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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 리뷰 및 후기 "니들이 물약 맛을 알아?" - 알케미스트의 테마
  • 2014-11-19 02:15:30

  • 0

  • 3,239

Lv.1 뿅태
* 아래 글은 다이브다이스에서 진행 중인 <알케미스트> 시연회에 참가 후 작성된 것입니다. 플레이 경험은 1회에 불과하기 때문에, 리뷰라기 보다는 첫인상에 가까운 평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행사로 좋은 게임을 만나게 해주신 다이브다이스 담당자님께는 미리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알케미스트 로고.jpg



이야기가 있거나, 이야기가 없거나.

 

이 세상 모든 보드게임은 둘로 나뉠 수 있다. 이야기가 있거나, 혹은 이야기가 없거나.

 

<모노폴리>를 생각해보자. <모노폴리>엔 이야기가 있다. 거기서 우리는 꼬박 꼬박 나오는 월급을 모아 땅을 사고(필시 평범한 직장인은 아닐 터), 독점을 위해 상대방과 협상도 한다. 땅문서는 그저 숫자와 이름이 적혀있을 뿐인 종이쪽지가 아니며, 방금 세운 건물도 단지 플라스틱 피규어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땅문서를 종이쪽지로, 건물을 플라스틱 피규어로 생각하는 게 더 힘들다. <모노폴리>는 돈을 모아 땅도 사고 건물도 짓고 임대료도 받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게임이기 때문이다.

 

반면 바둑은 어떤가? 바둑에서 바둑돌을 ‘병사’나 ‘세균’ 등으로 애써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서로를 구분할 목적으로 나눈 흑과 백의 색에 꼭 무슨 의미를 더 부여해야 할까? 아니다. 바둑에서는 돌을 ‘병사’로, 색을 ‘국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더 번거롭다. 돌은 돌이고 흑은 흑이다. 바둑의 규칙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바둑이 삶에 대해 특별한 교훈을 준다고 상상하는 것은 자유지만, 상상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 자체는 바둑에 정해진 이야기가 없다는 증거다.

 

모노폴리.jpg

바둑.jpg

<모노폴리>와 바둑. 이야기가 있거나, 이야기가 없거나!

나는 같은 값이면 이야기가 있는 편이 더 좋다. 하지만 "어떤 짐승은 다른 짐승보다 더 평등"(동물농장)하고, 어떤 보드게임은 다른 보드게임보다 더 이야기 있다. 보드게이머 전문 용어로 ‘테마성’ 강한 보드게임되시겠다. 그럼 이런 보드게임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보드게임을 제외하면 된다. 나쁜 말로, 마치 이야기가 있는 척 사기(?)를 치는 게임을 걸러낼 줄 알면 된다. 잘 모르겠다면 간단한 테스트 방법이 있다. 게임을 하고 나서 스스로에게 다음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1) 규칙을 설명할 때, 게임의 이야기도 함께 설명하게 되는가? 2) 같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이야기에 나온 용어를 자주 입에 올렸는가? 두 질문에 대한 답이 부정적이면 게임의 이야기는 사기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분류 방식이 아까울 정도로 ‘더 더 더’ 이야기 있는 보드게임도 나오곤 한다.

 

<알케미스트>가 그렇다.

 


이야기 이상의 체험

 

그냥 이야기가 있는 수준을 뛰어넘는 게임이 분명히 있다.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 하는 일과 플레이어가 해야 하는 일이 정확히 일치할 때가 그렇다. 컴퓨터 롤플레잉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똑같이 전사를 조작하더라도, 쿼터뷰 시점에서 공격 명령을 내릴 때와 1인칭 시점에서 칼을 휘두를 때의 고민과 긴장은 다른 법이다. 전자라면 전체를 조망하는 전술가의 입장에서, 후자라면 직접 전사의 입장에서 고민하게 된다. 즉, 1인칭 시점에는 이야기 이상의 뭔가가 있다. 이 수준이 되면 플레이어는 게임을 하면서 이야기를 직접 ‘체험’한다.

 

발더스 게이트.jpg

쿼터뷰를 채택한 대표적인 RPG <발더스 게이트>


스카이림.jpg

1인칭 시점의 RPG <스카이 림>


사람들은 흔히 ‘체험’을 디지털 기반 게임의 특권이라 여긴다. ‘체험’을 1인칭 가상현실의 구현으로 국한하면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야기 속 등장인물의 고민과 긴장을 플레이어에게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보드게임은 다른 디지털 기반 게임에 전혀 밀리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략 워게임이다. 비록 일선에서 직접 싸우는 병사의 경험은 전달되지 않지만, 전략의 입안자로서 느낄 나름의 고뇌는 충분히 전달된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풀어나가는 방식과 전략가가 전쟁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스타크래프트> 같은 RTS 게임이 워게임보다 못한 ‘체험’을 제공한다고 볼 수도 있다. 거기서 플레이어는 마린의 행동을 마이크로 단위까지 컨트롤해서 럴커의 가시 공격을 피하는데, 이때 우리 보드게이머들은 (좀 고리타분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전장의 지휘관이 할 법한 일일까요?” 물론 <갤러그> 같은 슈팅게임의 재미는 있겠지만.

