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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잘 깔려있는 멍석, 서스펙트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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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4 12: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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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31 [개굴이]
이 리뷰는 2021.9.28. 커뮤니티 "보드라이프"에 게시했던 리뷰글을 다듬은 글입니다. 2022 시점 발매된 게임들에 대한 의견은 포함되어있지 않아요 :)
-1. 리뷰에 앞서
서스펙트 게임은 당연하게도 범인이 누군지, 어떤 트릭인지 알면 게임에서 얻을 수 있는 재미의 대부분이 날아갑니다. 리뷰를 여러 날에 거쳐 작성하고, 여러 번 수정했는데 알게모르게 스포성 발언이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좋은 게임을 소개함에 있어서 재미를 훼손시키지 않도록 여러 번 생각하여 구체적인 서사에 대한 내용은 의도적으로 완전히 덜어내고, 대부분은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 위주로 풀어나갔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약간의 스포도 싫다 하시는 분들은 보지 않으시는걸 추천합니다.
0. Suspect Game
유난히도 무덥던 여름날. 당신은 업무 접대 차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몸을 뉘였지만 잠이 오지 않습니다. 계약을 빌미로 부하직원 대하듯이 당신을 부려먹던 거래처 직원, 그리고 왜인지 모르게 넋이 나간 표정으로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리고 있던 그의 부사수, 당신에게 자꾸 치근거리는 전속 캐디까지. 그날의 일정은 업무도, 골프도 평소와 달리 모래알을 씹는 기분이었고 그 불편한 자리가 끝이 났음에도 껄끄러운 감각은 여전히 당신의 혀 아래에서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아마 방금 전 숙소 입구에 앉아있던 산장주인이 도대체 왜 방에서 담배를 피우냐며 비흡연자인 당신을 들들 볶았던 일도 한 몫 거들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날 밤, 당신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쿵!" 하는 소리에 눈을 뜹니다. 꿈이었을까요? 아니면 누가 무엇인가 떨어뜨린 소리였을까요. 몽롱한 정신을 다시 의식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며, 당신은 다시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낯선 소란스러움에 숙소에서 깬 당신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걸 느낍니다.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요.
부랴부랴 방에서 나온 당신은 옆 방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거래처 직원을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맙니다. 더군다나 경찰에 신고한 숙소 주인의 말로는 숙소로 오는 터널이 갑작스런 사고로 붕괴되어 경찰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우리 사이에 살인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인가요?"
누구였는지 모를 그 한마디에 서로가 서로를 보는 눈빛이 변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다들 한 걸음, 두걸음씩 서로에게서 물러났습니다.
당신은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사실 죽은 직원에게 매번 계약마다 회사 경비를 부정처리하여 일정량의 <후원금>을 찔러주고 있었거든요. 혹시 그 일이 잘못되어서 이런 사단이 일어난건 아닐까요? 아니, 누군가 이미 그 사실을 깨달은건 아닐까요? 아니, 어쩌면 누군가 당신을 함정에 빠뜨린 것 일 수도 있겠네요. 얼른 누가 이 일의 범인인지 알아내고, 그를 묶던 가두던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부당거래 흔적이 남아있다면 어떻게든 숨겨야 합니다. 그 일이 드러난다면 회사에서 손해배상 소송을 걸 게 불 보듯 뻔하니까요.
테이블에 모든 일행이 모여앉았습니다. 지금부터 각자의 짐을 뒤지고, 서로의 흔적을 캐물으며 살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오늘 이야기 할 게임은 코보게의 야심작, 서스펙트 게임입니다.
▲ 추리게임의 탈을 쓴 퍼즐게임이 넘치는 이 시대, 범죄를 소재로 한 정통 머더 미스테리가 선물처럼 찾아왔습니다.
1. 어떤 게임인가?
몇 년 전 한국에 머더미스테리를 예능으로 구현한 "크라임 씬" 이라는 예능이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크라임 씬은 그 인기에 힘입어 시즌 3까지 제작이 되었고, 나아가 방탈출 카페에 이은 체험형 카페로 크라임씬 카페라는 신 업종을 등장시키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제 머더 미스테리나 클로즈드 서클 미스테리보다 크라임씬이라는 단어가 더 장르를 대변할 정도로요. (이하 머더미스테리, 클로즈드 서클 미스테리 장르를 크라임씬 장르로 칭하겠습니다.) 서스펙트 게임은 이런 머더 크라임씬 장르를 보드게임으로 <아주> <잘> 옮겨온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각자 캐릭터를 하나씩 맡아 롤카드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롤 카드에는 공통적으로 적혀있는 간단한 사건의 개요와, 캐릭터마다 주어진 고유 정보인 캐릭터의 배경이야기와 그 날의 행적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플레이어들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이 롤카드를 보고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파악합니다.
그리고 본 게임에 들어가면 각각 사건 현장의 등장인물이 되어 선 플레이어부터 돌아가면서 한 번씩의 조사를 합니다. 조사를 할 때마다 조사 장소에 해당하는 카드를 가져와서 확인하고, 한 바퀴를 돌아 모든 플레이어가 조사를 마치면 각자 돌아가면서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다른 플레이어에게 말합니다. 모든 플레이어가 조사 내용을 발표했다면 간단한 토론을 거친 뒤 다음 라운드로 진행, 이렇게 12번의 라운드가 종료되면 최종 범인 투표를 한 후, 변론과 재 투표과정을 거쳐 결과를 확인합니다.
예능을 보신 분이라면 직관적으로 알 수 있죠? 크라임씬의 플레이 방식을 그대로 보드게임으로 옮겨왔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탐정의 유무라거나, 크라임씬 예능에서는 정해진 시간동안 사건현장을 원하는만큼 탈탈 털어대는 반면, 서스펙트 게임은 정해진 횟수만큼의 조사를 진행한다는 것 정도의 차이에요.
2. 지금까지의 클로즈드 서클 미스테리 보드게임
사실 이런 크라임씬 게임은 일전에 다른회사에서 <캐치 크라임>이라는 이름으로 한 번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 게임 역시 리뷰했었는데, 아마 <단점이 많은 게임이지만 현재 대체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게임> 이라는 평을 했던걸로 기억해요. 저는 이제 그 게임에 대한 평가를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서스펙트 게임이 아주 훌륭한 대체제가 되었거든요.
일반적인 보드게임(특히 전략게임)들은 대부분 게임의 메커니즘을 즐기는 것이 목적입니다. 각각의 게임의 드라마, 다시 말해 테마는 어디까지나 그 메커니즘을 맛깔나게 즐기기 위한 보조 개념이에요. 물론 테마가 얼마나 메커니즘과 연관성이 있느냐 등에 따라 더 몰입하고 아니고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저런 게임들에서 테마가 큰 역할을 차지하지는 않죠. 예를 들어 리스보아의 돈의 단위는 헤알이고 케일러스의 돈의 단위는 데니어에요. 하지만 보통은 1[원] 이라고 하시잖아요? 버건디의 성이 재미있긴 하지만 테마를 간소화킨다거나 아예 우주 테마로 바꾼다고 해도 게임성이 크게 달라지진 않죠. 반면에 크라임씬 장르의 경우는 얘기가 살짝 다릅니다. 메커니즘도 중요하지만 컨텐츠 소모의 메인은 어디까지나 "드라마"거든요. 여러 판이 가능한 일반적인 게임과 달리 이런 드라마 체험형 게임은 여러 번 플레이 할 수가 없어요. 당연한 얘기겠죠. 범인을 알고 하는 추리란건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유형의 게임은 그 서사를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주는 것이 곧 게임의 상품성과 직결됩니다.
