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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 리뷰 및 후기 나는 논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제2편 모의 가상 체험 Simulation
  • 2015-07-07 11: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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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7 Equinox
나는 논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I play, therefore I am.

 

제2편 모의 가상 체험 Simulation

 

 

1.

 

2004년 7월, 서울특별시는 대중교통 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그와 더불어 버스 노선번호와 체계도 함께 바꾸었는데, 바뀐 번호판이 문제가 되었다. 숫자의 크기가 대폭 줄어들었고, 가독성이 매우 나빠진 것이다. 항의가 빗발치자, 서울특별시는 도입한지 얼마 되지 않은 버스 노선번호를 새로 교체해야 했다. 막대한 예산이 낭비되었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

 

2.  

 

뉘른베르크Nurnberg는 매년 봄 대규모의 장난감 박람회를 개최한다. 장난감 박람회의 고장답게 도심 한 켠에는 장난감 박물관도 자리하고 있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필자는 사실 입장을 망설였었다. 장난감이 아무래도 아이들의 전유물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들어서고 나서 그 선입견이 깨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가지고 논다는 것은 연령과 세대를 막론하고 공유할 수 있는 취미였다. 특히 꼼꼼하고 세밀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장난감들은, 오히려 어린이보다 성인의 숙련된 기술을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이곳에서 압권은 단연 2층에 자리잡은 미 서부 개척시대의 축소 모형이다. 꼼꼼한 고증을 통해 마치 현실의 그것을 그대로 가져놓은 듯한 모습에 필자는 한동안 할 말을 잊었다. 무엇보다 차량이나 철길까지 하나하나 정밀하게 복원한 증기기관차 모형들은, 이것을 만든 이들이 진정한 잉여의 결정판이며, 이 취미에 심취해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3. 

 

놀이는 잉여의 가장 첫번째 시도이다. 그리고 모의 가상 체험은 그 놀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꼬마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거나 전쟁놀이를 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라. 현실을 ‘재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발현된 것이다. 마치 맹수의 새끼들이 서로간의 유희를 통해 사냥기술을 터득하는 것처럼, 현실을 모의 가상 체험하는 놀이는, 현실에서의 해당 상황을 이해하며, 숙련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놀이=비생산적”이라는 선입견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 제대로 놀이에 심취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고도로 숙련된 기술자일 가능성도 매우 높다. 오히려 놀이는 일보다 높은 생산성을 보인다.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긴 근로시간을 자랑하는 한국과, 두번째로 짧은 근로시간의 독일이, 생산성에서 오히려 역전되는 현상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어떤 행위는 일과 놀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일과 같은 놀이, 혹은 놀이 같은 일. 예컨대 만약 서울특별시가 대중교통 체계를 전면 개편하는 ‘일’을 하는 과정에, 모의 시뮬레이션을 ‘놀이’처럼 즐기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들이 모의 시뮬레이션 모델을 구축하는 과정은 일이었을까, 아니면 놀이였을까. 

 

만약 서울특별시의 대중교통체계 개편이 ‘놀이’의 일환이었다면, 과연 그들이 모의 시험을 생략했을까. 또한 뉘른베르크 장난감 박물관의 서부 개척시대 모형 제작작업이 ‘일’이었다면, 과연 그토록 꼼꼼하고 정밀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을까.

 

현실속 많은 행위에서 놀이와 일의 경계가 모호해지지만, 이들의 중요한 차이점은, 놀이가 일보다 훨씬 즐겁게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를만큼, 놀이는 고도의 집중력을 끌어내는 마력을 가졌다.

 

몰입하며 높은 생산성을 끌어내는 유희 행위. 놀이는 국가 경쟁력 향상을 위해 억압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려해야 마땅하다.

 

4. 

 

현실의 모의 가상 체험이라는 놀이를, ‘함께’ 향유하기 위해, 잉여로운 이들이 만들어낸 문화가 있다. 바로 게임이다. 게임은 이미 많은 나라에서 회화나 음악, 공연과 같은 예술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게임이 이들과는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바로 게임에 참가하는 이들이 창작자와 함께 예술작품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예술이 창작자의 결과물을 수용자가 수동적으로 향유하는 방식이었다면, 게임은 창작자가 일정한 자유도를 집어넣고 설계한 틀 속에서, 수용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함께’ 만들어간다는 특징을 지녔다. 아마도 ‘함께’ 하는 것을 주된 특징으로 하고 있는 놀이의 연장선이기 때문에 갖는 특징이리라.

 

삶은 유한하다. 한 사람의 삶속에서 직접 겪어볼 수 있는 체험의 총량은 매우 제한적이다.  게임은 이를 대폭 확장시켜준다. 게임을 통해 우리는 악덕 기업주가 되기도 하고, 포뮬라 경주의 레이서가 되기도 한다. 중세 유럽의 봉건 영주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원시 바다 속의 아메바의 삶을 체험하기도 하다. 게임은 유한한 삶을 훨씬 다채롭고 풍요 롭게 만들어주는 매력적인 예술인 셈이다.

 

이들 게임을 구현하는 수단이 PC라면 PC게임, PlayStation이나 XBOX같은 콘솔이라면 콘솔게임이 될 것이며, 탁자 위에 판을 펼쳐놓고 행해진다면 보드게임이 된다. PC와 콘솔게임이 비교적 혼자서도 손쉽게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기술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가졌고, 창작자 집단이 제한된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반해, 보드게임은 높은 전산 기술력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해 잠재적인 창작자 집단이 사실상 모든 잉여 인류 전체를 아우른다. 게다가 훨씬 오랜 역사를 지녔기 때문에, 보드게임이 구현하는 세계는 거의 모든 현실세계를 대변할만큼 방대한 표본을 가지고 있다. PC나 콘솔게임에 비해 혼자 즐기기에는 좀 부족한 면이 있지만,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는 사교적인 특징은 오히려 장점이 되기도 한다. 

 

본 칼럼은 현실세계를 모의 가상 체험하는 보드게임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떤 게임이 어떤 현실을 반영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탁자 위에서 어떤 방식으로 그려내고, 게임 참가자들에게 내재된 본성(혹은 본능)을 어떻게 이끌어내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게임 참가자들(혹은 독자들)은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자신도 모르는 또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연극배우들은, 무대에 서서 역할에 몰입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강렬한 쾌감이 있다고 한다. 보드게임을 통해 느끼는 쾌감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독자들 역시, 필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삶을 간접 체험하게 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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