 

그러나 어쨌든, 지금까지의 보드게임이 개인보다는 관리자로서의 ‘체험’에 집중해 온 것은 사실이다. 워게임은 말 안 해도 아실테고, <케일러스>같은 일꾼 놓기 게임도 그렇다. 플레이어는 일꾼을 거느리고 그들에게 일당을 주는 관리자가 된다. 하루 벌어 하루 살아야 하는 일용직 노동자의 고뇌는 게임의 관심사가 아닌 것이다. 또 <푸에르토리코>는 어떤가? 사탕수수밭에서 종일 일해야 하는 이주민의 낙이란 무엇일까?

 

그런데 <알케미스트>는 다르다. <알케미스트>는 이야기 이상의 체험을 제공할 뿐 아니라, 관리자가 아닌 개인의 체험에 집중한 몇 안 되는 보드게임 중 하나다. 그렇다. <알케미스트>의 주인공은 연금술사고, 플레이어는 바로 이 연금술사가 된다. 규칙 설명부터가 이미 연금술사로서 내가 할 법한 일의 목록이다. : 재료 채집, 실험, 각종 물약 판매, 논문 작성, 논쟁, 박람회 참가, 마법 도구 구매. 때로는 연구보조금을 노리고 허위 논문을 작성하는 부정직한 학자가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진리의 수호자가 되어 허위 논문을 공개적으로 반박한다. 다른 누굴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다. 플레이어 자신이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알캐미스트 행동.jpg

<알케미스트>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 사진은 <알케미스트>의 4인용 보드


따라서 <알케미스트>는 사실 ‘일꾼 놓기’ 장르에 딱 들어맞는 게임이 아니다. 메커니즘 말고, ‘이야기’를 따져 보면 특히 그렇다. 나 대신 일을 시킬 일꾼이 <알케미스트>에는 없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행동점(큐브)을 계획적으로 분배해 직접 일을 한다. 즉 <알케미스트>에서 ‘일꾼 놓기’는 스케줄 관리에 가깝다. 규칙 자체도 일반적인 ‘일꾼 놓기’ 게임과 조금 다르다. ‘일꾼 놓기’ 게임의 핵심 규칙은 결국 무엇인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일터마다 일꾼 1명 씩!" ‘일꾼 놓기’ 게임에 ‘일꾼 막기(혹은 알 박기)’가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일꾼 놓기’는 서로 밀고 당기는 치열한 수읽기를 이 '일꾼 막기' 하나로 세련되게 유도한다. 하지만 ‘일꾼 막기’는 게임을 위해 이야기를 희생한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이야기로 따져보면 아주 불합리한 규칙이 ‘일꾼 놓기’의 핵심인 것이다. “왜 이 마을에는 물레방앗간이 하나 밖에 없는가!” (<보톡스> 제52회 ‘게임 대 게임: 일꾼 놓기’ 방송분 참고) 

 

알케미스트 행동점.jpg

<알케미스트>는 행동점(큐브)을 각 행동칸에 분배해 행동을 한다.


하지만 <알케미스트>의 ‘일꾼 놓기’에는 ‘일꾼 막기’가 없다. 상대가 먼저 실험했다고 내가 실험 못 하는 것 아니고, 상대가 먼저 논문 발표했다고 내가 발표 못 하는 것 아니다. 물론 이런 건 있다. 상대가 먼저 채집한 멘드레이크를 내가 또 채집 못 하고, 상대가 먼저 구입한 마법 망원경을 내가 또 구입하진 못 한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야기도 살리고 수읽기의 긴장감도 살렸다는 말씀!

 


체험을 체험답게 만드는 마지막 하나.

