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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 자유게시판 [사적인 보드게임 이야기] 03. 겜생 부부의 풍경
  • 2022-04-13 17:4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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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신나요

요즘 저희 부부는 둘 다 콘솔 게임에 빠져 있습니다. 아내는 ‘스위치로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을 즐기고 저는 ‘엘든 링’을 하고 있죠. 길죽한 책상 위에 모니터 두 대를 올려놓고, 둘 다 퇴근하고 나면 나란히 앉아서 말입니다. 몇 주 전에는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오늘은 어떤 보드게임을 할까? 아니면 영화?”라고 했는데, 그 몇 주 동안은 이게 고정 사이클이 되었네요.

가끔 제3자의 눈으로 우리 둘의 모습을 지켜본다면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른쪽 벽 하나를 보드게임으로 채워 두고, 책상 모니터 두 대에 서로 다른 게임이 돌아가고 있는 광경. 그런 걸 보면서 좋지 않게 여기거나 “왜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느냐”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건 나이의 문제는 아닌 거 같더라구요. 전에 제 지인 중에도 (저녁마다 플스를 잡고 있는 저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던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물론, 예전에 보드게임 애호가인 다른 지인이 놀러왔을 때는 저 벽을 보고 “생각보다 게임 얼마 없네”라고 했지만요.

 

저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친분을 쌓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입니다. 보드게임은 그런 관계의 윤활 역할을 해 주죠. 지난 번 글에서 이야기했던 '핏'처럼 원초적 즐거움이 초면의 서먹함을 빠르게 녹여주기도 했고, 어쩐지 그 사람 성격이 게임 플레이에 녹아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해서 그 사람이 더 잘 이해되는 거 같기도 하고요. 한때 농담 삼아서, 아는 애가 애인 생기면 보드게임 모임에 데려오라고 그랬어요, 보드게임 몇 개 돌려 보면 성격 파악해 줄 수 있다고요(뱅을 해 보면 거짓말을 잘 하는지 알 수 있고 어쩌고).

보드게임 애호가와 결혼하고 나니, 여러 사람 두루두루 만나지 않고도 채워지는 것이 생겼습니다. 둘이 공통분모가 여러 가지인데 그 중에 특히나 보드게임이 있어서, 집에서 둘 다 내키면 원하는 게임을 꺼내서 즐기기 수월하다는 것이 큰 장점이더라구요(‘아컴호러 카드게임: 끝맺지 못한 의식’을 평일 저녁 하루에 한두 시나리오씩 하면서 일주일만에 클리어하는 위업도 달성했죠). 주말에 게임 다섯 개쯤 돌리고 나면 “이번 주말은 알차게 보냈다”는 말이 나오고 말입니다.

이 사람과 결혼하기 전에 했던 이런저런 상상 중에는, 결혼을 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 보드게임에 관심이 없거나 게임을 싫어한다면 내가 가진 게임들을 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게 있었는데, 그때는 가진 보드게임을 다 처분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해받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설득하는 일은 참 피곤하더라고요. 그리고 보통, 좋은 게 없으면 아쉬운 대로 버텨도 싫은 게 있으면 견디지 못하는 게 사람이기도 하고요. 몇 년 만에, “그걸 왜 버려? 각자 즐거움을 인정하는 관대함이 있어야지!”로 생각이 바뀌었지만요.

 

각자의 게임을 하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항상 서로의 옆자리에서 합니다. 아직 그런 생각을 하기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지만(?), 서로 다른 게임을 하고 있다고 해서 관계적으로 삭막해지는, 상투적인 드라마 설정 같은 일이 벌어지진 않더군요. 한두 시간을 각자 화면에 코박고 있다가도 옆에서 “으악” 소리 나면 (아내는 모리블린 정신없이 때리면서, 저도 귀부기사 공격 피한다고 열심히 구르기하면서) “무슨 일이에요?”하고 묻기도 합니다. 자기 전에 누워서는 폰으로 공략 같이 보기도 하고, 옆에서 이런저런 플레이 팁도 주고 해요.