자, 제작사에서 이런 크라임씬 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했고 베스트셀러 작가의 도움을 받아 굉장한 시나리오를 만들었다고 할까요? 당연히 제작사는 그 멋진 시나리오를 모든 플레이어들이 온전히 즐기기를 원할거에요. 그래서 플레이어들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갈 수 없는 시스템을 구현했다고 하죠. 하지만 이렇게 해 버린다면 플레이어들은 마치 철로 위에 놓인 기차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체험을 하게 될 거에요. 난 보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시스템은 여러분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거든요. 그리고 게임이 끝난 후 플레이어들은 "이럴거면 그냥 소설책을 읽는게 낫지 않아?" 라는 이야기를 하겠죠. 그렇다고 플레이어들의 자유도를 마냥 풀어버린다는 것 역시 어불성설일거에요. 이러한 넓은 자유도는 플레이어 그룹마다의 영웅적 대 서사시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반대로 제작사가 마련해둔 클라이막스에 다다르지 못하고 동네 히어로도 채 되지 못한 채로 애매하고 찝찝하게 플레이를 마무리한다...라는 리스크도 있을테니까요.
다시 말해 그룹별로 경험의 개별화가 될 수 있도록 그 세세한 지류에는 차이를 두는 동시에 <제작사에서 의도한 메인 컨텐츠는 어느정도 큰 줄기에서 대동소이한 체험을 할 수 있있는> 환경이 중요해요. 단순히 우리끼리 소그룹에서 만들고 소비하는 컨텐츠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공산품이잖아요? 그래서 이런 장르의 경우 자유도를 어디까지 설정해야 하느냐의 저울질이 곧 게임(이자 공산품으로서)의 완성도를 가름하는 척도가 됩니다.
그럼 이런 관점에서 크라임씬을 보드게임으로 옮겨온 경우를 살펴볼까요?
오프라인 머더 미스테리의 경우는 큰 문제가 되지 않다가 이를 보드게임으로 옮기며 불거지는 플랫폼적인 한계점이 있습니다. 바로 플레이어와 오브젝트간의 자유로은 상호작용이 불가능하다는 점이에요. 자. 여러분들의 앞에 자동차가 한 대 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자동차에서 무엇인가 교통사고의 흔적을 찾아보는 상황을 가정해볼까요? 당연히 범퍼에 핏자국이 있는지 확인해야 할 거에요. 트렁크에 시체가 있지는 않을까요? 블랙박스에 찍힌게 있을 수도 있을거고, 대시보드 위의 방향제가 쓰러져서 흐른 자국이 있는데 어쩌면 급정거를 하다가 쓰러진건 아닐까요? 하지만 보드게임에서 이러한 단서를 구현하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자동차에 <1> 이라고 써있고 거기를 선택하면 <1>번 카드를 가져와서 거기에 써있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에요.
▲이렇게 하고 싶어도 보드게임에서는 그 마음을 억눌러야 합니다.
다시 말해 보드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을 미리 정해두고, 이를 얻을 수 있는 스팟을 정확하게, 이를테면 장소에 숫자를 써주고 해당 숫자의 카드를 획득하는 식으로 제공해줍니다. 그런데 이게 참 그래요. 예를들어 단서 탐사의 자유도를 높이기 위해서 플레이어들이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50개뿐인데 증거를 100개 준비해둔다면? 각 그룹별로 경험의 차별화는 가져올 수 있지만 그 반작용으로 정말 중요한 정보를 놓치는 그룹도 생길테고 이런 부분은 앞서 말했듯 상품성이 결여된다는 의미로 이어질 수 있어요. 운이 나빠서 중요 단서를 발견하지 못해 범인을 잡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그러니 보드게임에서는 어쩔 수 없이 게임 종반쯤 되면 준비한 대부분의 증거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 이번엔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돌려볼게요. 어쩌면 캐치크라임의 모티브가 되는 크라임씬이 포문을 열어버린 부분인데요, 기존의 크라임씬 장르는 범인을 제외한 모든 플레이어가 진실만을 말해야한다는 규칙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범인을 맡은 플레이어는 유일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데요, 주변 플레이어의 말과 아직 다른 플레이어들이 파악하지 못한 진상을 토대로 자신의 행적을 잘 감추고, 꾸며내야하죠. 당연히 다른 플레이어들은 본인이 범인이 아니라면 행적에 대해 굳이 감출 필요가 없어요. 범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진실만 말한다면 어딘가에는, 혹은 누군가에겐 결정적인 증거가 있을테니까요.
이 두 가지의 특징이 결합되어 결국 보드게임 플랫폼에서의 크라임씬 게임은 종국에 다다르면 모든 플레이어가 자신이 찾은 모든 증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것으로 추리를 해 나가는 상황에 이르르게 됩니다. 이걸 반대한다면 그건 당연히 범인일테니까요. 그러니 이런 게임에서는 당연히 범인이 불리할 수 밖에 없는거에요. 만약 이러한 구조에서 범인을 못잡고 헛다리를 짚었다면 십중팔구 이유는 하나에요. 단서와 시나리오를 구성함에 있어서 모든 단서들을 모아서 큰 그림을 보았을 때 한 명의 범인을 가리키는게 아니라, 최종국면에서의 단서 수집 상황에 따라 누구든 범인이 될 수 있는 상황이 되도록 만든겁니다. 게임을 하고 나서 "야 솔직히 이건 누가 범인이라도 이상한거 아냐?" 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거에요.
3. 팀 서스펙트, 여러분들은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었나요?
그렇다면 서스펙트 게임은 이런 물음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고 있을까요?
일단 플랫폼적 한계에 대해서는 아쉽지만 유사한 한계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캐치크라임처럼 서스펙트게임도 게임 종반이 되면 대부분의 그룹이 범인을 색출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몇 장 정도의 오차범위 내에서 거의 동일한 형태로 보유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번뜩이는 재치로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증거를 찾아낸다거나 하는 드라마는 허용되지 않아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서스펙트 게임은 이 문제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굉장히 영리한 장치를, 그것도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장치를 마련해두었거든요.
