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커뮤니티 > 리뷰 및 후기 나는 논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제1편 잉여 예찬
  • 2015-07-04 08:07:45

  • 0

  • 1,852

Lv.7 Equinox

나는 논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I play, therefore I am.


제1편 잉여 예찬 剩餘 禮讚


1. 


“놀고 있다.”


한국어에서 이 말만큼 극적인 의미의 변화를 겪는 말이 또 있을까? 5살 어린이의 행동을 일컫는 표현으로서의 “놀고 있다.”와, 25살 청년의 상태를 표현하는 “놀고 있다.”의 의미는 확연하게 다르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놀이”를 종용받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부모는 자녀들의 놀이를 권장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놀이를 접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환경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어린이는 노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잘 놀지 않는 어린이는 오히려 근심의 대상이 되기까지 한다. 분명 “놀고 있다.”는 말은 긍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입시와 경쟁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놀고 있다.”는 말은 그야말로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놀이는 긍정적 의미에서 부정적 의미로, 심지어는 정신세계를 피폐하게 만든다는 오명까지 뒤집어 쓰게 된다. 놀이의 한 갈래인 온라인 게임은, 국회에서 법안을 통해 중독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공인받으며, 해당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과 이를 향유하는 사람들을 좌절시키고 있다. 


대학입시를 통과하고 나서도 놀이는 오명을 벗지 못한다. 이제는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로 놀이를 금지당하게 된다.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러고 놀아?”라는 말을 들을 때면, 마치 받은 적도 없는 물건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받는 것과 같은 억울함마저 느끼게 된다. 우리가 언제 한번 제대로 노는 것을 허락받은 적이 있었던가!


게다가 놀이가 긍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연령대마저 시간이 갈 수록 점점 내려가고 있다. 초등학생, 심지어 미취학 아동마저도 놀아야 할 시간이, 극심한 서열 경쟁의 열풍으로 인해, 계속 침범당하고 있다. 우리는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한 채, 놀이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기회마저 갖지 못하고 만다.


과연 놀이는 나쁜 것일까? 놀이의 본질이 무엇이길래, 한국인들의 의식속에서 이렇게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일까?


2. 


한국사회에서 최근 자주 등장하는 단어 가운데 “잉여(剩餘)”라는 표현이 있다. 본래 사전적 의미로는 “쓰고 난 나머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현대 한국어에서는 주로 사람을 지칭하면서 쓸모 없는 존재를 의미하는 자조적이거나 부정적인 용법으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특히 돈을 벌지 못하는 행위를 열심히 하는 존재, 또는 그 행위를 표현할 때 “잉여”라는 말을 쓰곤 하니까, 결코 긍정적인 대접을 받지 못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잉여야 말로 인류를 만든 원동력이다. 인류를 다른 무리와 구분짓는 중요한 특징인 문화는 바로 이 잉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문화(文化)를 의미하는 영단어 Culture는, 본래 농경(農耕)을 의미하는 Agriculture에서 비롯된 말이다. 도대체 농경과 문화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농경 이전에 인류가 삶을 유지했던 방식은 수렵(狩獵)과 채집(採集)이다. 동물을 사냥해서 잡아 먹거나, 과일 등을 따먹는 이러한 방식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방식이 될 수 밖에 없다. 보존이 어렵고,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먼 미래를 대비하는 식량생산이 불가능하고, 그런 이유로 삶을 영위하는 모든 구성원들이 수렵 또는 채집, 즉 생산활동에 종사해야만 했다.


그러나, 농경이 시작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농경의 높은 생산성과 곡식의 좋은 보존성은, 한 사람의 생산활동만으로 여러 사람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농경은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을 만들어냈고, 이는 요즘 표현으로 “잉여”에 해당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농경의 생산성이 증가할 수록 더욱 다수의 잉여존재들을 만들어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식량을 직접적으로 생산하지 않고 있다. 


생산활동에서 자유로워진 인류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아이들을 보면 된다. 어른들의 욕심을 배재한다면 아이들은 대부분 노는데 모든 에너지를 집중한다. 인류가 생산활동에서 벗어나서 처음 했던 모든 행동은 사실 즐거움을 찾기 위한 행동, 즉 놀이였다. 심지어 농경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인류는 틈만 나면 놀고 싶어했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보라. 그들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생존에 필요한 행위라서, 아니면 후대에 기록을 남겨야 겠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서 한 것일까? 그냥 즐거워서 한 것이다. 구석기인들이 놀았던 흔적인 것이다. 


그 이후로 인류가 꽃피운 모든 문명은 바로 이 잉여의 존재들이, 스스로의 즐거움에  매진한, 놀이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음악과 미술을 비롯해서, 과학, 정치, 법률 등 모든 것들이 비생산활동을 하는 잉여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주선을 만들어 대기권 밖으로 쏘아올리는 행위는 내 입에 음식물을 집어넣는 행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이고, 이는 현대 한국어에서 극히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잉여의 소산(所産)이지 않은가.


역사가 요한 호위징아(Johan Huizinga)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놀이는 문화보다 오래되었다.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며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언제나 함께 해왔고 다양하게 발전했다. 인간은 생각하는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인 동시에 유희의 인간인 호모 루덴스(Homo Ludens)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것들은 놀이의 법칙을 따르고 있고, 놀이의 요소를 갖고 있다. 진정한 문명은 놀이의 요소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인류 문명은 잉여들에 의한 놀이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3. 


