 잉글랜드 영지가 나누고 있는데, 그중 한 곳이 리모주 자작의 영지인 리모주 자작령입니다. 이곳은 국경지대라서 그런지 반란을 자주 일으키던 곳인데, 이 전쟁에서도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고 리처드 1세에게 반기를 듭니다.
리처드 1세는 이 반란을 진압하러 직접 출진합니다. 리모주 자작은 성에 들어가 농성을 했고, 리처드 1세는 이 성에서 공성전을 진행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벽 가까이에서 상황을 살피던 리처드 1세는 석궁에 화살을 맞았습니다. 즉사하지는 않았지만, 화살촉 제거 수술 후 생긴 상처가 곪는 바람에 결국 사망하고 맙니다. 이때 그의 나이 42세였습니다.
(4) 로빈 후드에서의 사자심왕
로빈 후드에서 사자심왕은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편입니다. 리처드 1세를 복합적으로 평가하는 작품에서조차 사자심왕이 존 왕의 압정을 종식시키고 잉글랜드에 평화를 가져와 줄 인물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서사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리처드 1세의 생애는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중에는 십자군 전쟁이라는 대형 해외 원정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그 수많은 전쟁을 수행할 자금과 신성로마제국에 지불해야 했던 막대한 보석금은 과연 어디서 나왔을까요?
즉, 로빈 후드에서 그려지는 노르만 귀족들의 막대한 세금은 단순한 수탈이 아니라, 리처드 1세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세금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기록상으로 리처드 1세는 화려한 의복을 즐기는 등 검소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지만, 소모되는 전비에 비하면 의복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로빈 후드에서는 존 왕과 노르만 귀족들이 원망을 받았을까요? 그 이유는 로빈 후드 서사에 민족주의가 섞인 시점이 19세기부터였다는 것에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제국주의 시절 영국의 주적은 프랑스였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로빈 후드를 노르만족에 맞선 색슨족의 영웅으로 해석한 작품들은 인기를 끌 수 있었지요. 하지만 사자심왕 리처드는 노르만 왕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을 이끌었으며, 프랑스를 상대로도 승전을 이어갔던 영웅이었으니 이러한 대립 구도에서 제외된 것이죠. 또한, 현재까지 내려오는 영국 왕가에는 엄연히 노르만 왕가의 피도 흐르고 있으니, 왕족을 모조리 부정적으로 그리기보다는, 가짜 왕의 실정을 진정한 왕이 귀환하며 바로잡는다는 서사가 더 대중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끝이 없던 휴재 기간으로 인해 길었던 이번 시리즈도 이제 마지막 이야기만 남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존 왕의 이야기를 가볍게 다뤄보며 이 시리즈를 마무리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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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후드의 모험도 재미 있었는데 좋은 글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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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 감사합니다!
찰리가 다음 글을 더 빨리 쓰도록 독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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