스파이폴이나 가짜예술가 뉴욕에 가다 류의 게임을 보면 스파이, 혹은 가짜예술가가 들통나더라도 주어진 제시어를 맞추면 역전 승리를 할 수 있는 규칙이 있습니다. 이 규칙 때문에 위 두 게임에서는 일반 플레이어가 자신의 진실을 온전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지 못하죠. 까딱하면 범인에게 승리로 가는 게이트를 열어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일반 플레이어들은 "나는 범인이 아니지만 적어도 이정도는 말해줄 수 있어" 라는 식으로 플레이가 강요되어 테이블 위에 풀리는 단서의 양을 자체적으로 조율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치를, 서스펙트 게임은 과감하게 들여옵니다.
일단 장치에 대해 말씀을 드릴게요. 서스펙트 게임에 등장하는 범인이 아닌 플레이어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을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비밀은 회사의 공금을 횡령해온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의 비밀은 피해자와 사건 전날 만났었다거나 이런 식으로요. 그리고 게임이 종료된 후 범인을 정상적으로 검거했더라도 범인이 다른 플레이어의 비밀을 정확하게 캐치해냈다면 그 플레이어는 범인과 함께 패배하게 되며, 범인이 모든 플레이어의 비밀을 모두 추리해냈다면 범인이 혼자 승리하게 됩니다. 따라서 범인이 잡히냐 안잡히냐의 결과밖에 없던 기존의 크라임씬 게임과 달리 서스펙트게임은 범인을 잡았냐 안잡았냐, 범인을 잡았다면 이번에는 내 비밀이 들켰는지 아닌지라는 추가적인 루트가 생깁니다. 즉 일반 플레이어에게 승리조건이 늘어난거에요. 범인을 잡는다 + 내 비밀을 숨긴다, 이렇게요.
이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무엇을 유도하는가를 보면 소름이 돋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불리한 증황을 잡는다? 당연히 달갑지 않은 일일겁니다. 그러니 그런 증거는 제가 빠르게 회수해야겠죠? 하지만 제가 가지고 온 증거에 대해 거짓말을 할 수 없다면 먼저 회수한다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겠죠. 이 타이밍에 서스펙트 게임은 여러분들에게 변죽좋게 이야기합니다.
"숨기고싶어? 범인이 아닌 사람도 거짓말 해 그럼"
서스펙트게임은 플레이어들에게 반드시 감춰야 하는 비밀(주로 뒤가 구린 사실들)을 제공함으로서 그걸 숨겨야 할 당위성을 부여하고, 숨긴다는 행위는 다시 이번엔 거짓말을 하는 행위에 당위성을 부여하게 됩니다. 따라서 서스펙트 게임에서는 자연스럽게 "보유중인 정황을 모두 테이블 위에 올려두어 범인을 추려내는" 간단한(그리고 정석적인, 나아가 맥빠지는) 플레이방식을 써먹을 수 없어요. 아발론에서 내가 멀린이고 딱 그림보니까 얘랑 얘가 악당인데 지금 말을 꺼냈다가는 빼도박도 못하고 멀밍아웃하게 되는 상황, 한 번쯤 있으시죠? 이런 상황을 크라임씬 장르에서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도 실제로 굉장히 의심스러운 인물이 굉장히 의심스러운 시간에 굉장히 의심스러운 짓을 하는것을 캐치했음에도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다간 제가 왜 그 장소에 있었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했거든요.
이는 범인 입장에서 사건이 너무 맥없이, 혹은 어이없는 방향으로 해결되지 않도록 함과 동시에 일반 플레이어들에게는 범인을 수사하는걸 넘어서 자신의 비밀을 지켜야 하는 역할을 하나 더 부여합니다. 플레이의 경험이 풍부해지는건 두 손 들어 환영할만한 일이에요. 더불어 게임 국면이 종반으로 다가올수록 플레이어들이 마지못해 하나씩 하나씩 실마리를 내놓는 그림을 만들어줍니다. 이걸 오픈하면 나한테 정말 불리한데, 그렇다고 이걸 쥐고 있으면 범인을 잡을 수 없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끝의 끝에 가서야 오픈하는거에요. 그리고 이렇게 새로 등장한 증거와 누적된 증거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고조시켜 클라이막스를 때려주는 역할을 해줍니다. "1라운드에는 하나, 2라운드에는 두개의 단서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뭐 이런 방식의 멋없는 방법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증거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도록 게임의 템포를 조절하는거죠. 게임 하는 내내 굉장히 영리한 장치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어요.
또, 이는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 위해, 새로운 말을 꾸며내도록 유도합니다. 즉 플레이어가 주어진 레일 위를 걷는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서사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줍니다. 네.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종종 사고친걸 감추기 위해서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을 게임에서 하도록 시키고 있는거죠. 굉장히 능청스럽게도 말이에요.
결과적으로 증거를 보유하는 것과 공개하는 것을 분리하도록 만드는 이 장치를 통해 모든 플레이어에게 거의 유사한 컨텐츠를 <제공> 하여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컨텐츠를 <가공>하는 것은 전적으로 플레이어에게 맡겨 자유도도 잡아내는 쾌거를 이룹니다. 이게 바로 팀 서스펙트의 대답이에요.
4. 중요한것은
그래서 재미있느냐의 문제겠죠?
예전에 왓슨 앤 홈즈를 하면서 느꼈던 감정인데, 이런 류의 게임이 사실 많이 없잖아요? 안그래도 목이 말라있는 시장에서 서스펙트게임은 단단한 짜임새로 플레이어들을 말 그대로 게임 속에 가두어버려요. 저는 6주동안 아내를 포함한 4인팟을 돌렸는데요, 해당 게임이 종료된 후 그 자리에서 바로 롤 카드를 배부하고 해당 롤을 2주간 숙지하게 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맡을 등장인물의 타임테이블을 살펴보고, 현재 가장 불안한 물건(혹은 정황)은 무엇인지, 그리고 해당 물건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회수해야 하는지, 회수한 다음에는 어떻게 증거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인지, 혹시 누군가 이 증거를 발견했다거나 해서 거짓말이 들통났을 때 어떻게 둘러댈 것인지 등등 충분한 시간을 주고 등장인물에 몰입을 했습니다. 아내의 경우는 꿈에 나왔다고 할 정도로요.
▲ 저희 부부는 최소 3일 정도는 자기 스크립트 분석하고 행적 정리하고 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런 준비를 거쳐 게임에 돌입하면 두 말 할 것도 없죠. 테이블에 앉는 순간 이미 재미있을 수 밖에 없어요. 범인은 범인같이, 범인이 아닌 사람은 범인이 아닌 것 같이, 자신의 행적을 정말 자신의 행적처럼 소상히 이야기하면서 추리를 해 나가는 것. 이러한 프로세스가 철두철미하게 이루어지는 순간 우리는 테이블 위의 보드게임 플레이어가 아니라 무대 위의 등장인물이 되어 게임이 아니라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당연히 이러한 <경험>이 이런 게임 장르의 궁극적인 지향점이고요. 2020년대 들어서서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하는 많은 게임이 등장하고 있지만 이러한 게임들 역시 앞서 언급했던 메커니즘을 즐기는 게임이 대다수입니다. 그런 게임들의 한 가운데에서 스토리를 즐기는데 치중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게임이에요.