아내의 ‘젤다의 전설’도, 저의 ‘엘든 링’도 이제 극후반부로 접어들었습니다. 벌써 아내는 이 다음에 ‘디아블로 3’ 26시즌을 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스위치로 같이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으로 시작했던 게 처음에 ‘마리오카트’와 ‘디아블로 3’였거든요. ‘젤다의 전설’도 아주 재미있지만 저랑 같은 게임을 하는 게 그래도 더 좋다고 하는 아내를 위해 ‘잇 테익스 투’도 다운을 받아놓았습니다. ㅎㅎ 물론 저는 이제 막 콘솔 게임 맛을 들이기 시작한 아내를 위해 ‘언차티드’와 ‘호라이즌 제로 던’ 같은 굵직한 게임들을 내밀며 더 유혹할 심산이긴 하지만, 어쨌든 뭐든 함께 하는 걸 좋아하는 두 사람으로서 다시 보드게임을 붙잡는 시점이 오겠죠. 어차피 영원히 디지털 게임만 하지 않을 거라고 둘 다 생각하거든요. 영원히 보드게임만 하지도 않을 거고. 돌고 도는 거겠죠.

그때가 오면 “어머 이건 사야 해”를 외치며 밀봉해 둔 게임들도 하나둘 깔 겁니다. 고이 모셔둔 킥스 게임도, 아직 정리 시작도 안 한 ‘돌아온 끝맺지 못한 의식’도 자리를 찾고 게임판에 펼쳐지겠죠. 하지만, ‘아컴호러 카드게임’을 할 때도 그러하듯, 시작했으면 끝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엔딩을 앞두고 꺼내지 않고 있는 디센트 의문의 1패…). 아내가 가논을 잡고 제가 엘데의 짐승을 조질 때까지는 둘 다 관대하게, 각자의 게임을 즐기게 둘 겁니다. (그리고 조져지는 것은 언제나...)

 

 

말 나온 김에 다음 주에는 프롬과 디센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사실 원고 플랜은 진작 짜져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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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Lv.26 보덕
    • 2022-04-13 17:53:04

    글을 읽어 내려가다 문득 '워너비'란 단어가 떠올랐네요. 저 포함, 같은 취미의 연인을 만나는 건 거의 대부분의 보드게이머의 바람이 아닐까 싶은데요. 모니터 두 대에 다른 색의 게임이 돌아가는 모습은 참 신기하게 보입니다 +_+
    • 관리자 신나요
    • 2022-04-13 17:56:19

    저도 게임 한창 하다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풍경이 꽤 재미있어서 찍어 보았답니다. ㅎㅎㅎ
    • Lv.47 채소밭
    • 2022-04-13 17:55:56

    저희 부부 얘기인 줄 알았습니다.ㅋㅋㅋ 보드게임 비중이 더 높기는 하지만요.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 응원합니다! 글 너무 재밌게 읽었으니 자주 써 주세요.ㅎㅎ
    • 관리자 신나요
    • 2022-04-13 17:57:15

    나혼자 연재를 마음먹고 일주일에 한 편씩 올리자 하고 있습니다 ㅋㅋㅋㅋ 읽어주신다면야 그저 감사하지요. ㅎㅎ
    • Lv.31 Van.D.Z
    • 2022-04-13 18:40:20

    피시방인줄
    • 관리자 신나요
    • 2022-04-13 18:48:17

    가끔 정신 들면 그런 생각 듭니다 저도... ㅋ
    • Lv.40 리클러스
    • 2022-04-13 20:09:06

    아 참 끝맺지 못한 의식 정리해야지
    • 관리자 신나요
    • 2022-04-14 13:29:24

    얼른 정리하시죠 ㅎㅎ
    • Lv.53 상후니
    • 2022-04-13 21:58:20

    야숨과 엘든링이라니 판타지 오픈월드의 양대산맥ㄷㄷ너무 보기 좋고 부러운 모습이에요ㅎㅎ
    한편으로는 배워야될 모습이기도 하네요!
    저도 다행이 짝궁과 취미가 맞아서 두분같은
    모습의 생활을 꿈꿔보게 되네요ㅎㅎ
    • 관리자 신나요
    • 2022-04-14 13:29:49

    아무렴요 되고 말고요 ㅎㅎㅎ
    • Lv.21 doerui
    • 2022-04-14 17:12:01

    ㅋㅋ남자친구랑 스위치 모동숲에서 열심히 무주식 노가다하면서 대출 다 갚고 서로 엄청 뿌듯했던 기억이 나네요ㅋㅋㅋㅋㅋㅋ그리고 서로 다른 게임을 해도 옆에 있으면 성취감이 전달되더라구요 왠지 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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