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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 리뷰 및 후기 길고 긴 황혼의 투쟁, 그 마지막 격전지. 『1989: 자유의 여명』
  • 2015-06-06 23: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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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54

Lv.1 Dr. KOSinus
 약 10년 전에 GMT games에서 출시된, 보드게임긱 차트 1위를 몇 년째 차지하고 있는 전설적인 명작이 있습니다. 바로 『황혼의 투쟁(Twilight Struggle)』(이하 TS)입니다. 1945년부터 1989년까지 전 세계에 걸쳐 벌어졌던 냉전을 다룬 전략게임입니다.

 초판 발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2판ㆍ3판이 나왔고, 2009년에 이르러 옵션 카드가 7장 추가되고 디자인이 예쁘게 바뀐 디럭스 에디션이 나왔습니다. 작년에는 특별판인 '콜렉터스 에디션'과 온라인 버전인 '디지털 에디션'의 펀딩이 780% 초과달성(한화로 약 4억 원)을 이룩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디지털 에디션 마지막 특전으로 한국어와 중국어가 추가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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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혼의 투쟁』 콜렉터스 에디션 / 디지털 에디션의 킥스타터 포스터.
(출처 : https://www.kickstarter.com/projects/559431060/twilight-struggle-digital-edition/description)




 처음 『TS』가 나오고 몇 년 뒤, 이 게임의 팬인 Ted Torgerson 씨는 테마를 바꿔 새로이 게임을 만들어냈습니다. 시간적 배경을 『TS』마지막 턴인 1989년으로 고정하고 공간적 배경을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로 고정시킨 『1989: 자유의 여명(1989: Dawn of Freedom)』(이하『1989)이 바로 그것입니다. 소련에게 버림받고 무너져가는 권력을 겨우 유지하던 동구 공산당, 그리고 그에 맞서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려고 싸우는 동유럽 민주화 운동가들을 다룬 게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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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 자유의 여명』.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 과정을 109장의 카드 안에 압축했다.
(출처 : http://geekdo.com/image/1281882/1989-dawn-freedom)


 

 이 게임은 2007년, PnP (Print and Play) 형태로 처음 공개됐습니다. 정식 게임도 아닌 그냥 팬메이드 게임이었죠. 소련을 공산주의자로 치환하고, 미국을 민주주의자로 치환하고, 데프콘 트랙은 소련 안정도로 바꾸고, 우주 개척 경쟁 트랙은 천안문 광장 트랙으로 바꿨습니다. 하지만 Torgerson 씨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게임이 원작과 차별화될 만한 요소를 만들어 넣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권력투쟁(Power Struggle)이며 또다른 하나는 양측이 점령하는 구역마다 정체성을 부여한 것입니다.

 『1989』가 PnP 버전으로 올라온 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돌연 웹페이지에서 PnP 파일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GMT games에서 연락이 와서 그 파일을 모두 내리라 했다고 합니다. 자기들과 함께 더 다듬어서 정식 발매하자고 하면서요. Torgerson 씨는 쾌재를 부르며 머리에 슈프레발트 피클을 얹고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물론 뻥입니다.) 드디어 2010년, GMT games 타이틀을 달고 『1989』가 정식 발매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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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 보드. 1989년 드라마의 무대가 되는 동유럽 공산국가 6개국이 나와있다.
(출처 : http://www.gmtgames.com/1989/1989Map-Final-72.jpg)




 대략적인 골격은 『TS』와 비슷합니다. 게임은 10턴으로 구성되며, 한 턴은 7 액션 라운드로 나뉩니다. 플레이어는 번갈아가며 카드를 1장씩 쓰는데, 카드는 사건과 작전으로 쓸 수 있으며 상대방 사건 카드를 쓰면 사건이 강제 발생합니다. 각 구역은 양측 플레이어의 지지도(Support Point)를 배치해서 장악할 수 있습니다. 승점 카드가 사용되면 승점을 계산하며, 그러다 어느 한 쪽이 승점 20점을 획득하면 자동 승리합니다.