하지만 반대로 누군가가 자신의 캐릭터에 몰입하지 못한다면 이는 고스란히 단점으로 돌아올 수도 있어요. 물론 캐릭터에 이입해서 성격을 연기해가면서까지 플레이에 어울릴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모든 사람이 본인의 캐릭터의 시트, 나아가 조금만 욕심을 부리자면 비어있는 행적에 대한 변명까지는 정확히 파악하고 준비를 해야합니다. 위에서 예를 들었던 이야기라면 적어도 저는 저 직원과 그동안 <후원금>을 대가로 계약을 따내는 과정에서 영수증 처리가 애매하게 되어있다거나 하는 부분은 (당연히 저런 내용은 제 캐릭터 시트에 쓰여져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숙지하고 있어야해요. 나아가 내 캐릭터 시트에 범행시간 알리바이가 안써있거나 밝히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해당 시간에 대한 변명거리를 준비해야하고요. 만약 누군가 "영수증 기록하고 결재올린 내역하고 조금 차이가 있네요?" 라고 질문했는데 "모루겠소요. 여기 안나와있는데요?" 하면 그 순간 텐션이 확 떨어집니다. 모든 게임이 그렇지만 특히나 이 게임은 누구랑 어떻게 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게임이거든요.
앞서 시스템에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게임으로서의 테이스트도 확실히 갖추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돋보기 토큰인데요, 각 플레이어들은 일정 개수의 돋보기 토큰을 가지고 게임을 시작하며 이를 다른 플레이어가 보유중인 단서를 확인할 수 있어요.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걸 넘어서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 일종의 리스크를 부여해주는 시스템이죠. 그러니까 무턱대고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시스템들을 종합해보면 알 수 있죠? 게임의 디자이너는 게임 내내 플레이어들에게 [극에 몰입하기]를 강조하고 있는거에요. 더불어 기존의 크라임씬 장르를 보드게임으로 옮겨온 많은 게임에서 단서의 삽화는 단순히 삽화로만 기능을 할 뿐, 구체적인 정보는 텍스트로 주어졌던 것과 달리, 서스펙트 게임의 경우 가끔 텍스트로는 표현되지 않았음에도 단서의 삽화에 정보가 주어져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저에게는 플랫폼의 한계를 뛰어넘기위한 과감한 시도로 느껴졌어요. 돋보기 토큰을 통해서 여러 사람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싶은 단서는 둘 이상이 크로스체크를 하고 이를 논의하는 과정도 분위기가 살았구요.
물론 이 게임이 크라임씬 장르의 마스터피스냐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장르적 한계점이지만 서스펙트 게임도 Whydunit, 즉 동기 부분의 서사방식은 아무래도 조금 약하긴 해요. 네 명의 용의자 중 한 명의 용의자에게만 강력한 동기가 있으면 맥빠지는 전개가 일어날 수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는 한데, 사실 잘 만든 추리컨텐츠에서 Whydunit으로 얼마나 큰 서스펜스를 줄 수 있는지 생각하면 유저 입장에서는 조금 욕심을 부려봄직도 해요. 대표적으로 크라임씬 예능의 한 에피소드가 레전드로 칭송받는데, 이 에피소드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는 Whydunit이 무대로 확 올라오는 순간이거든요. 아무튼 서스펙트 추리의 메인 무대에서 whydunit의 비중을 살짝 줄인건 맞는데, 재미있는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인이 플레이어들의 동기를 밝혀내야하는 게임 구조가 역설적으로 Whydunit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고 있다는 부분이죠. 한 발의 총알로 여러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효율적인 구조였습니다.
아 그리고 이건 차기작에서는 좀 반영되었으면 하는 부분인데 튜토리얼이 없기 때문에 내 비밀에 대해 어디까지 숨겨야 하는지, 범인이라면 다른사람의 비밀에 대해 어떤방식으로 서술해야 하는지, 게임의 분위기가 어떤지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요소가 전무합니다. 때문에 시나리오 1은 감을 잡는 준비운동 정도로 작용할 수 있는 경우가 없잖아 있어요. 아싸리 게임 단서와 라운드수를 간소화한 튜토리얼을 하나 넣어주시면 좋았을텐데 말이에요.물론 팀 서스펙트의 오랜 개발기간을 거쳐 나온 네 개의 시나리오는 충분한 하나의 흐름을 이루어냈고, 여기에 짧은 시나리오를 굳이 더 붙일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셨을 수도 있긴 하겠지만... 플레이어로서는 그래요. 이만큼 맛있는 식사가 차려져있는데, 식사방법을 알려주지 않아서 그 맛을 오롯이 즐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서스펙트게임을 가장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그룹은 "이미 시나리오를 모두 끝낸 플레이어가 가이드를 봐주는 후속 4인 그룹"이 아닐까 싶어요.
5. 마치며
어떻게 이야기를 하다보니 부족한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긴 했는데, 당연히 대부분의 단점은 "저런 장르를 좋아하며 준비를 철저히 하는 플레이어"와 함께있다면 역으로 장점이 되어버립니다. 길게 이야기 할 것도 없어요. 같이 할 사람이 있고, 4명이 모일 수 있다면 서스펙트 게임은 안하면 손해입니다. 아시죠? 이런 게임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여기저기에 스포인듯 스포아닌 스포같은 스포가 떠다닌다는거. 이게 스포인지 아닌지 애매한 내용도 게임 몰입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품절이라는 단점도 있었는데 이제 그 단점은 극복되었으니 남은건 같이 할 사람만 모으면 됩니다. 빨리 움직이셔야 아직 안한 플레이어들을 그룹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거라구요.
어떤 컨텐츠든 "재미있다" 보다 좋은 평가는 "나만 하기 아깝다" 라는 평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함께 플레이 했던 아내와 입을 모아 내린 평가가 딱 저랬어요. "너무 재밌게 놀아서 다른사람도 해봤으면 좋겠다. 물론 내가 그 플레이에 참여하지는 못하겠지만 다른사람이 하는 것을 쳐다만 봐도 또 재미있을 것 같다." 라고요. 그리고 그 이후로 어디든 한 군데 내밀어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되었든 동료 선생님들이 되었든 꼭 한번 언젠간 플레이시켜보고 싶어요. 다시 말하지만 정말 "나만 하긴 아까운" 게임이에요 :) 아마 언젠가는 이런 크라임씬류 게임이 지금의 레거시시스템 유행현상이나 방탈출게임 유행현상처럼 산발적으로 발매될 지 모릅니다. 그리고 실제로 2022년 적잖은 크라임씬 장르 보드게임이 발매되었죠.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이런 장르가 메인스트림으로 발돋움한다면 서스펙트 게임은 분명히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거에요. 팬데믹 레거시가 레거시 시스템의 시초도 아니고 가장 재미있는 레거시 게임도 아니지만 레거시 게임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항상 좋은 평가를 받는 것 처럼 말이죠.