 

그러나 여기까지였다면 내가 이토록 <알케미스트>의 테마를 칭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알케미스트>의 체험을 논할 때, 화룡점정은 역시 ‘추리’다. 추리게임의 요소를 도입한 결정은 그냥 기발하기만한 아이디어가 아니다. 체험의 완성을 생각하면 꼭 필요한 결정이기도 했다. 보통의 과학자가 하는 핵심 업무는 ‘추리’로 대변되는 문제 풀이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이다. ‘패러다임’으로 유명한 토마스 쿤은 일찍이 이런 말을 했다. “정상과학은 문제 풀이의 연속이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문제를 풀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과학자가 풀어야 할 문제는 정해진 규칙에 맞게 풀어야할 퍼즐과 같다. 즉, 정상과학의 관심사는 문제를 푸는 새로운 방식(새로운 패러다임)을 발명하는 일이 아니다. 알려진 풀이법에 맞게 새 문제를 푸는 것이 정상과학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토마스 쿤.jpg 과학 혁명의 구조.jpg
토마스 쿤과 그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

<알케미스트>는 정상과학의 위와 같은 특징을 ‘추리’ 하나로 잡아낸다. 먼저 정상과학 고유의 문제가 제시된다. “여기 8개 재료 각각의 연금학적 속성은 무엇인가?” 다음으로 풀이 규칙과 구체적 해법이 나온다. “소양(+)과 대양(+)을 합하면 양의 성질을 띤 물약이 나온다. 소음(-)과 대음(-)을 합하면 음의 성질을 띤 물약이 나온다. 따라서 재료를 섞어 나온 결과를 확인하면 각 재료의 연금학적 속성을 알아낼 수 있다.” 자, 이것을 이제 토마스 쿤을 따라 연금학 패러다임이라 불러보자. 연금술사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어진 연금학 패러다임에 맞게 문제를 푸는 것이다. 다른 조수나 학생, 교수가 대신해서 풀어주지 않는다. 플레이어 자신이 직접 문제를 풀어야 한다. ‘추리’는 플레이어의 고민과 연금술사의 고민을 완전히 일치시켜 버린다.

 

연금학 패러다임.jpg

<알케미스트>의 연금학 패러다임. 
붉은색 대양(+)과 붉은색 소양(+)을 더하면 양의 성질을 띤 붉은색 물약이 나온다.


간단히 말해, <알케미스트>에서 플레이어는 뼛속까지 연금술사가 된다. 게임의 테마에 관한 한 <알케미스트>의 단점은 하나뿐이다.

 

아쉽게도, 연금술사가 가끔 마시기도 하는 물약의 맛은 재현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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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Lv.10 koon
    • 2014-11-19 07:31:04

    헐~~~ 대단합니다....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어 버렸네요. ^^;;사실 게임 소개글은 글이 길면 중간중간 스킵하는데 아주 몰입감이 높았어요.묘하게 알케미스트 얘기가 적게 들어갔다고 생각 되면서도 어떤게임인지 잘~ 보여주는 글이네요.잘 보고 갑니다. ^^
    • Lv.1 뽀다하
    • 2014-11-19 09:55:03

    잘 읽었습니다.^^
    • Lv.1 쿠젤
    • 2014-11-19 10:51:24

    글솜씨가 정말 뛰어나시네요!알케미스트에 대한 강한 흥미를 유발시킵니다.마지막의 짧은 유머도 최고! ㅋ
    • Lv.1 UltraManiA
    • 2014-11-19 15:12:31

    펀딩의 욕구를 더 땡기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조만간 펀딩해야겠습니다. ㅎㅎㅎ
    • Lv.1 살구맛
    • 2014-11-19 17:39:03

    글을 굉장히 잘 쓰시네요 읽다보니 끝이라니..  ㅎㅎ
    • Lv.1 뿅태
    • 2014-11-19 19:23:08

    네 쓰고보니 알케미 얘기가 적어서 저도 좀 고민하긴 했는데, 또 생각해보면 이렇게 써야 제가 받은 느낌을 잘 전달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Lv.1 뿅태
    • 2014-11-19 19:23:32

    감사합니다.^^
    • Lv.1 뿅태
    • 2014-11-19 19:24:10

    ㅋㅋㅋㅋ 웃겨 드렸다면 다행입니다! 
    • Lv.1 뿅태
    • 2014-11-19 19:25:22

    넵! 이것도 어서 한글화추진해서 코보게의 업무량을 늘려봅시다 ㅋㅋㅋㅋ 
    • Lv.1 뿅태
    • 2014-11-19 19:27:23

    살구맛님! ㅋㅋㅋ 사실 전략에 대해서도 쓸 예정인 글이었는데, 일단 시간 관계상 테마만 올린 글이에요. 전략도 뭔가 심리전 관련해서 팔 가치가 있는 것 같은데, 아직 1번 밖에 해보지 못한터라 머릿속으로만 생각 중....
    • Lv.41 아따기야
    • 2022-03-24 11:41:53

    후기 퀄이 상당하군요.. 알케미스트 사랑하는 게임입니다 저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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