 게임이 시작할 땐 공산주의 세력이 동유럽을 덮고 있습니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민주주의 세력이 힘을 얻어 각 나라마다 정권을 뒤엎으며 공산당을 무찌릅니다. 공산주의 세력은 초반에 최대한 밀어붙이면서 끝까지 버텨야 하고, 민주주의 세력은 점차 강력해지는 힘으로 동유럽을 천지개벽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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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에 모이기 시작한 시민들. "장벽을 무너뜨려라!"
(출처 : http://geekdo.com/image/1668282/1989-dawn-freedom)




 이처럼 기본 엔진은 같은 것을 쓰지만 실제적으로 두 게임은 꽤 다릅니다. 우선 1989』에는 각 진영을 상징하는 단일 행위자가 없습니다『TS』 게임에는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양대 초강대국이 있고 그 모습이 지도에도 번듯하게 나와 있습니다. 카드 사건도 "미국이 어디에 뭘 한다",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해서 세계를 멸망 직전으로 몰고간다" 등등 그 주체가 명확합니다.

 반면 『1989』게임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행위자는 동유럽에서 각자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입니다. 동유럽 각국의 공산당이나 민주 투사들은 모두가 하나의 지휘체계에 묶여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산당 정권을 모두 관장하는 플레이어를 "더 코뮤니스트(The Communist)"로 표현하고, 바웬사/하벨/그 외 모든 민주화 인사들을 맡은 플레이어는 "더 데모크랏(The Democrat)"으로 표현합니다. 즉, 개별 국가마다 따로 일어나는 싸움을 플레이어가 한꺼번에 관장하는 양상이며, (게임 내 행위자가 아니라)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에게 특별한 이름을 부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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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도하게 조심스러운 부시 허버트 대통령. "동유럽 사태는 당분간 지켜보기만 합시다."
(출처 : http://geekdo.com/image/2093238/1989-dawn-freedom)




  『TS에서는 정치외교적 영향력 외에도 군사 행동(전쟁, 쿠데타, 군사작전점수, 데프콘 등)이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허나 행위자가 각국 정치인사들 묶음으로 바뀐 『1989에서는 군사적 요인이 개입하지 않습니다. 오직 각 나라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헤게모니 변화만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군사적 긴장을 표현한 데프콘도 없고 전쟁도 없으며 군사작전점수도 없습니다. 초기 PnP 버전에서는 소련 안정도가 데프콘 역할을 했었지만 정식 버전에 와서는 그 역할이 사라졌습니다. 소련 안정도가 떨어져서 발트 연안국이 독립하고 고르비가 길바닥에 나앉아도 게임이 종료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고르바초프가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고 동유럽 위성정권 무력지원을 회수한 게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큰 유혈사태는 루마니아에서만 일어났지요.

 그래서 승리 조건도 ([신년 전야제] 사건을 빼면) 승점 획득에 모든 게 달려있습니다. 턴 끝날 때 승점 카드를 들고 있으면 패배하긴 하지만 그건 반칙패니까요…. 승점 카드를 썼을 때 공산당이 권좌에서 쫓겨난 국가에서는 (헤게모니 교체가 일어났으므로) 더이상 승점을 계산하지도 않습니다. 게임 끝났을 때 여전히 공산당이 권력을 유지하는 국가가 있으면, 그 숫자만큼 공산세력 플레이어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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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고국 폴란드의 민주화에 크나큰 힘을 실어준 요한 바오로 2세.
(출처 : http://geekdo.com/image/2093238/1989-dawn-freedom)

 


 군사 행동이 없어진 대신 각국의 정치싸움이 더 치밀하게 표현됐습니다. 그 중 하나가 "권력투쟁(Power Struggle)"입니다. 승점 카드가 사용되면 승점 계산 전에 권력투쟁이 먼저 벌어집니다. 동독 승점 계산 카드를 쓰면 동독 권력투쟁이 일어나는 식입니다.