누군가의 게임을 이토록 애가 타게 기다렸던 적은 없었습니다. 시즌 1, 잘 깔아주신 멍석에서 원없이 잘 놀고 미련없이 털고 일어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 팀 서스펙트가 야심차게 준비한 두 번째 멍석위에서 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준비를 끝내셨나요?
-1. 리뷰에 앞서
서스펙트 게임은 당연하게도 범인이 누군지, 어떤 트릭인지 알면 게임에서 얻을 수 있는 재미의 대부분이 날아갑니다. 리뷰를 여러 날에 거쳐 작성하고, 여러 번 수정했는데 알게모르게 스포성 발언이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좋은 게임을 소개함에 있어서 재미를 훼손시키지 않도록 여러 번 생각하여 구체적인 서사에 대한 내용은 의도적으로 완전히 덜어내고, 대부분은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 위주로 풀어나갔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약간의 스포도 싫다 하시는 분들은 보지 않으시는걸 추천합니다.
0. Suspect Game
유난히도 무덥던 여름날. 당신은 업무 접대 차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몸을 뉘였지만 잠이 오지 않습니다. 계약을 빌미로 부하직원 대하듯이 당신을 부려먹던 거래처 직원, 그리고 왜인지 모르게 넋이 나간 표정으로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리고 있던 그의 부사수, 당신에게 자꾸 치근거리는 전속 캐디까지. 그날의 일정은 업무도, 골프도 평소와 달리 모래알을 씹는 기분이었고 그 불편한 자리가 끝이 났음에도 껄끄러운 감각은 여전히 당신의 혀 아래에서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아마 방금 전 숙소 입구에 앉아있던 산장주인이 도대체 왜 방에서 담배를 피우냐며 비흡연자인 당신을 들들 볶았던 일도 한 몫 거들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날 밤, 당신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쿵!" 하는 소리에 눈을 뜹니다. 꿈이었을까요? 아니면 누가 무엇인가 떨어뜨린 소리였을까요. 몽롱한 정신을 다시 의식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며, 당신은 다시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낯선 소란스러움에 숙소에서 깬 당신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걸 느낍니다.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요.
부랴부랴 방에서 나온 당신은 옆 방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거래처 직원을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맙니다. 더군다나 경찰에 신고한 숙소 주인의 말로는 숙소로 오는 터널이 갑작스런 사고로 붕괴되어 경찰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우리 사이에 살인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인가요?"
누구였는지 모를 그 한마디에 서로가 서로를 보는 눈빛이 변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다들 한 걸음, 두걸음씩 서로에게서 물러났습니다.
당신은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사실 죽은 직원에게 매번 계약마다 회사 경비를 부정처리하여 일정량의 <후원금>을 찔러주고 있었거든요. 혹시 그 일이 잘못되어서 이런 사단이 일어난건 아닐까요? 아니, 누군가 이미 그 사실을 깨달은건 아닐까요? 아니, 어쩌면 누군가 당신을 함정에 빠뜨린 것 일 수도 있겠네요. 얼른 누가 이 일의 범인인지 알아내고, 그를 묶던 가두던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부당거래 흔적이 남아있다면 어떻게든 숨겨야 합니다. 그 일이 드러난다면 회사에서 손해배상 소송을 걸 게 불 보듯 뻔하니까요.
테이블에 모든 일행이 모여앉았습니다. 지금부터 각자의 짐을 뒤지고, 서로의 흔적을 캐물으며 살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오늘 이야기 할 게임은 코보게의 야심작, 서스펙트 게임입니다.
▲ 추리게임의 탈을 쓴 퍼즐게임이 넘치는 이 시대, 범죄를 소재로 한 정통 머더 미스테리가 선물처럼 찾아왔습니다.
1. 어떤 게임인가?
몇 년 전 한국에 머더미스테리를 예능으로 구현한 "크라임 씬" 이라는 예능이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크라임 씬은 그 인기에 힘입어 시즌 3까지 제작이 되었고, 나아가 방탈출 카페에 이은 체험형 카페로 크라임씬 카페라는 신 업종을 등장시키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제 머더 미스테리나 클로즈드 서클 미스테리보다 크라임씬이라는 단어가 더 장르를 대변할 정도로요. (이하 머더미스테리, 클로즈드 서클 미스테리 장르를 크라임씬 장르로 칭하겠습니다.) 서스펙트 게임은 이런 머더 크라임씬 장르를 보드게임으로 <아주> <잘> 옮겨온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각자 캐릭터를 하나씩 맡아 롤카드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롤 카드에는 공통적으로 적혀있는 간단한 사건의 개요와, 캐릭터마다 주어진 고유 정보인 캐릭터의 배경이야기와 그 날의 행적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플레이어들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이 롤카드를 보고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파악합니다.
그리고 본 게임에 들어가면 각각 사건 현장의 등장인물이 되어 선 플레이어부터 돌아가면서 한 번씩의 조사를 합니다. 조사를 할 때마다 조사 장소에 해당하는 카드를 가져와서 확인하고, 한 바퀴를 돌아 모든 플레이어가 조사를 마치면 각자 돌아가면서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다른 플레이어에게 말합니다. 모든 플레이어가 조사 내용을 발표했다면 간단한 토론을 거친 뒤 다음 라운드로 진행, 이렇게 12번의 라운드가 종료되면 최종 범인 투표를 한 후, 변론과 재 투표과정을 거쳐 결과를 확인합니다.
예능을 보신 분이라면 직관적으로 알 수 있죠? 크라임씬의 플레이 방식을 그대로 보드게임으로 옮겨왔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탐정의 유무라거나, 크라임씬 예능에서는 정해진 시간동안 사건현장을 원하는만큼 탈탈 털어대는 반면, 서스펙트 게임은 정해진 횟수만큼의 조사를 진행한다는 것 정도의 차이에요.
2. 지금까지의 클로즈드 서클 미스테리 보드게임
사실 이런 크라임씬 게임은 일전에 다른회사에서 <캐치 크라임>이라는 이름으로 한 번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 게임 역시 리뷰했었는데, 아마 <단점이 많은 게임이지만 현재 대체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게임> 이라는 평을 했던걸로 기억해요. 저는 이제 그 게임에 대한 평가를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서스펙트 게임이 아주 훌륭한 대체제가 되었거든요.
일반적인 보드게임(특히 전략게임)들은 대부분 게임의 메커니즘을 즐기는 것이 목적입니다. 각각의 게임의 드라마, 다시 말해 테마는 어디까지나 그 메커니즘을 맛깔나게 즐기기 위한 보조 개념이에요. 물론 테마가 얼마나 메커니즘과 연관성이 있느냐 등에 따라 더 몰입하고 아니고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저런 게임들에서 테마가 큰 역할을 차지하지는 않죠. 예를 들어 리스보아의 돈의 단위는 헤알이고 케일러스의 돈의 단위는 데니어에요. 하지만 보통은 1[원] 이라고 하시잖아요? 버건디의 성이 재미있긴 하지만 테마를 간소화킨다거나 아예 우주 테마로 바꾼다고 해도 게임성이 크게 달라지진 않죠. 반면에 크라임씬 장르의 경우는 얘기가 살짝 다릅니다. 메커니즘도 중요하지만 컨텐츠 소모의 메인은 어디까지나 "드라마"거든요. 여러 판이 가능한 일반적인 게임과 달리 이런 드라마 체험형 게임은 여러 번 플레이 할 수가 없어요. 당연한 얘기겠죠. 범인을 알고 하는 추리란건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유형의 게임은 그 서사를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주는 것이 곧 게임의 상품성과 직결됩니다.