어느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근면은 노예의 미덕”이라고. 


우리가 초중고교 12년의 시간동안 습득하게 되는 지식의 양은, 고작 DVD 한 장에도 미치지 못할만큼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정도의 지식들을 머릿속에 우겨넣고, 이를 경쟁하기 위해, 노예의 미덕인 근면을 강요당하고, 놀이를 금지당한 것이다. 

 

놀이는 인류문명을 가능케 한 위대한 행위이다. 놀이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팽배한 사회는 노예는 양산할 수 있을지 몰라도, 문명을 향유하고, 문화를 창조하는 “인류의 일원”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놀이는 내가 인류의 일원으로서 존재함을 증명할 수 있는 행위이며, 이는 잉여만이 가능한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오늘도 사회의 부정적 편견과 싸우고 있는 잉여들이여, 분연히 일어나서 이렇게 외칠지어다. 


“나는 논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I play, therefore I am.”


  • link
  • 신고하기

관련 보드게임

  • 관련 보드게임이 없습니다.
4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Lv.7 Equinox
    • 2015-07-04 08:15:12

    본래 칼럼 기고 요청을 받아서 작성했던 글인데, 수준 미달 (혹은 부적합) 판정을 받아서 (;;;) 게재가 취소되었습니다.그래도 며칠동안 신경써서 쓴 글인데, 그냥 폐기하긴 아까워서 올려봅니다. 독자들의 반응에 따라 연재를 할 수도 있....을까요? 암튼 3~4편 정도 써놓은 건 있는데 잘 모르겠네요. 여기에 올리는 게 바른 건지, 그른 건지...욕설을 제외한 어떤 형태의 피드백도 환영합니다. ^^;;
    • Lv.10 koon
    • 2015-07-04 11:37:41

    잘 읽었습니다. ^^웬지 잉력 다음 주제는 덕력일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ㅎㅎㅎㅎ잉여력에서 시작해서 자기 만족으로 끝나는 덕력은 좀더 완벽하고 좀더 좋은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도 하죠.가끔 특정 분야에서 덕력을 발휘해서 성공한 덕후가 된 소위 "성덕"의 사례들도 있기도 하고요.여튼~ 앞으로 연재 기대하겠습니다.
    • Lv.1 우성우성
    • 2015-07-06 15:34:59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 앞으로 종종 올려주시면 좋겠네요.
    • Lv.1 구름달
    • 2015-07-07 16:38:37

    보라에서 2편을 먼저 읽었네요!연재 적극 찬성입니다!잉여의 사회학 같은 담론은 꽤 퍼져 있는데, 보드게임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례 중 아닐까 합니다.개인적으로는 단순한 기승전오덕짱짱 같은 흐름은 단조로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재미나고 독창적인 이야기 많이 해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베스트게시물

  • [자유] 젝스님트/사보타지 기념판을 네이버에서만 판매하는 이유가 있나요?
    • Lv.14

      junholee

    • 9

    • 700

    • 2024-05-02

  • [자유] 4월, 이달의 내돈내산 우수 리뷰를 발표합니다.
    • 관리자

      왜마이티를거기서

    • 11

    • 547

    • 2024-04-30

  • [창작] [만화] 칠교신도시
    • Lv.44

      채소밭

    • 12

    • 334

    • 2024-04-25

  • [자유] 아나크로니 너무 저렴하네요..!
    • Lv.28

      Leo

    • 8

    • 1167

    • 2024-04-25

  • [창작] [만화] 버거가 버거워 + 페스타 후기
    • Lv.44

      채소밭

    • 10

    • 652

    • 2024-04-09

  • [후기] [만화] 테라포밍 마스
    • Lv.45

      포풍

    • 8

    • 693

    • 2024-04-05

  • [키포지] 2024.04.20 코리아보드게임즈 듀얼 대회 후기
    • Lv.1

      새벽

    • 10

    • 415

    • 2024-04-21

  • [키포지] 즐거운 대회였습니다!! (간단한 1차 후기, 사진위주)
    • Lv.36

      물고기

    • 9

    • 415

    • 2024-04-20

  • [자유] 오늘도 평화로운 하차
    • 관리자

      [GM]신나요

    • 12

    • 2825

    • 2024-04-19

  • [자유] 전업 보드게임 작가를 꿈꾸는 분들을 위해, 김건희가 인사이트를 드립니다.
    • Lv.1

      웨이브미디어

    • 10

    • 651

    • 2024-04-18

  • [자유] 머더 미스터리 상표권 관련
    • 관리자

      [GM]하비게임본부

    • 15

    • 2259

    • 2024-04-18

  • [갤러] 라스베가스로 떠난 카우보이들 (feat. 소 판 돈)
    • 관리자

      에이캇뜨필충만

    • 7

    • 957

    • 2023-09-18

  • [후기] 메이지나이트 리뷰 및 후기입니다.
    • Lv.4

      첨엔다그래요

    • 12

    • 904

    • 2024-04-12

  • [자유] 페스타 전리품
    • Lv.52

      상후니

    • 11

    • 856

    • 2024-04-10

  • [자유] 가이오트의 사망유희왕 서대문 "오빠라고 불러다오" 편
    • Lv.27

      가이오트

    • 12

    • 834

    • 2024-04-11

게임명 검색
Mypage Close My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