 권력투쟁에 쓰는 카드 덱이 따로 있고, 그 국가에 퍼져있는 지지도에 따라 양측이 쓸 수 있는 카드 숫자가 달라집니다. 권력투쟁이 일어나면 그 나라 지지도 판세가 출렁이는데, 이는 이어지는 승점 계산과 추후 게임에도 영향을 줍니다. 권력투쟁에서 공산세력 플레이어가 이기거나 민주세력 플레이어가 근소하게 이기면 아직 그 나라에선 공산당이 권력을 잡고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만약 민주세력 플레이어가 크게 이긴다면 공산당이 붕괴하고 민주화에 성공한 것으로 취급합니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나라의 승점 카드는 제거되며, 10턴 후 최종 승점 계산 전까지는 그 국가에서 절대 승점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은 싸움은 공산당이 아직 버티고 있는 나라들로 집중됩니다.

 이걸 이용해서 공산세력은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권력을 민간에 이양할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승점 계산에서 크게 털리겠다 싶거나 아니면 확보해둔 지지도를 유지할 생각이면 공산세력 플레이어가 자발적으로 권력을 양도하는 것도 괜찮은 전략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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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난 국민들의 반발에 당황한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이봐! 이봐! 동무들?!"
(출처 : http://www.gmtgames.com)




 게다가 게임 진행은 『TS』보다 훨씬 화끈하고 폭발적입니다. 사건들도 훨씬 강력하고 작전 수행도 더욱 공격적입니다. 일반 작전 중 상대 지지도를 공격하는 작전이 있는데 이걸 『TS』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재조정 보너스를 적용시킨 쿠데타를 데프콘 제한 없이 한 번에 연속 2회 시도" 정도 되겠습니다. 단 한 방에 두 구역까지 초토화시키는, 『TS』에서 4 OP짜리 사건으로나 볼까말까한 위력을 여기서는 일반 작전으로 낼 수 있습니다.

 민주화 혁명으로 한 국가씩 펑펑 뒤집어질수록 남은 국가에 양측 에너지가 몰려서 게임은 더욱 치열해집니다. 시스템상 공산정권을 순차적으로 터트려나가야 하므로 카드 위력이 훨씬 파괴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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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가 벌어지는 천안문 광장. 리 펑 총리가 유혈 진압을 추진하고 있다.
(출처 : http://geekdo.com/image/2091385/1989-dawn-freedom)


 

 배경이 동유럽이라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비교적 낯설지만 게임성은 (세계 최고의 게임에서 물려받았으니) 확실한 게임입니다. 좀 더 세밀하고 치열한 영향력 싸움뿐 아니라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과정도 다루고 있으므로 "지구상 마지막 냉전지대"라 불리는 우리나라 정세를 읽는 시야도 넓혀줄 것입니다.
 
 『황혼의 투쟁』의 매력을 경험해보신 분이라면 『1989: 자유의 여명』에 꼭 도전해보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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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Lv.4 게이밍어니언
    • 2015-06-07 01:52:01

    이 멋진 게임의 출발이 팬메이드 게임이었다니 정말 놀라운 사실이네요. TS와 닮았으면서도 색다른 재미를 주는, 절대 TS에 뒤떨어지지 않는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좀더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는데 즐기는 분이 적어서 아쉽네요.처음에는 입이 딱 벌어지는 이벤트 내용들에 전율하면서 민주주의자가 너무 유리한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계속하면 할수록 사실은 공산주의자가 유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고, 결국에는 TS처럼 카드와 운영 그리고 약간의 운으로 한끗차이 승부가 벌어지는 잘 만든 게임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 Lv.1 Dr. KOSinus
    • 2015-06-09 15:43:58

    이 게임의 묘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처음 볼 땐 "어? 이거 너무 한쪽으로만 기운 거 아냐?" 하다가도 몇 번만 더 해보면 그 절묘함에 놀라는…. 접근성만 조금 더 나아지면 많은 분들이 자주 즐겨 하게 될 것 같은 게임입니다.
    • 2015-06-26 23:34:25

    황투를 정말 좋아하는 1인으로써.. 글을 보는 내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ㅎㅎ
    • Lv.41 아따기야
    • 2022-03-24 11:45:38

    황투의 시작이 있다니... 정말 멋지네요. 게임판에서 클래식한 멋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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