자, 제작사에서 이런 크라임씬 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했고 베스트셀러 작가의 도움을 받아 굉장한 시나리오를 만들었다고 할까요? 당연히 제작사는 그 멋진 시나리오를 모든 플레이어들이 온전히 즐기기를 원할거에요. 그래서 플레이어들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갈 수 없는 시스템을 구현했다고 하죠. 하지만 이렇게 해 버린다면 플레이어들은 마치 철로 위에 놓인 기차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체험을 하게 될 거에요. 난 보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시스템은 여러분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거든요. 그리고 게임이 끝난 후 플레이어들은 "이럴거면 그냥 소설책을 읽는게 낫지 않아?" 라는 이야기를 하겠죠. 그렇다고 플레이어들의 자유도를 마냥 풀어버린다는 것 역시 어불성설일거에요. 이러한 넓은 자유도는 플레이어 그룹마다의 영웅적 대 서사시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반대로 제작사가 마련해둔 클라이막스에 다다르지 못하고 동네 히어로도 채 되지 못한 채로 애매하고 찝찝하게 플레이를 마무리한다...라는 리스크도 있을테니까요.
다시 말해 그룹별로 경험의 개별화가 될 수 있도록 그 세세한 지류에는 차이를 두는 동시에 <제작사에서 의도한 메인 컨텐츠는 어느정도 큰 줄기에서 대동소이한 체험을 할 수 있있는> 환경이 중요해요. 단순히 우리끼리 소그룹에서 만들고 소비하는 컨텐츠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공산품이잖아요? 그래서 이런 장르의 경우 자유도를 어디까지 설정해야 하느냐의 저울질이 곧 게임(이자 공산품으로서)의 완성도를 가름하는 척도가 됩니다.
그럼 이런 관점에서 크라임씬을 보드게임으로 옮겨온 경우를 살펴볼까요?
오프라인 머더 미스테리의 경우는 큰 문제가 되지 않다가 이를 보드게임으로 옮기며 불거지는 플랫폼적인 한계점이 있습니다. 바로 플레이어와 오브젝트간의 자유로은 상호작용이 불가능하다는 점이에요. 자. 여러분들의 앞에 자동차가 한 대 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자동차에서 무엇인가 교통사고의 흔적을 찾아보는 상황을 가정해볼까요? 당연히 범퍼에 핏자국이 있는지 확인해야 할 거에요. 트렁크에 시체가 있지는 않을까요? 블랙박스에 찍힌게 있을 수도 있을거고, 대시보드 위의 방향제가 쓰러져서 흐른 자국이 있는데 어쩌면 급정거를 하다가 쓰러진건 아닐까요? 하지만 보드게임에서 이러한 단서를 구현하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자동차에 <1> 이라고 써있고 거기를 선택하면 <1>번 카드를 가져와서 거기에 써있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에요.
▲이렇게 하고 싶어도 보드게임에서는 그 마음을 억눌러야 합니다.
다시 말해 보드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을 미리 정해두고, 이를 얻을 수 있는 스팟을 정확하게, 이를테면 장소에 숫자를 써주고 해당 숫자의 카드를 획득하는 식으로 제공해줍니다. 그런데 이게 참 그래요. 예를들어 단서 탐사의 자유도를 높이기 위해서 플레이어들이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50개뿐인데 증거를 100개 준비해둔다면? 각 그룹별로 경험의 차별화는 가져올 수 있지만 그 반작용으로 정말 중요한 정보를 놓치는 그룹도 생길테고 이런 부분은 앞서 말했듯 상품성이 결여된다는 의미로 이어질 수 있어요. 운이 나빠서 중요 단서를 발견하지 못해 범인을 잡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그러니 보드게임에서는 어쩔 수 없이 게임 종반쯤 되면 준비한 대부분의 증거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 이번엔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돌려볼게요. 어쩌면 캐치크라임의 모티브가 되는 크라임씬이 포문을 열어버린 부분인데요, 기존의 크라임씬 장르는 범인을 제외한 모든 플레이어가 진실만을 말해야한다는 규칙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범인을 맡은 플레이어는 유일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데요, 주변 플레이어의 말과 아직 다른 플레이어들이 파악하지 못한 진상을 토대로 자신의 행적을 잘 감추고, 꾸며내야하죠. 당연히 다른 플레이어들은 본인이 범인이 아니라면 행적에 대해 굳이 감출 필요가 없어요. 범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진실만 말한다면 어딘가에는, 혹은 누군가에겐 결정적인 증거가 있을테니까요.
이 두 가지의 특징이 결합되어 결국 보드게임 플랫폼에서의 크라임씬 게임은 종국에 다다르면 모든 플레이어가 자신이 찾은 모든 증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것으로 추리를 해 나가는 상황에 이르르게 됩니다. 이걸 반대한다면 그건 당연히 범인일테니까요. 그러니 이런 게임에서는 당연히 범인이 불리할 수 밖에 없는거에요. 만약 이러한 구조에서 범인을 못잡고 헛다리를 짚었다면 십중팔구 이유는 하나에요. 단서와 시나리오를 구성함에 있어서 모든 단서들을 모아서 큰 그림을 보았을 때 한 명의 범인을 가리키는게 아니라, 최종국면에서의 단서 수집 상황에 따라 누구든 범인이 될 수 있는 상황이 되도록 만든겁니다. 게임을 하고 나서 "야 솔직히 이건 누가 범인이라도 이상한거 아냐?" 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거에요.
3. 팀 서스펙트, 여러분들은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었나요?
그렇다면 서스펙트 게임은 이런 물음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고 있을까요?
일단 플랫폼적 한계에 대해서는 아쉽지만 유사한 한계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캐치크라임처럼 서스펙트게임도 게임 종반이 되면 대부분의 그룹이 범인을 색출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몇 장 정도의 오차범위 내에서 거의 동일한 형태로 보유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번뜩이는 재치로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증거를 찾아낸다거나 하는 드라마는 허용되지 않아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서스펙트 게임은 이 문제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굉장히 영리한 장치를, 그것도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장치를 마련해두었거든요.
스파이폴이나 가짜예술가 뉴욕에 가다 류의 게임을 보면 스파이, 혹은 가짜예술가가 들통나더라도 주어진 제시어를 맞추면 역전 승리를 할 수 있는 규칙이 있습니다. 이 규칙 때문에 위 두 게임에서는 일반 플레이어가 자신의 진실을 온전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지 못하죠. 까딱하면 범인에게 승리로 가는 게이트를 열어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일반 플레이어들은 "나는 범인이 아니지만 적어도 이정도는 말해줄 수 있어" 라는 식으로 플레이가 강요되어 테이블 위에 풀리는 단서의 양을 자체적으로 조율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치를, 서스펙트 게임은 과감하게 들여옵니다.
일단 장치에 대해 말씀을 드릴게요. 서스펙트 게임에 등장하는 범인이 아닌 플레이어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을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비밀은 회사의 공금을 횡령해온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의 비밀은 피해자와 사건 전날 만났었다거나 이런 식으로요. 그리고 게임이 종료된 후 범인을 정상적으로 검거했더라도 범인이 다른 플레이어의 비밀을 정확하게 캐치해냈다면 그 플레이어는 범인과 함께 패배하게 되며, 범인이 모든 플레이어의 비밀을 모두 추리해냈다면 범인이 혼자 승리하게 됩니다. 따라서 범인이 잡히냐 안잡히냐의 결과밖에 없던 기존의 크라임씬 게임과 달리 서스펙트게임은 범인을 잡았냐 안잡았냐, 범인을 잡았다면 이번에는 내 비밀이 들켰는지 아닌지라는 추가적인 루트가 생깁니다. 즉 일반 플레이어에게 승리조건이 늘어난거에요. 범인을 잡는다 + 내 비밀을 숨긴다, 이렇게요.
이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무엇을 유도하는가를 보면 소름이 돋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불리한 증황을 잡는다? 당연히 달갑지 않은 일일겁니다. 그러니 그런 증거는 제가 빠르게 회수해야겠죠? 하지만 제가 가지고 온 증거에 대해 거짓말을 할 수 없다면 먼저 회수한다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겠죠. 이 타이밍에 서스펙트 게임은 여러분들에게 변죽좋게 이야기합니다.
"숨기고싶어? 범인이 아닌 사람도 거짓말 해 그럼"
서스펙트게임은 플레이어들에게 반드시 감춰야 하는 비밀(주로 뒤가 구린 사실들)을 제공함으로서 그걸 숨겨야 할 당위성을 부여하고, 숨긴다는 행위는 다시 이번엔 거짓말을 하는 행위에 당위성을 부여하게 됩니다. 따라서 서스펙트 게임에서는 자연스럽게 "보유중인 정황을 모두 테이블 위에 올려두어 범인을 추려내는" 간단한(그리고 정석적인, 나아가 맥빠지는) 플레이방식을 써먹을 수 없어요. 아발론에서 내가 멀린이고 딱 그림보니까 얘랑 얘가 악당인데 지금 말을 꺼냈다가는 빼도박도 못하고 멀밍아웃하게 되는 상황, 한 번쯤 있으시죠? 이런 상황을 크라임씬 장르에서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도 실제로 굉장히 의심스러운 인물이 굉장히 의심스러운 시간에 굉장히 의심스러운 짓을 하는것을 캐치했음에도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다간 제가 왜 그 장소에 있었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했거든요.
이는 범인 입장에서 사건이 너무 맥없이, 혹은 어이없는 방향으로 해결되지 않도록 함과 동시에 일반 플레이어들에게는 범인을 수사하는걸 넘어서 자신의 비밀을 지켜야 하는 역할을 하나 더 부여합니다. 플레이의 경험이 풍부해지는건 두 손 들어 환영할만한 일이에요. 더불어 게임 국면이 종반으로 다가올수록 플레이어들이 마지못해 하나씩 하나씩 실마리를 내놓는 그림을 만들어줍니다. 이걸 오픈하면 나한테 정말 불리한데, 그렇다고 이걸 쥐고 있으면 범인을 잡을 수 없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끝의 끝에 가서야 오픈하는거에요. 그리고 이렇게 새로 등장한 증거와 누적된 증거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고조시켜 클라이막스를 때려주는 역할을 해줍니다. "1라운드에는 하나, 2라운드에는 두개의 단서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뭐 이런 방식의 멋없는 방법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증거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도록 게임의 템포를 조절하는거죠. 게임 하는 내내 굉장히 영리한 장치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어요.
또, 이는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 위해, 새로운 말을 꾸며내도록 유도합니다. 즉 플레이어가 주어진 레일 위를 걷는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서사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줍니다. 네.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종종 사고친걸 감추기 위해서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을 게임에서 하도록 시키고 있는거죠. 굉장히 능청스럽게도 말이에요.
결과적으로 증거를 보유하는 것과 공개하는 것을 분리하도록 만드는 이 장치를 통해 모든 플레이어에게 거의 유사한 컨텐츠를 <제공> 하여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컨텐츠를 <가공>하는 것은 전적으로 플레이어에게 맡겨 자유도도 잡아내는 쾌거를 이룹니다. 이게 바로 팀 서스펙트의 대답이에요.
4. 중요한것은
그래서 재미있느냐의 문제겠죠?
예전에 왓슨 앤 홈즈를 하면서 느꼈던 감정인데, 이런 류의 게임이 사실 많이 없잖아요? 안그래도 목이 말라있는 시장에서 서스펙트게임은 단단한 짜임새로 플레이어들을 말 그대로 게임 속에 가두어버려요. 저는 6주동안 아내를 포함한 4인팟을 돌렸는데요, 해당 게임이 종료된 후 그 자리에서 바로 롤 카드를 배부하고 해당 롤을 2주간 숙지하게 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맡을 등장인물의 타임테이블을 살펴보고, 현재 가장 불안한 물건(혹은 정황)은 무엇인지, 그리고 해당 물건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회수해야 하는지, 회수한 다음에는 어떻게 증거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인지, 혹시 누군가 이 증거를 발견했다거나 해서 거짓말이 들통났을 때 어떻게 둘러댈 것인지 등등 충분한 시간을 주고 등장인물에 몰입을 했습니다. 아내의 경우는 꿈에 나왔다고 할 정도로요.
▲ 저희 부부는 최소 3일 정도는 자기 스크립트 분석하고 행적 정리하고 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런 준비를 거쳐 게임에 돌입하면 두 말 할 것도 없죠. 테이블에 앉는 순간 이미 재미있을 수 밖에 없어요. 범인은 범인같이, 범인이 아닌 사람은 범인이 아닌 것 같이, 자신의 행적을 정말 자신의 행적처럼 소상히 이야기하면서 추리를 해 나가는 것. 이러한 프로세스가 철두철미하게 이루어지는 순간 우리는 테이블 위의 보드게임 플레이어가 아니라 무대 위의 등장인물이 되어 게임이 아니라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당연히 이러한 <경험>이 이런 게임 장르의 궁극적인 지향점이고요. 2020년대 들어서서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하는 많은 게임이 등장하고 있지만 이러한 게임들 역시 앞서 언급했던 메커니즘을 즐기는 게임이 대다수입니다. 그런 게임들의 한 가운데에서 스토리를 즐기는데 치중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게임이에요.
하지만 반대로 누군가가 자신의 캐릭터에 몰입하지 못한다면 이는 고스란히 단점으로 돌아올 수도 있어요. 물론 캐릭터에 이입해서 성격을 연기해가면서까지 플레이에 어울릴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모든 사람이 본인의 캐릭터의 시트, 나아가 조금만 욕심을 부리자면 비어있는 행적에 대한 변명까지는 정확히 파악하고 준비를 해야합니다. 위에서 예를 들었던 이야기라면 적어도 저는 저 직원과 그동안 <후원금>을 대가로 계약을 따내는 과정에서 영수증 처리가 애매하게 되어있다거나 하는 부분은 (당연히 저런 내용은 제 캐릭터 시트에 쓰여져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숙지하고 있어야해요. 나아가 내 캐릭터 시트에 범행시간 알리바이가 안써있거나 밝히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해당 시간에 대한 변명거리를 준비해야하고요. 만약 누군가 "영수증 기록하고 결재올린 내역하고 조금 차이가 있네요?" 라고 질문했는데 "모루겠소요. 여기 안나와있는데요?" 하면 그 순간 텐션이 확 떨어집니다. 모든 게임이 그렇지만 특히나 이 게임은 누구랑 어떻게 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게임이거든요.
앞서 시스템에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게임으로서의 테이스트도 확실히 갖추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돋보기 토큰인데요, 각 플레이어들은 일정 개수의 돋보기 토큰을 가지고 게임을 시작하며 이를 다른 플레이어가 보유중인 단서를 확인할 수 있어요.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걸 넘어서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 일종의 리스크를 부여해주는 시스템이죠. 그러니까 무턱대고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시스템들을 종합해보면 알 수 있죠? 게임의 디자이너는 게임 내내 플레이어들에게 [극에 몰입하기]를 강조하고 있는거에요. 더불어 기존의 크라임씬 장르를 보드게임으로 옮겨온 많은 게임에서 단서의 삽화는 단순히 삽화로만 기능을 할 뿐, 구체적인 정보는 텍스트로 주어졌던 것과 달리, 서스펙트 게임의 경우 가끔 텍스트로는 표현되지 않았음에도 단서의 삽화에 정보가 주어져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저에게는 플랫폼의 한계를 뛰어넘기위한 과감한 시도로 느껴졌어요. 돋보기 토큰을 통해서 여러 사람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싶은 단서는 둘 이상이 크로스체크를 하고 이를 논의하는 과정도 분위기가 살았구요.
물론 이 게임이 크라임씬 장르의 마스터피스냐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장르적 한계점이지만 서스펙트 게임도 Whydunit, 즉 동기 부분의 서사방식은 아무래도 조금 약하긴 해요. 네 명의 용의자 중 한 명의 용의자에게만 강력한 동기가 있으면 맥빠지는 전개가 일어날 수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는 한데, 사실 잘 만든 추리컨텐츠에서 Whydunit으로 얼마나 큰 서스펜스를 줄 수 있는지 생각하면 유저 입장에서는 조금 욕심을 부려봄직도 해요. 대표적으로 크라임씬 예능의 한 에피소드가 레전드로 칭송받는데, 이 에피소드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는 Whydunit이 무대로 확 올라오는 순간이거든요. 아무튼 서스펙트 추리의 메인 무대에서 whydunit의 비중을 살짝 줄인건 맞는데, 재미있는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인이 플레이어들의 동기를 밝혀내야하는 게임 구조가 역설적으로 Whydunit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고 있다는 부분이죠. 한 발의 총알로 여러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효율적인 구조였습니다.
아 그리고 이건 차기작에서는 좀 반영되었으면 하는 부분인데 튜토리얼이 없기 때문에 내 비밀에 대해 어디까지 숨겨야 하는지, 범인이라면 다른사람의 비밀에 대해 어떤방식으로 서술해야 하는지, 게임의 분위기가 어떤지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요소가 전무합니다. 때문에 시나리오 1은 감을 잡는 준비운동 정도로 작용할 수 있는 경우가 없잖아 있어요. 아싸리 게임 단서와 라운드수를 간소화한 튜토리얼을 하나 넣어주시면 좋았을텐데 말이에요.물론 팀 서스펙트의 오랜 개발기간을 거쳐 나온 네 개의 시나리오는 충분한 하나의 흐름을 이루어냈고, 여기에 짧은 시나리오를 굳이 더 붙일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셨을 수도 있긴 하겠지만... 플레이어로서는 그래요. 이만큼 맛있는 식사가 차려져있는데, 식사방법을 알려주지 않아서 그 맛을 오롯이 즐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서스펙트게임을 가장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그룹은 "이미 시나리오를 모두 끝낸 플레이어가 가이드를 봐주는 후속 4인 그룹"이 아닐까 싶어요.
5. 마치며
어떻게 이야기를 하다보니 부족한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긴 했는데, 당연히 대부분의 단점은 "저런 장르를 좋아하며 준비를 철저히 하는 플레이어"와 함께있다면 역으로 장점이 되어버립니다. 길게 이야기 할 것도 없어요. 같이 할 사람이 있고, 4명이 모일 수 있다면 서스펙트 게임은 안하면 손해입니다. 아시죠? 이런 게임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여기저기에 스포인듯 스포아닌 스포같은 스포가 떠다닌다는거. 이게 스포인지 아닌지 애매한 내용도 게임 몰입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품절이라는 단점도 있었는데 이제 그 단점은 극복되었으니 남은건 같이 할 사람만 모으면 됩니다. 빨리 움직이셔야 아직 안한 플레이어들을 그룹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거라구요.
어떤 컨텐츠든 "재미있다" 보다 좋은 평가는 "나만 하기 아깝다" 라는 평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함께 플레이 했던 아내와 입을 모아 내린 평가가 딱 저랬어요. "너무 재밌게 놀아서 다른사람도 해봤으면 좋겠다. 물론 내가 그 플레이에 참여하지는 못하겠지만 다른사람이 하는 것을 쳐다만 봐도 또 재미있을 것 같다." 라고요. 그리고 그 이후로 어디든 한 군데 내밀어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되었든 동료 선생님들이 되었든 꼭 한번 언젠간 플레이시켜보고 싶어요. 다시 말하지만 정말 "나만 하긴 아까운" 게임이에요 :) 아마 언젠가는 이런 크라임씬류 게임이 지금의 레거시시스템 유행현상이나 방탈출게임 유행현상처럼 산발적으로 발매될 지 모릅니다. 그리고 실제로 2022년 적잖은 크라임씬 장르 보드게임이 발매되었죠.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이런 장르가 메인스트림으로 발돋움한다면 서스펙트 게임은 분명히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거에요. 팬데믹 레거시가 레거시 시스템의 시초도 아니고 가장 재미있는 레거시 게임도 아니지만 레거시 게임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항상 좋은 평가를 받는 것 처럼 말이죠.
누군가의 게임을 이토록 애가 타게 기다렸던 적은 없었습니다. 시즌 1, 잘 깔아주신 멍석에서 원없이 잘 놀고 미련없이 털고 일어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 팀 서스펙트가 야심차게 준비한 두 번째 멍석위에서 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준비를 끝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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